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18)] 김구·이승만결별하는 장덕수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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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18)] 김구·이승만결별하는 장덕수 암살사건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08.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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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장덕수 한민당 창당주.언론인,교육자 1947년 12월 암살.
-범인 박광옥경사.배희범교사등  한독당당원들이 대다수
-조소앙 미군정 경찰에 소환조사 .한독당 핵심 김구 배후몰려 법정출두.
-이승만에게 법정안서게해달라는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김구...결별.
-장덕수 항일운동하다가 변절해 친일행적...시각엇갈려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라는 인물을 두고 현대사에서는 두가지 시각이 있다.

그 하나는 위대한 한국 보수파 정치지도자이자, 교육자와 학자, 언론인으로 긍정평가 한다.

그러나 항일주의자에서 변절,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시각역시 지배적이다.

어쨌던 언론인이자 교육자, 해방후 정계의 보수파 지도자로 큰 비중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는 그런 바람에 여러 차례 신변위협을 받기도 했다.

 해방 전에는 동아일보 육성자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민중의 여론을 제대로 이끌어 사회의 신망이 두터웠다.

동아일보사장을 지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는 자전거로 치면 앞 바뀌, 뒤 바퀴 격이었다.

해방후 신탁통지 반대데모[사진=국가기록원 ]
해방후 신탁통지 반대데모[사진=국가기록원 ]

설산 없이는 고하가 무의미했고, 고하 없이는 설산은 역시 무의미했다.

그러다 고하가 해방된 1945년 말 암살당해 먼저 세상을 뜨자, 설산은 누구보다 고독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장덕수는 신물물을 접한 언론인. 

설산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조선 황해남도  재령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에서 농업인 장붕도(張鵬道)와 어머니 김현묘(金炫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인 장덕주(張德胄)와 독립운동가인 친형 장덕준과 역시 독립운동가인 동생 장덕진, 여동생 장덕희가 있다.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한 그는 1920년 동아일보창간과 함께 주필로 취임해 글로 일본에 맞섰다. 

그는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했다가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을 한 죄로 일본 경찰에의해 체포됐다.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사장의 암살보도[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사장의 암살보도[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그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남 하의도(荷衣島)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그 뒤 임정 외무부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원 정치학과를 마쳤다. 미국 유학중에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歐美)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 도왔다.
 1936년 귀국해 다시 동아일보에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대일(對日)투쟁을 강력히 전개했다.

중일(中日)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2002년과 지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에 포함됐다.

이어 2009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규명위 보고서 대상자로 수록되었다. 

설산은 아이러니하게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1948년3월12일 백범 김구가 미군정청 법정에서 열린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과 관련,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고 있다[사진=국가기록원제공]
1948년3월12일 백범 김구가 미군정청 법정에서 열린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과 관련,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고 있다[사진=국가기록원제공]

4 형제중에 설산과 형, 동생이 나란히 독립운동을 하다가 설산만 변절해 친일행위를 한 것이다.

아버지(장붕도)까지 9대 독자였는데, 4형제가 태어나게 되었다. 

형 장덕준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신문물에 눈을 떠 계몽운동에 투신했다.

현은 1920년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동생 장덕진역시 독립운동가다.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에 자원했다.

동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카지노를 털다가 사살되었다.

◇…장덕수. 일본 유학중에 항일독립운동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설산은 유년기 끼니도 걱정해야할 처지여서 정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그 뒤 진남포의 한 학교에서 장덕진 등과 하숙,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진남포의 학교에서 형 장덕준은 강사로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진남포 학교 기숙사에서 하숙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설산은 김구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진남포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황해도 해주 연희보통학교를 마친후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했으나, 상관과의 의사 충돌로 퇴직했다. 

이후 노동과 막일에 종사하며 문관시험을 위해 강의록으로 공부한 그는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제임문관시험(制任文官試驗)에 합격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됐다.

1년 뒤 판임관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졸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입학 자격을 취득한다.

설산 장덕수의 모교인 일본 와세다 대학[사진=위키백과켑처]
설산 장덕수의 모교인 일본 와세다 대학[사진=위키백과켑처]

일본에서는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강의록으로 독학을 하하여 그해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일본에선 독립운동가 신익희를 상해서는 여운형과 친분.

일본 유학 중에 신익희(申翼熙), 김성수, 송진우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장덕수는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조선학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간행에 참여, 젊은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일례로 그는 신익희등과 고국과 고향을 그리며 달을 바라보고 함께 비분강개하며 국사를 통렬히 논하고 함께 독립운동에 일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그래서 해공(신익희)설산(장덕수)그리고 윤홍섭의 ‘고국의 한(恨)’이란 글이 나왔다.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혈(血)의 맹서다. 그러나 ‘고국의 한’은 서필을 찾을 수없다. 

이어 설산은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한인 학생회의 간부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설산 장덕수와 항일독립운동의지를 혈서로 맹서한 해공신익희선생[ 사진=신수용 대기자db]
설산 장덕수와 항일독립운동의지를 혈서로 맹서한 해공신익희선생[ 사진=신수용 대기자db]

1916년 7월 와세다 대를 졸업하기전 담당교수가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라는 권유와 추천했지만 거부했다.

그바람에 귀국했지만 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명되어 감시를 받았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과 연락하였으나 망명을 결심하고 1917년 배편으로 출국,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몽양 여운형(呂運亨) 등을 만난다.

 이후 신아동제사의 사원으로 가입하였고, 1918년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운형 · 신채호 · 조동호(趙東祜) · 김규식(金奎植) · 신성모 ·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였다.

◇…극비리 귀국했다가 투옥생활...하의도에서 DJ선친만나. 

19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원년이다

그해 설산은 2월 비밀리 귀국했으나,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남 하의도(荷衣島)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오사카에서 살인을 하고 조선으로 도주한 기무라 겐지를 찾기 위해 조선에 잠입해서 수사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우연히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진술을 거부하고 버텼다.

3.1운동 후 잡혀가서 경찰서에서 주모자를 대라고 가죽으로 귀바퀴를 무수히 얻어맞고서도 발설하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쇠꼬챙이를 넣어서 주리를 틀어도 불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재판하던 일본인 법관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유창한 일본어로 설명한 셀프변론은 유명하다.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그런 의사를 청원서(請願書)에 담아서 신한청년당 대표 한사람을 파리로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상해는 일본법률 권외에 있는 국제도시요 외국 땅이다. 이곳에서 조선 사람들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함께 토론하고, 어떤 문서를 만들어서 또 다른 제국으로 보냈다 한들 일본의 법률조문 어디에 저촉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동경과 서울에 들어온 것은 이곳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신문사 통신원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일본 법률 어느 조문에 위배된단 말인가?’

 그의 발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그는 유배형으로 낙착된다.

하의도에 있을 당시 그는 지역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그 중에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부친인 김운식씨가 있었다.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한 그는 지역의 명사들과 정치, 사회에 대한 담론과 토론으로 소일하였다. 

설산 장덕수의 절친인 몽양 여운형(왼쪽)과 인촌 김성수[사진=본지db]
설산 장덕수의 절친인 몽양 여운형(왼쪽)과 인촌 김성수[사진=본지db]

그 뒤  1919년 11월 일본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임시정부 외무부차장 몽양 여운형이 장덕수의 석방조건이 먹혀 하의도를 탈출했다.

1920년 4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여, 동아일보의 제1대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를 결성해 평의원을 지냈다. 

이어 가을 경성부에서 사회혁명당 참여, 12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공제회 의사(議事)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연합회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그러나 조직 내분과 음모로 축출된 그는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내지(국내) 간부로 선정되었다. 이 역시 내분으로 제명을 당했다.

왜냐면  1921년 5월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고 국내 대표를 초청했는데,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때 참석한 이봉수(李鳳洙)를 통해 국내에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자금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그가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자금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장덕수와 최팔용(崔八鏞) 및 오상근(吳祥根) 등 이른바 문화운동자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는 공격이 나왔다. 

 이것이 곧, 그 유명한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이다.

설산 장덕수등이 지난 1920년 4월 창간한 동아일보. 창간후 설산은 제1대 주필로 취임한다[사진=동아일보사사]
설산 장덕수등이 지난 1920년 4월 창간한 동아일보. 창간후 설산은 제1대 주필로 취임한다[사진=동아일보사사]

설산의 정적인 김사국과 김한(金翰)의 공격을 불러 일으켰다. 김사국과 김한의 비난 내용은 장덕수 등이 거액의 돈을 착복하여 개인적으로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장덕수를 비난한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설산은 여기에서 나와 1922년 11월 안재홍, 조만식 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각종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설산이 사망한지 37년 뒤에야 결백이 증명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뒷날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金綴洙)는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 김철수가 1980년 5월 16일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 돈은 장덕수가 아니라 최팔용에게 전달됐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좌절감에 빠졌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한 장덕수는 치요다 구 간다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이게 ‘장덕수 구타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된다. 그러나 후일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1923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13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했다.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신문학과에서 신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원에서 1936년까 정치학과 석사를 수료했다.

동아일보사사를 보면 동아일보사에서 설산에게 보내주는 특별 월급 외에도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 취직하여 노동과, 식당, 상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는 대목이 있다.

미국유학 직후 장덕수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에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됐다.

◇…장덕수, 미국에서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허정등과 친분

이를 계기로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을 만나 사귀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 등과도 만났다.

1925년 이승만등이 조직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 뒤 그는 임정 구미위원부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1925년 4월 임정에서 구미위원부 폐지령 내렸을 때 미국 동부지역의 한인 유학생들의 리더이며 북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이었던 그는 '구미위원부와 이승만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면서 이승만을 도와야 되는 이유와, 궁지에 몰린 이승만과 구미위원부의 후원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이후 존폐의 고비를 맞은 구미위원부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1948년 10월 폐지될 때까지 운영할 수 있었다. 1928년 2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창간했고, 창간 이후 삼일신보사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컬럼비아 대학원 재학중에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다. 런던에서는 윤보선, 윤치왕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1936년 영국 런던에서 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사진=위키백과켑처]
1936년 영국 런던에서 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사진=위키백과켑처]

 그는 영국 런던의 런던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며 체류하던 중에 세계일주 여행중인 김성수와 재회하였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그는 논문을 작성, 1936년 5월 ‘영국의 산업평화’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2세의 장덕수가 미국 유랑시절, 당시 25세이며 훗날 초대 이화여대 총장이 된 김활란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한 일도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설산의 학구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석사 학위를 받고 이어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설산과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귀국해 동아일보 부사장을 맡은 뒤인 그해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 선수를 꺾고 우승하였다.

 9월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채 보도했다.

취체역 사장 송진우 등이 이길용을 질책하자 그는 이길용 기자가 젊은 사람의 혈기방장함을 이유로 들어 그를 변호하였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 선수를 꺾고 우승하였다. 그해 9월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채 보도했다.[사진=동아일보 사사 겝처]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 선수를 꺾고 우승하였다. 그해 9월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채 보도했다.[사진=동아일보 사사 겝처]

그는 내내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공보국을 방문하여 동아일보는 조선인의 여론을 대변하는 몇안되는 언론이며 조선인의 입임을 지적하여 폐간 조치만은 막아달라며 설득과 로비 등을 벌였다. 

1936년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를 폐간하려 했다.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폐간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호소하여 폐간을 면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김활란에게 구혼을 거절당한 뒤 그는 박은혜(朴恩惠)와 교제하다가 청혼, 1937년에 그녀와 재혼하였다. 

◇…흥업구락부사태와 장덕수의 변절

여러 문헌과 증언을 보면 설산 장덕수는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중심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38년 9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장덕수는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전문학교에 제출하고 믈러났다.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설산 장덕수와 한때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던 조만식과 안재홍[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설산 장덕수와 한때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던 조만식과 안재홍[사진=신수용 대기자 db]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합법적인 공간하에서 독립운동 활동과 사회운동에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 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 없이 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의 친일 행적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순회 강연회 활동을 시작으로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제1부(의식주부) 위원에 선임됐다.

11월에 연맹 주최로 진행된 '시국재인식,생활쇄신'을 위한 순회강연'에서 평안남도 지역 연사로 순회강연을 펼쳤다.

1939년 1월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는 성향의 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창립될 때 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2월에는 동양지광 창간기념으로 마련한 행사인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1939년 7월 사상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정신 파악, 내선일체 강화, 사상 정화, 품성 연마등을 목표로 결성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경성지부 제4분회장을 맡았다.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 쭉 활동하면서 기관지‘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또한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 등을 맡았다.

1940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고, 같은 해 5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내지순례단'의 일원으로 일본 각지의 '성지' 순례 및 총후 각오를 다지는 참선 등을 하고 귀국했다.

설산 장덕수가 매일신보에 쓴 학병찬양기사[사진=네이버 이미지 켑처]
설산 장덕수가 매일신보에 쓴 학병찬양기사[사진=네이버 이미지 켑처]

8월에는 동아일보 취체역을 그만 두고 감사역에 취침해 1942년 8월까지 재임했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했다.

조선해방 한달 전에 조직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여러 차례 강연하였다.

이 밖에도 신문, 잡지 등에 수많은 친일 성향의 논설문과 학도병 권유문 등을 기고했다.

이러한 중일 전쟁 이후의 행적 때문에 훗날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 수록되었다.

장덕수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17~366)에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장덕수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론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친일행위를 했는가 여부는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변위협과 직업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는 1940년부터 일제가 권고한 창씨개명을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도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총독부는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하여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하지는 않았다. 

이어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내용에 따르면 '원래 미국,영국에 호의를 가졌으나 일제에 호감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혹은 친미, 배일사상의 소지자이었으나 위협을 느끼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태도와 맹종적 협력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그리고, 1941년 10월 10일에 장덕수 등이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비합법적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다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었다.

 조선독립청년당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려다 체포되었던 적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선 총독부[사진=본지db]
조선 총독부[사진=본지db]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여러 번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오가며 동아일보 폐간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한 바도 있었다. 이후 그는 보성전문학교의 철학, 사회과학 교수로 활동했다.

한편 그의 형 장덕진이 독립운동가이자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러 만주로 가다가 암살됐고, 동생 장덕준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으므로 요시찰인물로 간주되어 총독부 경무국은 그의 행적을 일일이 감시하였다.

1942년부터 그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이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이승만이 출연,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고, 그는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장택상 등과 같이 이를 비밀리에 청취했다.

또하나,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는 허위보도로서 각 학교의 지원자가 속출한 듯이 전하였고,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병 지원 권유의 담화문이라는 것을 연일수록 보도하였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학도병 징집 실적이 좋지 않자, 총독부는 각 학교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훈시를 한다.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 하면서 칼럼 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의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설산 장덕수 일가, 가운데는 어머니 김현묘, 좌측은 장녀 장숙원, 뒷줄 좌측은 부인 박은혜, 2녀 장혜원, 장덕수, 여동생 장덕희, 장덕희의 차녀[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설산 장덕수 일가, 가운데는 어머니 김현묘, 좌측은 장녀 장숙원, 뒷줄 좌측은 부인 박은혜, 2녀 장혜원, 장덕수, 여동생 장덕희, 장덕희의 차녀[사진=신수용 대기자 db]

1943년 겨울 총독부의 오오노 학무국장과 단게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당시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고 학병 강요했다.

이런 점등을 들어 친일파로 변절했다고만 할수 없다는 주장과 시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장덕수의 암살과 범인들.

해방된 뒤, 그는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외교부장을 맡다가 이어 정치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그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12월 2일. 황혼이 붉게 물든 오후 6시50분 쯤 설산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149번 자택에서 유홍종이에 4사람의 내객을 맞아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정부가 듣고 뛰어갔다.

“누구 세요”

“주인 계십니까”

대문을 열고 보니 두명의 청년이 문앞에 서있었다.

한사람은 일본군의 방한 외투에 정복차림의 경찰복장이었고, 또다른 이는 사복차림였다. 

이때 설산의 부인 박은혜씨가 나와 묻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서(겅찰서)에서 왔습니다”

“동대문서에서 오셨습니까”

이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정복경찰관이라는 점에서 박씨는 안심하고 설산의 방으로 안내했다.

설산은 저녁상을 받고 있을 때 본서에서 경찰이 왔다는 말에 방문을 열고 방문객들을 맞으로했다.

설산이 정복차림의 경찰관과 몇마디 얘기를 주고 받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두발의 총탄이 하복부에 명중도었다.

정복경찰이라서 안심하고 설산에게 안내했던 가족은 요란한 총성에 놀라 현관에 뛰어 나가 보니 유혈이 낭자한 채 설산이 쓰러져 있다.

1947년 12월3일자 설산 장덕수암살보도[사진=신수용 대기자 db]
1947년 12월3일자 설산 장덕수암살보도[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미 범인들은 행적을 감추고 어리론 지 달아나버린 상태였다.

가족들이 놀란 와중에도  총격을 받은 장덕수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급보를 접한 장택상이 이끄는 수도청은 장총감이 진두 지휘아래 2800명여명의 정. 사복 경찰관이 총동원돼 서울장안에 삼엄한 수사망을 펴며 범인체포에 나섰다.

유일한 단서는 그중 한명이 칼빈소총에 정복을 한 경찰이었다는 것 뿐이었다.

범인이 칼빈을 소지하고 경찰복장이라는 점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바로 직전 여운형 암살에 이은 설산의 암살로 이어진 터라 의혹은 점점 커져갔다.

수도청은 비상경계망을 펴고, 현장검증을 하는 과정에서 사복차림의 경찰관이 두어번 찾아온 적이 있다는 가정부의 얘기에 초점을 맞췄다.

사복차림의 범인은 낮이 일을 뿐 아니라 국방색 양복을 입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백범의 미군정청 법정출두. 이를 이승만에게 출두하지않게 해달라고 백범이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거부하면서 정치결별이 이뤄졌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백범의 미군정청 법정출두. 이를 이승만에게 출두하지않게 해달라고 백범이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거부하면서 정치결별이 이뤄졌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경찰은 즉시 경찰관 복장을 한 청년을 찾아내기위해 사건당일 오후 8시 서울시내 각 경찰서 경찰관을 일제히 소집했다.

부재자를 찾을 심산이었다.  또한 이런일을 벌일 만큼 만만치않은 인물인 지를 찾아내기위해 총기검사도 벌였다.

조사해보니 소집되지 않은 경찰관은 8명이었다.

대부분이 연락불충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도 이날 새벽까지 재소집에 응하지 않은 경찰관이 단 한명이었다.

 그는 종로경찰서소속 외근 감독으로 있던 박광옥(당시 23)경사였다.

종로서에서는 즉시 평상시 자주드나들던 곳을 조사한 결과, 종로구 낙원동 한양의원에서 사건이 발생한 그날 밤을 세우고 바로 다음날인 3일 아침 9시 무렵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설산 장덕수[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설산 장덕수[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수사망이 총동원되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탐문을 계속한 지 만 38시간 40분만인 4일 오후 2시55분  수도청은 박광옥과 26세 공범인 배희범을 체포했다.

◇…설산 암살의문.그리고 관련자 수사.

범인 박광옥은 범행 두달전 종로경찰서로 전속된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희대학 상과 전문부 3년 재학중 등록금 미납으로 재적된 젊은이로 초등학교교사였다.

배희범의 고향은 이북으로 부친이 교편생활을 해왔으나, 김일성의 공산체제가 들어서면서 모두 몰수당했다.

조병옥 군정정 경무부장과 러치장군 장택상 수도청장[사진=신수용 대기자db]
조병옥 군정정 경무부장과 러치장군 장택상 수도청장[사진=신수용 대기자db]

수사당국의 수사과정에서 박광옥과 배희범이 혈서로 ‘장덕수 암살’이라고 쓴 것을 가슴에 붙이고 찍은 사진을 발견, 압수했다.

경찰은 이를 두고 사전에 범행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이정도의  사건전모를 밝히면서 의혹을 낳았다.

의혹이 더해가자 수도청은 해가 바뀌어 1948년 1월16일 그간 지명수배중이던 김석황(당시 34)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으로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정무위원겸 동원부장이고 보국의용대장이었다.

김석황은 설산암살사건과 관련혐의를 받아오다가 경기도 광주에서 잡혔다.

그가 붙잡혔기에 국민과 언론은 김석황이 직접 설산암살을 지시했는 지와, 아니면 공범이나 교사범은 또 있는 지를 두고 설왕설해했다.

 이어 국민회의 비서장이며 한독당 중앙위원인 조상항 등이 체포되었고  12월 20일 조소앙(趙素昻)이 미군정청 경찰에 연행되었다.

 김구 역시 군정청 재판에 출두하였다.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사진=네이버 이미지]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사진=네이버 이미지]

그러나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정청 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특별담화를 냈다.

‘장덕수 살해 사건 피의자 전원이 기소되었다. 한편 그들에 대한 공개재판은 3월2일 오전 9시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하자중장이 임명한 군사위원회에서 공판이 열릴 것이다’

 재판에 넘겨지면서 그간의 전모가 공개됐다.

‘김석황을 비롯한 피고인들은 공동의사에 의해 1947년 8월14일, 같은 시간 서울에서 고의적으로 장덕수,배은희,안재홍등 기타 인사 약간 명을 살해하려고 음모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으며 그 피의자는 10여명에 달한다.

그 이름을 밝힌다면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을 비롯하여 조상환,신일준,손정수, 김중목,최중하, 조화,박정봉등이다’

김석황, 박광옥,배희범, 조상환등 사건연루자는 모두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당원이라는 점에서 백범에 대한 배후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며 정치권은 회오리를 몰고왔다. 

 ◇…설산 암살배후 백범 김구놓고 공방

 한민당은 장덕수 암살 배후로 김구를 공식적으로 지목하며 수사를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장덕수는 친 이승만 계인사다.

미군정청[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미군정청[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그러면서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의 의결과 달리했다.

설산은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해왔다.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백범 김구의 숙소 경교장[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백범 김구의 숙소 경교장[사진=신수용 대기자 db]

하지만 설산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설산 장덕수는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UN(국제연합)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했다.

김구는 한독당내 조완구, 조경한 등과 함께 한민당과 통합을 시도했다. 

김구등은 물론 한독당내에서도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김구는 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독당과 한민당의 통합 시도에 한민당 김성수는 찬성했다.

그러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극렬반대하였다.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백범김구와 우남 이승만[사진=신수용 대기자db]
백범김구와 우남 이승만[사진=신수용 대기자db]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두사람의 언쟁은 곧 감정 대립으로, 돌이킬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졌다.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도 장덕수와 김구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이로인해  장덕수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한 한민당원인 허정과, 한민당에 참여했다가 친이승만계로 건너간 장택상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백범이 법정안서게  해달라는 요청 이승만이 거부...이승말.김구 결별.

설산 장덕수의 암살사건으로  김구가 경찰소환조사와 미군정청 법정에 출두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경찰이 김구를 조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한민당이 백범수사를 강력히 촉구하는데다, 피의자들이 한독당내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모임체 조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숙소인 이화장에서 김구와 이승만[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의 숙소인 이화장에서 김구와 이승만[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총재는 김구, 명예위원장에 조소앙과 엄항섭을 추대하였다.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했다..

김구는 자신이 미군정청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했다.

이를 본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했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사건재판과 복잡해진 정치권.

예정대로 1948년 3월2일 공개재판이 열렸다.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덕수는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3월8일 6차공판에서 관선변호사인 미국인 밸스는 백범에게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제출, 재판부가 받아들여 파장을 예고했다.

이승만과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과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그 소환장을 보면 미국 트루만 대통령이  조선의 서울시 경교장 김구에게 보낸 내용은 이렇다.

‘조선 서울의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개정하고 있는 미국군을 재판위원회에서 귀하를 소환하오니 1948년 3월12일 오전 9시 출정할 것. 본 미국군율을 재판위원회는 서울에 있는 김석황등 기소사건을 변호하기위해 증ㅇ니으로서 증명하고 증언할 목적으로 1947년 12월 16일에 제 24군 군사령부 우함235특령 320호 제 1항에 이하여 임명되었음. 1948년 2월16일.조선 서울시 미육군 대위 빌론 러어맨 담임검사’

미군정청 법정[사진=위키백과켑처]
미군정청 법정[사진=위키백과켑처]

김구는 이에 따라 재판증인으로 출석해 신문에 응했다. 검사가 ‘설산 장덕수를 죽이라고 지시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백범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지시 운운하는 것은 나를 모략하려는 것이다. 나로서는 왜(倭 )놈외에는 내가 줄일 놈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

백범은 또 ‘안했다는데 자꾸 무엇을 캐묻는 거냐? 설산이 죽어서 나도 분한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응수했다.

이렇게 세인들의 큰 관심속에 21차 공판을 끝으로 4월2일 결심공판이 이뤄졌다.

당시 검찰의 구형은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 조상환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등 8명은 교수형을, 기타 조화, 박정봉등 두피고인은 10년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같은달 20일 하지 중장은 ‘박광옥.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다 추후 재심할 때까지 집행을 유예한다. 기타공범은 종신 또는 징역10년, 5년 체형으로 각각 집행한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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