【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17)] 정부수립 前 IOC 가입한 유일한 대한민국...선인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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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17)] 정부수립 前 IOC 가입한 유일한 대한민국...선인들의 노력.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08.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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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일제 때 조선체육회 창립...해방후 몽양 여운형선생이 조선체육회장.
-여운형 친서들고 IOC뛰어다닌 전경무선생...그러나 IOC총회가다가 안타깝게 비행기추락사.
-전경무후임으로 이원순선생이 친필여권 만들어 정부수립전 IOC가입 큰 공신.
-최초로 올림픽후원복권 발행...복권에 전경무선생 사진넣고 기려.

【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17)] 정부수립 前 IOC 가입한 유일한 대한민국...선인들의 노력..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E세종경제= 신수용 대기자]2020년 8월, 일본에서 열리게 된 하계 올림픽은 코로나 19로 무산됐다.

주최국 일본은 1년 연기후 개최를 낙관하고 있으나, IOC나 국제스포츠계는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전에는 쉽지 않을 듯하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때문에 일본에서 내년으로 예상하는 올림픽이 개회여부는 현재로선 반반이다.

그 만큼 고려해야할 내외적 상황이 복잡한 것이다. 

 

IOC엠블레엠[사진= 블로그 아람켑처]
IOC엠블레엠[사진= 블로그 아람켑처]

지난 1, 2 차 세계대전 중에도, 6.25 한국전쟁 중에도 열린 올림픽이다. 우리민족에게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사적으로나 올림픽은 애환과 영욕을 함께 해왔다.

애국심이 절로 표출되어 민족 자존심과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어찌보면 민족혼을 만방에 선보인 국제행사가 아닐 수 없다.

몽양 여운형선생등은 체육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을, 그리고 신학문 서양문물을 계몽하는데 주력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단 손기정선수의 금메달획득에 선인들은 조선의 자존심을버릴수 없어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다.

조선중앙일보사과 동아일보사가 이로 인해 폐간되고, 신문사 간부들이 모진 고문과 투옥이 있을지 언정, 스포츠와 민족혼은 늘 함께 해왔다.

기록과 자료들에 의하면 올림픽은 1894년 6월 23일 파리에서 쿠베르탱의 제창에 의해 창설되었다. 

1936년 일제하에서 치른 베를림올림픽 마라톤 6km에서 역주하는 손기정선수[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1936년 일제하에서 치른 베를림올림픽 마라톤 6km에서 역주하는 손기정선수[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법률상의 지위는 국제법에 의한 법인체이다. 이 올림픽 대회의  참가자격은 규정이 정해져 있다.

참가 국가는 IOC가 승인하는 국가올림픽위원회(NOC : National Olympic Committee)를 보유해야만 한다. 

우리나라는 1947년 6월에, 북한은 1957년에 각각 IOC에 가입하였다. 2020년 현재 가입국은 204개국으로, 본부는 스위스 로잔에 있다.

올림픽의 전통과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아마추어 스포츠를 발전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포츠와 스포츠 경기의 조직과 발전에 힘쓰고, 올림픽의 이상 아래 모든 국가의 경기자 간의 우호 촉진과 강화에 힘쓰며, 4년마다 올림픽경기대회의 개최를 주도한다

◇…우리의 스포츠 근간...조선체육회부터 시작.

지난달 13일은 우리나라 체육회가 창립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체육회(회장 이기흥)등과 체육인들이 모여 100주년을 축하했지만 사실 체육인이든, 비체육인이든 우리에게 매우 뜻 깊은 날이다.

우리나라의 체육사는 ‘대한민국 스포츠외교실록-대한민국 NOC(올림픽위원회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미래구상Update(제9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풀면 다음과 같다.

100주년의 긴 역사를 가진 대한 체육회[사진=대한체육회 제공]
100주년의 긴 역사를 가진 대한 체육회[사진=대한체육회 제공]

쿠베르탱 남작이 부활한 근대올림픽이 개최된 1896년의 우리나라는 구 한말였다.

우리는 그 무렵 대원군의 쇄국정책 굴레에서 점차 벗어나려고 당시 2년 전 1984년에 일어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개화(開化)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한 시대였다. 

 이때 서양문물과 함께 흘러 들어온 스포츠나 체육은 당시 정확한 개념조차 성립되지 못한 터라 정립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1910년 을사늑약이 있은 10년 후인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창립됐다.

 그래서 지난 7월 13일은  대한체육회 100주년이라는 매우 의미있는 날인 것이다.

대한체육회(현 KSOC: Korea Sports and Olympic Committee, 당초 KASA: Korea Amateur Sports Association, 이후 KSC: Korea Sports Council에 연이은 개칭)는  모태 격인 ‘조선체육회’ 창립에서 비롯되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보다 9년 쯤 빠른 1911년 일본체육협회가 조직,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대회부터 선수단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12년 쯤 지나 1932년 LA올림픽에는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3명(마라톤 김은배. 권태하, 복싱 황을수)이 일장기를 달고, 일본국적의 선수로 참가하는 치욕이 발생했다. 
 

손기정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보도내용.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해 신문사가 폐간조치를 당하기도 했다'사진=동아일보켑처]
손기정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보도내용.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해 신문사가 폐간조치를 당하기도 했다'사진=동아일보켑처]

그러더니 1936년 제 12회 베를린올림픽에는 ‘일장기말소사건’의 주인공인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종목에 참가하여 한민 족 최초의 올림픽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손기정 역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1인자자리에 올라 일제 식민지의 설움을 안았다.
  
해방후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중장등 지휘부의 반대속에도, 일부 인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손기정,서윤복, 함기용이 참가했다.

여기서 손기정은 코치로 나서 서윤복이 1위와 함께 세계 신기록의 쾌거를 세워 ‘마라톤 조선’의 강함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를 계기로 정부가 수립 되기전에 IOC에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전무후무한 스포츠 및 외교사를 새로  썼다.

즉,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IOC에 정식 가입하여 NOC(국가올림픽위원회)로서 태동한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1년 전인 1947년 6월 20일 제41차 스톡홀름 IOC총회에서 승인 받은 때이다. 
 
당초 1948년 제14회 영국 런던올림픽 참가를 염두에 두고 결성 및 승인된 KOC.

그런 KOC는 정부수립 7개월 전인 지난 1948년 1월 30일~2월 5일 스위스 생모리츠(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에 사상 최초로 한국선수단 5명(감독 1명, 선수 3명, 매니저 1명)을 파견하였다. 
 

미군정청[사진= 신수용 대기자DB]
미군정청[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이어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7월 29일~8월 14일 개최된 제14회 런던올림픽에는 69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여기서 값진 동메달 2개(복싱 한수안, 역도 김성집)를 획득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전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렸다. 

◇…한국 스포츠의 씨앗을 뿌린  몽양 여운형.

우리나라 체육사는 몽양 여운형(呂運亨1886년 5월 25일~ 1947년 7월 19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 스포츠외교실록-대한민국 NOC(올림픽위원회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미래구상Update(제9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몽양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가이다. 그의 암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활약을 더 볼수 없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전후해 건준(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그해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체육의 등불이자 역사인 몽양 여운형. 사후 그는 조선이 IOC에 가입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900여통의 편지를 브런디지 당시 IOC부위원장에게 보낸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사진=KBS켑처]
한국체육의 등불이자 역사인 몽양 여운형. 사후 그는 조선이 IOC에 가입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900여통의 편지를 브런디지 당시 IOC부위원장에게 보낸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사진=KBS켑처]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동생 여운홍(呂運弘)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데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다.

이어 1923년 국민대표회의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다가 임정을 떠났다.

이후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중국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한 인물이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 송환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주재 촉탁 통신원(특파원)과 타스 통신사 특파원으로 재직했다.

 

몽양 여운형. 오른 쪽은 모양이 직접 쓴 서명필체[사진= 대한체육회제공. 블로그 ohyh45켑처]
몽양 여운형. 오른 쪽은 모양이 직접 쓴 서명필체[사진= 대한체육회제공. 블로그 ohyh45켑처]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 사령관이 이끄는 미군정청시대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10차례 당했으며, 좌파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배후가 불확실한 백의사소속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5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 정부수립 전에 목숨걸고  IOC가입위해 뛴 전경무선생

 전경무(田耕武)라는 분이 있었다. 1900년10월18일 평북 정주  곽산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부모님이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미국으로 함께 이주했다.

이후 미국인에게 입양되어 정식교육을 받았다. 고학으로 미시건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전미국대학웅변협회 회장직을 맡는 등 놀라운 사회적 활동력을 보였다. 학창시절에 미식축구선수 및 웅변부장으로 활동했다.

여운형 조선체육회장과 산하 올림픽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선생[사진=신수용 대기자DB]
여운형 조선체육회장과 산하 올림픽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선생[사진=신수용 대기자DB]

대학 졸업 후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자동차 도장업을 시작하여 상당한 수익도 얻었다.

그러면서 워싱턴과 하와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단합회 가입하여 활동하는등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싸웠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미주 등지에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를 연합, 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1939년은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됐다.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열어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이에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열었다.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됐다.

전경무는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이어 1942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전체위원회를 열고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원동지역과 미주간의 향후 민족운동 정책에 관한 협정을 위해 중국 중경으로 특파원 파견을 결정했다.

그러자 전경무는  김호와 함께 중경특파원으로 선출되어 임무 수행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계열의 반대와 함께 1943년 9월 이승만의 지지세력인 동지회가 탈퇴해버린다.

전경무는 1944년 6월 외교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설치하여 활동했다.

임정이 8월 주미외교위원부를 조직하자 외교위원장 비서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선생과 정한경 선생 등과 한국 대표로 참석해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한 일은 독립운동사에 남아있다.

그해  8월 조국이 광복되자, 그해 11월 조국의 재건후원을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 국내파견대표단 외교위원으로서 40여년 만에 조국을 땅에 밟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46년 1월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된다.

그는 한국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정부수립전에 IOC에 가입한뒤 태큭기를 들고 런던1948올림픽 한국선수단 감격적인 선수촌 입촌식 장면 [사진=윤강로의 스포츠세상켑처]
정부수립전에 IOC에 가입한뒤 태큭기를 들고 런던1948올림픽 한국선수단 감격적인 선수촌 입촌식 장면 [사진=윤강로의 스포츠세상켑처]

그리하여 1947년 6월 IOC에서 한국올림픽위원회가 정식회원으로 승인되기 직전 여운형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IOC가입 정당성을 설득하는 등 왕성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경무선생의 사고로  이상백. 이원순의 IOC가입 대활약.

언론인 김경호선생이 쓴 스포츠외교사(김경호의 스포츠gogo학)를 보면 해방을 전후할 당시 체육인들은 개인보다 오직 나라를 알리는 애국심에 불탔다.

나라가 없는 설움에도, 엉뚱한 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나섰던 치욕을 겪은 민족이라 애국심은 더했다.

그 하나를 보면 IOC가입당시 얘기는 마치 논픽션드라마와도 같다. 

광복이 되자마자 몽양 여운형이 회장이 맡고 있는 조선체육회일을 돕는다. 

 몽양이 이끄는 조선체육회는 1946년 7월 올림픽대책위원회를 체육회내에 설치하고 위원장에는 체육회 부회장인 유억겸(兪億兼)이, 부회장에는 전경무와 이상백(李相佰)이 맡아 그 준비사무를 보았다.

이상백은 저항시인이자 항일독립운동가로 ‘빼앗길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선생의 친형이다. 
 

1947년 조선올림픽준비위원회 전경무부위원장이 브런디지 IOC위원장에게 조선의 IOC가입의 당위성등을 내용으로 보낸 편지[사진=KBS켑처]
1947년 조선올림픽준비위원회 전경무부위원장이 브런디지 IOC위원장에게 조선의 IOC가입의 당위성등을 내용으로 보낸 편지[사진=KBS켑처]

전경무는 1947년 봄, 몽양 여운형 조선체육회장의 친서를 들고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에이버리 브런디지(Brundage, A.) IOC 부위원장과 만나 IOC 가입을 위한 사전 작업에 나서 승낙을 얻어냈다.

브런디지로부터 IOC가입을 얻어낸 그는 돌아온 전경무는 그 해 6월 중순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서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해 나선다.

미군정의 주선과 미군정 체육부장인 몽양의 친서를 들고 5월 29일 미군용기로 떠났다.

그러나 미군용기는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여운형은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며 이번 일을 돕던 사업가 이원순 씨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해 대신 IOC 총회에 가도록 했다. 

하지 미 군정사령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원순은 며칠 만에 비행기 사고현장으로부터 수거한 관련서류를 전달받았다.

이원순은 이를 들고  스톡홀름으로 날라가 IOC 총회에 참가해 극적으로 일을 성사시킨다.

1947년 IOC 가입을 성사시키고 귀국해 서윤복(오른쪽)을 비롯한 각계 지도자와 관계자들의 환영을 받는 이원순(왼쪽). [사진=이원순 자서전 세기를 넘어서켑처]
1947년 IOC 가입을 성사시키고 귀국해 서윤복(오른쪽)을 비롯한 각계 지도자와 관계자들의 환영을 받는 이원순(왼쪽). [사진=이원순 자서전 세기를 넘어서켑처]

이원순 선생은 1890년 생으로 보성전문 법과를 다니다 1914년 상하이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원순은 미국에서 대한독립단 회장, 대한인동지회 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워싱턴 주재 구미위원, 한미 무역회사 사장 등으로 독립운동과 사업에 열중하다가, 해방후 영구 귀국해 경제인으로 활동했다.

40년 만에 귀국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창설 고문 등 경제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원순 선생은 이후 1993년 타계했다.

 

1947년 김구 선생이 KOC의 IOC 가입에 힘쓴 체육인들을 불러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뒷줄 오른쪽 3번째가 이원순씨. [사진=이원순선생이 100세에 쓴 자전 세기를 넘어서에서 켑처]
1947년 김구 선생이 KOC의 IOC 가입에 힘쓴 체육인들을 불러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뒷줄 오른쪽 3번째가 이원순씨. [사진=이원순선생이 100세에 쓴 자전 세기를 넘어서에서 켑처]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처외삼촌이며 고(故) 이희호 여사의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이다.이원순은 자전에세이 ‘세기를 넘어서’(1989년)에서 이를 적고 이렇게 있다.

“내가 미군정 하지 중장으로부터 올림픽 대책위원회 대표로 IOC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전경무씨의 사망소식을 들은 지 3일이 지난 때였다. 여운형 씨도 곧이어 별도의 전문을 보내왔다. 모두 조선 올림픽 위원회가 IOC에 가입되도록 최선을 다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당초 전경무씨가 뉴욕에 왔을 때 스톡홀름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한데다 고인의 일을 대신 한다는 생각도 들어 즉각 승낙하는 답전을 쳤다.”

AP 통신은 이원순 씨와 인터뷰 하고 IOC에 전경무 씨를 대신해 그가 참석하게 된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당시  AP통신 기사는 이렇다.

“조선 올림픽 준비위원회는 전경무 씨가 조난당하였으므로 뉴욕의 한미무역상사의 사장이며 조선상공회의소 미주파견원인 이원순 씨에게 전 씨 대신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국제올림픽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하여 이씨는 이 요청을 수락하고 곧 스톡홀름으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6월 15일부터 개최되는 IOC 총회까지 불과 닷새 남짓밖에 남지 않은 터라 모든게 너무 촉박했다.
 항공편이 대중화되지 못한 때였고, 여름이면 여행객이 증가하는 바람에 유럽행 비행기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여행사를 통해 백방으로 구하던 차에 그는 마침 13일의 금요일을 불길하게 여긴 사람의 취소표를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여권이었다. 미군정청에 신청해 여권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모를 일이어서 그는 궁리 끝에 자신의 신상명세를 기입한 여행증명서, 즉 사제여권을 만들어 공증을 받고 이를 통해 영국, 스웨덴, 덴마크 비자를 받는데 성공했다.가로 21㎝ × 세로 30㎝ 크기의 종이에 이원순이 직접 타자를 쳐 만든 여행 증명서.

이원순선생이 한국의 IOC가입을 위해 직접 타자를 쳐 만든 여권과 자기증명서[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원순선생이 한국의 IOC가입을 위해 직접 타자를 쳐 만든 여권과 자기증명서[사진=독립기념관 제공]

그 여행증명서의 내용은 이렇다.

 “나는 금번 조선체육회와 조선올림픽 대책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IO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런던에 들러 영국 올림픽 위원회(BOC)와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를 교섭하고자 한다”

.이원순이 100세 때인 1989년에 펴낸 자전 ‘세기를 넘어서에는 당시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여권을 들고 나는 먼저 영국 총영사관을 찾아갔다. 내가 이 문서를 내놓고 입국사증을 해달라고 했을 때 영사관 직원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어리둥절한 듯 한참을 읽어 내려가더니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이게 대체 뭡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보면 모르십니까, 내 개인 여권이 아닙니까.’ 그는 다시 손에 든 문서를 읽고 또 읽으며 만지작 거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영사방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 희한한 것도 다 본다는 표정이었다. 방에 들어가 잠시 영사와 의논을 하고 나온 그는 두 말없이 도장을 찍어 주었다. 조금 전과 달리 이제는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세기를 넘어서’에서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또 나온다.

“자신을 얻은 나는 곧바로 스웨덴과 덴마크 총영사관을 찾아가 쉽게 입국사증을 받았다. 처음처럼 두근거리지 않았고 오히려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이 여권은 대한체육회 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여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는 이어 IOC에 가입한 순간의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

 “IOC 총회장에서 가입승인서를 받는 순간, 내 가슴은 터질 것처럼 기뻤다. 내 생애 중 가장 기쁜 날이 아니었던가 싶다. 총회장을 나오자 조선체육회장 여운형 씨와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에게 IOC 가입을 알리는 전문을 보냈다”.

조국을 떠난지 33년만인 1947년 9월 일시 귀국한 그는 조선 체육계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은 IOC가입후 하계올림픽으로서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이 대회에 참가했다. [사진=IOC홈페이지 켑처]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은 IOC가입후 하계올림픽으로서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이 대회에 참가했다. [사진=IOC홈페이지 켑처]

 “조선체육회가 마련한 성대한 잔치에는 체육인은 물론 김구 선생, 김규식 박사, 신익희 씨 등 많은 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승만 박사는 부득이 참석 못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세기를 넘어서)

한국의 IOC 가입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이원순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선수단장까지 역임했다.

이원순의 사제 여권, 그가 기증한 선수단복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대한체육회 한국체육박물관과 독립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 IOC 가입의 순간과  IOC의 협력.

제40차 IOC총회 회의록(1947.6.19~21.불어판)에 기록된 당시 상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Korea/KOR)의 IOC가입 인준 건은 17번 째 의제로 상정되었다. 코리아(Korea)올림픽위원회 대표인 이원순씨(Mr. Lee)는 앞 무대로 소개된 후 자신이 올림픽위원회의 신청 내용을 발표했다.

이원순씨는 대한체육회(KOC. 조선체육회)조직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정 설명을 했다. 그러면서 IOC가입을 위한 여정 중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 코리아(Korea)대표위원을 대신해 참석한다고 발표했다.

 이씨(Mr. Lee)는 총회에서 자기 올림픽위원회의 올림픽에 대한 헌신을 보장한다고 했다. 에드스텀 (Edstrom) IOC위원장은 가사를 표한뒤, 다음 날 결정이 나온다고 발표했다. 이후 . 이씨(Mr. Lee)는 자리를 떳다.”

KOC인준내용 공문. IOC오토마이어 사무총장이 이원순에게 보낸 전문[사진=대한 체육회 제공]
KOC인준내용 공문. IOC오토마이어 사무총장이 이원순에게 보낸 전문[사진=대한 체육회 제공]

 
KOC의 IOC인준을 통하는 공한은 1947년 7월18일 자로 작성되어 발송되었다.

당시 IOC 작성자 및 발신자는 오토메이어 (Otto Mayo)r IOC사무총장 명의였다.

수신자는 IOC총회에 코리아(Korea)대표로 참석한 이원순씨였다. 
 
수신자의 주소는 East Houston St. 105, New York City로 되어 있었으며 이원순의 사무실주소였다. 
  
이는 당시 한국의 불확실한 우편배달상황을 고려하여 확실한 이원순의 미국주소를 이용한 것이라는 후문이 있다.
  
KOC에 대한 IOC잠정인준(provisional recognition)통보 공한 내용은 이렇다:
  
 “1947년 6월2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귀 NOC가 공식적으로 인준 된 것을 확인 드리려 함. 올림픽이상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소중한 협력을 해 주실 것에 감사드린다. 귀 NOC위 성공을 기원한다. St. Moritz 측으로부터 1948년 동계올림픽 대회와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 참가 공식초청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선수가 처음 참가한 동계올림픽[사진=KBS켑처]
한국선수가 처음 참가한 동계올림픽[사진=KBS켑처]

이러한 인준 소식을 전해 들었을 여운형 조선체육회장은 1947년 6월30일 브런디지 IOC부위원장에게 정중히 감사답장을 보낸다. 

◇…전경무의 최초 ‘체육장’과 최초 올림픽복권발행.

앞서 언급했듯이 전경무는 1945년 11월 귀국한 뒤 올림픽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애쓴 일등공신이다.

그는 IOC 브런디지위원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협조요청에 승낙을 얻고 돌아오는 등 올림픽 참가 준비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7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제40차 IOC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5월 29일 저녁 미군정청이 내준 군용기편으로 출발했다.

전경무선생의 최초 체육장 장례행사[사진=KBS켑처]
전경무선생의 최초 체육장 장례행사[사진=KBS켑처]

그러나 일본 동경교외비행장 근처에 있는 후지산 산정에서 탑승비행기가 충돌하여 동승자 40명과 함께 참사하였다.

그의 장례는 최초의 체육장(體育葬)으로 치렀다.

 1947년 6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체육회장 여운형, 부회장 유억겸, 민정장관 안재홍 등과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중장, 군정장관 아놀드 등 미군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림픽후원회는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올림픽 파견비용 조달을 위한 복권발매를 고인의 사진을 넣어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IOC 가입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이원순씨는 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을 맡아 봉사했다. 그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당시의 선수단복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491-2호로 지정됐다. [사진=문화재청제공]
한국의 IOC 가입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이원순씨는 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을 맡아 봉사했다. 그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당시의 선수단복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491-2호로 지정됐다. [사진=문화재청제공]

언론인 김경호선생의 스포츠gogo학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가 IOC가입한 뒤  처음출전하는 런던 올림픽대회 복권을 발행한 얘기가 실렸다.  

‘福神(복신)이 오는날, 올림픽후원권 상금 추첨은 4월15일.’

1948년 3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 하단에 실린 1단 기사는 런던 올림픽 후원권 추첨일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개최하는 올림픽 대회에 우리 선수를 파견하고자 그 경비를 얻기 위하여 그동안 판매중이던 올림픽 후원권은 동포들의 열성으로 이미 다 팔린 지구도 있어 행운의 1등 상금 100만원의 추첨은 4월 15일에 시행하리라 하며 남어시 후원권의 발매시일은 3월 말일까지라 하는데 일반의 많은 협력을 바라고 있다 한다.”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7월 29일~8월 14일)은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들고 참가한 최초의 하계 올림픽이다.

태극기를 들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올림픽참가 기념우표. 조선체육회장 몽양 여운형의 기념우표도 함께 발행됐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태극기를 들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올림픽참가 기념우표. 조선체육회장 몽양 여운형의 기념우표도 함께 발행됐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승인을 받아 런던 올림픽에 나가게 된 것을 국가적 경사로 반긴 국민들은 복권 구매로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국민들에게 올림픽은 특별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마라톤 손기정의 한맺힌 시상식 장면을 가슴으로 품었기에, 그리고 그해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을 비롯해 역도·복싱·레슬링 등에 실력자들이 많았기에 올림픽을 향한 국민적 열망은 더더욱 뜨거웠다.

 우리선수들이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 마음껏 뛰고 달리는 것을 보며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한국 최초의 스포츠복권인 런던 올림픽 후원권은 1장 액면가 100원으로 140만매(총액 1억 4000만원) 발행됐다. 

임시조직인 올림픽 후원회는 발매액 1억 2600만원 중 상금, 경비 등을 제외하고 7100만원을 남겨 선수단 파견비로 지원했다.

최초의 런던올림픽참가선수단의 재원조달을 위한 올림픽후원복권. 백원이었으며 복권내 IOC가입에 헌신하다 순직한 전경무선생의 사진이 들어있다[사진=대한체육회제공]
최초의 런던올림픽참가선수단의 재원조달을 위한 올림픽후원복권. 백원이었으며 복권내 IOC가입에 헌신하다 순직한 전경무선생의 사진이 들어있다[사진=대한체육회제공]

 당첨금은 1등 100만원, 2등 50만원이었는데 광복후 2년을 넘어선 당시 쌀 한가마 값이 8300원, 금 한 돈이 5600원, 소금 한 되 100원, 이발료 120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 근대체육유물 문화재 등록조사 보고서).

액면가 100원에 판매된 가로 12.1㎝ × 세로 7㎝의 후원권 앞면에는 특이하게 1년 전 세상을 떠난 전경무 조선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의 얼굴 사진(유영)이 담겨있다.

당시 최고 인기선수였던 서윤복 등을 앞세울 만도 했지만 후원회는 IOC 가입을 위해 애쓰다 목숨을 잃은 그를 기념했다.

 그뒤 1948년 4월 18일자 신문들은  서울지역 추첨 소식을 보도했다. 

올림픽후원복권관련 기사. 1948년 경향신문[사진=경향신문 켑처. 네이버블로거켑처]
올림픽후원복권관련 기사. 1948년 경향신문[사진=경향신문 켑처. 네이버블로거켑처]

경향신문은 이날  “1등 4명 중 행운아 2명은 벌서 판명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조흥은행 본점원 김용익(33)씨며 한 명은 중국요리집 태화관 ‘뽀이’ 중국인 장량(30)씨로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고 실명을 밝혔다. 

9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충북 옥천군의 빈농 조신득씨는 당첨금 절반인 50만원을 지방교육사업에 써달라며 기탁해 일반이 크게 놀내고 있다 한다”고 전했다.

국가 출범 전에 IOC 승인을 받은 사례는 한국이 처음이다

 

☞참고자료및 자료출처.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한국정치50년사(한국기자협회) 대한체육회사, 이원순의 세기를 넘어서.김경호의 스포츠GOGO(스포츠경향).  IOC 역사. 독립기념관, 윤강로의 감동스포츠사. 동아일보. AP통신. 신수용의 사건반세기,네이버 블로그. 블로그 아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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