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충청출신 한국 현대정치 산증인 '이해찬' 정치 인생 30년마감...이젠 2선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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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 충청출신 한국 현대정치 산증인 '이해찬' 정치 인생 30년마감...이젠 2선후퇴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08.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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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 면장집 3남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중학교부터 나와 정치입문.
-서울대 섬유공학과 자퇴하고 이듬해 사회학과로 재입학.
-70, 80년대 유신.반독재 투쟁에 나서 투옥과 제적등 우여곡절 끝에 14년만에 대학졸업장.
-김대중 정부때 교육부장관, 노무현 정부때 국무총리지내.
-서울 관악을에서 5선, 세종에서 재선등 7번총선 모두 승리한 기록.

 

 충청 핵심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대표가  오는 29일 있을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30년 정치인생을 마감한다.

충청정치인 출신으로 김종필(JP), 이회창, 이춘구, 박준병, 양순직, 김용환, 정석모,김옥선, 조순형, 심대평,서청원 등 시대를 주름잡던 정치인들에이어 그도 2선으로 물러나게된다.,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면  자신이 이사장직을 맡은 동북아평화포럼사무실이나, 서울관악구와 세종시 자택을 오가며 책을 쓸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 핵심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대표가  오는 29일 있을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30년 정치인생을 마감한다.[사진=네입이미제 켑처]
 충청 핵심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대표가  오는 29일 있을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30년 정치인생을 마감한다.[사진=네입이미제 켑처]

그는 70, 80년대 반독재투쟁의  한 인사로, DJ(김대중)의 동교동사람으로, 또 한편엔 노무현 전 대통령사람으로 분류된다.

그의 이력을 기록한 나무위키등을 보면 그는 6.25 직후인 1952년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면장인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 슬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이 대표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친인 이인용 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인용 씨는 광복 후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표는 어려서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했다.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지난7월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는 이해찬대표[ 사진= 뉴스1]
지난7월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는 이해찬대표[ 사진= 뉴스1]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배개출판사를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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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유신에 항거했고,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맞써 싸워 옥고를 치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1980년 서울의 봄당시 해금 조치되면서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이 때 이해찬과 유시민이 멱살잡이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 갈등을 빚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다.


이어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으며,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또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가 임기후 유시민씨에게 넘겼다.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에 처음 서울대를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

이후   6,29선언으로 3김씨(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사면.복권이후 치른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DJ의 평민당소속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 첫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상대당 후보는 민정당 김종인 후보(현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로 당시 32살의 애송이 이해찬에게 패배했다.

이해찬(왼쪽) 국무총리가 지난 2004년 7월 7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 김대중 전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이해찬(왼쪽) 국무총리가 지난 2004년 7월 7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 김대중 전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두사람의 악연은 이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해찬대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 김종인으로 이어졌다. 

이해찬은  5공 청문회를 통해 같은 초선인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당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대표는 13대 국회부터 서울 관악을에서 5선을 한뒤 지난 2012년 세종으로 내려와 재선에 당선, 7선의 관록을 갖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40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의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선거의 귀재’라는 단어도 따라다니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순탄하지만 않았다고 보는 눈이 많다.

그는 철새 정치꾼 같이 당적변경이 잦았다.

그가 속했던 야당들이 선거가 끝날 때마다 당명을 수시로 바꿨기 때문이다.

 DJ가 출마한 1997년 대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약해 대선승리를 견인했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정책과 공약분야의 책임자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DJ의 국민의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다.

 참여정부 시절엔 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총리로 일했다. 

그는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야당과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아 ‘버럭 총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대 총선 때 국무총리 시절 세종시 건설을 직접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해 당선됐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엔 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총리로 일했다. 이 대표는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과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아 ‘버럭 총리’로 이름을 날렸다.

민주통합당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2012년 당대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이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지도부가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 재선에 성공했다.

20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다.
  

노무현 국회의원과 이해찬 국회의원[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노무현 국회의원과 이해찬 국회의원[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이 대표는 이후 같은 해 9월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당내에서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지난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른 5.9 대선에선 문재인 대선후보 선대위원장으로, 6·13 지방선거에선 추미애 당시 당대표와 함께 수석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지난 2018년 8월25일 민주당 전대에서 당대표에 올랐다.

이후 지난 4.15 총선에서 177석의 거대여당을 만들어 '선거의 달인'이란 별명을 재입증했다.

한편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 대표가 30년의 정치인생을 마감하더라도, 그간의 정치 경륜과 선거경험등을 살려 오는 2022년 3.9 대선등에도 직, 간접적으로 당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 대표는 26일 이 대표체제에서 수고한  최고위원들과 서울 여의도에서 만찬계획을 잡았으나  최고위원회의 취재기자가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한 것으로 확인되며 자가격리에 들어가 일정을 취소했다.

이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들이 민주당의 차기 지도부 선출에 관심을 가져달라"며 "누가 선출되더라도 당을 든든히 이끌어주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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