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23)] 분단의 서막, 우여곡절속에 치른  5.10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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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23)] 분단의 서막, 우여곡절속에 치른  5.10 총선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10.1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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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소총회, "남한내 선거가능지역에서 총선거 실시"...가결.
-이승만계는 남한내 총선환영, 김구 김규식계 "남한총선거부"
-김구.김규식...평양방북 김일성등과 남북협상, 그러나 합의실천없어.
-역사적인 총선,70%문맹률에도  90% 넘는 투표율...무소속이 42% 당선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해공신익희. 김동원 부의장 
1948년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내에서 처음 치른 5.10일 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DB]
1948년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내에서 처음 치른 5.10일 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DB]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7년 후반기와 1948년 상반기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시기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냉전의 도래와 민족 주체적인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용돌이속에  한반도는 열강의 간섭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자주 정부하나 세우지 못한 채 격동기의 혼란만 거듭했다.

당시 기록들은 '민심이 극도로 지친 나머지  허탈상태에 빠졌던 때'라고 적고 있다.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이 무장해제된 한반도 전역에  소련군의   점령을 막기 위하여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소련에 통고했다.


북한 지역은 이에따라  소련이 이미 3년전인 1945년  8월 21일 원산항을 통해 평양에 들어가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통치하는  소련군정상태였다.

이어  미국도 그해 9월 인천항을 경유, 서울에 진주했다.

이처럼 해방 3년차인 1948년 상반기의 남한은 미군정청의 지배하에 있었다.

 ◇…1948년 5.10총선에 이른 배경. 한반도 격동기 시작.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전에    상처뿐인 한반도가 또다시 3.8선을 경계로 둘로 쪼개졌다.

 일제 식민지에서 억압에서 풀려나자마자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뉜 것이다.

뿐만아니라, 북한지역은 소련군정 치하에,  남한엔 미군정이 치하에 두고 통치했다..

강원도 양구의 한 마을 길위에 남북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이 표기되어 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강원도 양구의 한 마을 길위에 남북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이 표기되어 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한국민의 역사와 운명은 이들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더구나 1946년과 1947년 두차례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열였으나, 결렬된 채 북한 지역과 남한 지역이 이념대결로 치닫게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막을 내리자 미국이 한국내 정부수립을 유엔에 상정했다.

유엔은 1947년 11월14일 112회 총회를 열어 가능지역부터 한국(조선)내 총선거를 치러 의회를 구성한 뒤 의회에서 나라의 대표자를 뽑도록한다는 미국측 제안을 가결한다.

총선거는 유엔 감시하에 치르는 것이 조건이었다.

유엔은 이에따라  유엔회원국으로 유엔한국(조선)위원회를 구성한 뒤, 이 위원회는 가급적 빨리 한국을 방문, 남북 지도자들을 만나 협의하는등 총선채비를 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위해, 유엔한국위원회는 1948년 1월8일 초저녁 김포공항을 통해 9개국(소련은 방한 거부)이 한국에 첫발을 딛고 총선준비에 들어갔다.

1월 12일 덕수궁석조전에서 1차회의를 열어 인도의 메논을 의장으로, 중국의 호세택을 사무총장으로 인선한 뒤 여장을 푼 서울 국제호텔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김성수등과 면담을 가졌다.

1월14일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 환영을 받은 유엔 한국위원회는 뜻하지 않은 복병들을 만났다.

유엔한국위원단의 한국인지도자 의견청취를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신문 왼쪽에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이승만​[사진=동아일보 켑처]
유엔한국위원단의 한국인지도자 의견청취를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신문 왼쪽에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이승만​[사진=동아일보 켑처]

이와중에 이승만과 미군정청 사령관인 하지 중장간의 심상찮은 불화기류속에 설상가상, 소련이 유엔한국위원회의 방북을 거부하면서 자주독립 통일국가 수립을 기대한 온 겨레에 실망을 안겨줬다.

그러자 이승만.김성수등은 남한만이라고 총선거를 치르자는 주장이, 김구.김규식등은  남한총선반대를 들고 나왔다.

 이승만과 김성수, 김구와 김규식등은 수차례에 걸처 이승만의 거처인 이화장에서 만나 남한내 총선등을고 시국에 관해 논의했지만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한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허헌, 박헌영, 김두봉등과 면담을하려던 유엔한국위원회의 계획이 소련의 훼방으로 무산된다.

  유엔한국위원회 메논의장은 그해 2월 북한 방문이 어렵게되자 미국 뉴욕의 유엔으로 달려갔다.

 이승만은  시인 모윤숙을 시켜 자신의 입장등을 담은 친서를 미국방문직전에 메논의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왼쪽이 이승만. 중앙 모윤숙. 오른쪽 메논[사진=신수용대기자DB]
왼쪽이 이승만. 중앙 모윤숙. 오른쪽 메논[사진=신수용대기자DB]

메논의장은 그해 2월26 일 유엔 소총회에 참석,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이라도 유엔 감시하에 총선을 치르자는 안을 설명했다.

이 안을 놓고 소총회에서 표결끝에 31대 2로 가결된다.

남북한 총선거는 국내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남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결의는 싫으나 좋으나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었다.
 
유엔의 결의는 '선거가능지역인 남한에서 조기에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여기서 선출된 대표들이 (제헌)의회를 구성한 뒤  의회에서 나라의 대표자를 선출해 정부를 수립한다'는 취지였다.
  
즉,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위하여 유엔의 결의를 얻어 3분의 2의 인구가 거주하고 또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 우선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 이면에는 이승만의 눈부신 대내외 활동의 영향이 컸다.   
 
유엔은  그해는 5월 1일부터 5월 10일 이내에 가능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제헌 국회의원선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에 유엔 한국위원단은 5월 10일을 선거일로 정하고 선거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장하기 위하여 부당한 법령의 폐지와 정치범 석방을 점령군 당국에 건의하였다.

이같은 내용이 같은해 2월27일자 국내신문들의 보도로 알려지자 이승만등의 정파는 대환영을, 반대로 김구. 김규식등은 남한총선 절대반대와 불참선언을, 그리고 남한내 남로당은 절대 반대로 맞섰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172개의 정당 ·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중앙협의회 등 민족진영의 제단체가 유엔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한국독립당의 김 구를 중심으로 이른바 남북협상이 기도되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김 구와 김규식은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입각한 북한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통한 통일방안을 모색하였으나, 그들의 전술에 이용당함으로써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등은 연일 '대(對)동포 선언문'을 통해 남한내 총선거실시이유를,  김구.김규식은 그와 정반대의 '대(對)동포입장문'으로 대립했다.

김구. 김규식은 미군정청의 반대에도 불구, 자신들이 제의한 대로 평양으로 들어가  김일성. 김두봉과의 남북협상을 여는등 17일간 체류하며  '북한 단정수립반대'등 합의했으나, 실천은 미완이었다.

1947년 11월14일 남북총선거를 위해 유엔한국위원회구성을 의결한 유엔 총회[사진=신수용 대기자DB]
1947년 11월14일 남북총선거를 위해 유엔한국위원회구성을 의결한 유엔 총회[사진=신수용 대기자DB]

무엇보다 우익진영내에서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제안과 방북을 놓고  반대가 극렬했다.

◇…김구.김규식의 김일성.김두봉과의 남북협상 뒷얘기.

남측의 김구.김규식등은 그해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북측의 김일성.김두봉이 연 남북협상을 가졌다.

양 김씨 가 참석한 남북협상은 1948년 4월 30일로 끝났다. 

이날 밤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채택과 서명을 끝으로 남북협상의 일정은 모두 종료됐다.

다음날인  5월 1일에는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여느 때와 같이 노동자들의 축하행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해 2월 8일에 창건한 인민군의 사열을 포함한 대규모의 행사였다.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쪽 대표들도 모두 참석하여 연단에서 행사를 지켜보았다. 
  
 

김구가 북한 김두봉에게 남북연석회의를 갖자는 내용의 1948년 2월16일보낸 서신[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구가 북한 김두봉에게 남북연석회의를 갖자는 내용의 1948년 2월16일보낸 서신[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노동자와 농민들의 행진은 트럭 위에서 저마다의 직업을 나타내는 동작을 하면서 지나갔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검정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트럭은 소련제였고, 남한에서는 별로 보지 못한 피켓이 유난히 많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행렬이 끝난 다음 인민군 부대의 사열행진이 있었다.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崔庸健)이 맨 앞에서 붉은 말을 타고 선도했고, 참모총장 강건(姜健)이 사열행사를 진행했다. 

다발총으로 무장한 보병부대에 뒤이어 혁명자유가족학원 학생대열이 지나가고, 각종 포와 장갑차 등 중장비가 그 뒤를 따랐다. 

쭉 뻗은 포신이 달린 각종 포는 소련제 트럭이 끌었고, 육중한 장갑차 수십 대가 두세 줄로 열을 지어 후미를 장식했다. 

사열대의 김일성은 이 군부대행렬이 지나갈 때에 앞으로 나가 혼자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김구는 입을 꽉 다문 채 이 위협적인 시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행사에는 슈티코프(Trentii F. Shtykov) 등 소련군 고위간부들도 참석했는데, 병약한 김규식은 슈티코프와 인사만 나누고 비 때문에 일찍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남북인사들. 왼쪽이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 김구[사진=네이버이미지켑처]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남북인사들. 왼쪽이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 김구[사진=네이버이미지켑처]

  남북협상을 취재하러 평양에 갔던 조선일보 최성복기자는 이날의 행사에 대한 인상기를 보도했다.
  
  “이날 행렬은 생전 처음 보는 가관이었다. 인민군의 위세란 당당하였고, 각계각층 하여튼 이곳 사회층으로 빠진 곳이란 없어 보였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농민은 곡괭이를 메고, 꾸냥(姑娘: 처녀)들은 청복(靑服)을 입고 모택동(毛澤東) 초상을 받들고 사열대를 지나가며 ‘김일성 장군 만쩨이 만쩨이’ 하는 모양은 인상적이었다. 양 김씨와 요인들도 전원이 출석하였는데, 내 옆에 서서 이 행렬이 다 지나기까지 네 시간 동안을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요인 모씨는 ‘이곳 사회는 아예 새 사람 새 세대로 일신했군 그래. 지나가는 얼굴을 보아하니 죄다 20세 전후인 청소년이요 장년층이래야 농민과 노동자, 그 역시 새 정신을 불어넣은 새 사람들이 상하일속(上下一束)으로 그 강력한 조직체를 가지고 절대 옳다는 길로 막 밀고 나가니 좋건 언짢건 어떠한 건설이 하나 될 수밖에. 이런 씩씩한 사회적 힘이란 남조선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걸 …’ 하고 입을 쩝쩝 다시었다. …”
  
  모택동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한  화교들까지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했던 모양이다. 대회에는 30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5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김구는 안신호와 함께 강량욱 목사와 홍기주 목사의 안내로 장대재〔章臺峴〕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김규식도 동행했다.

 평양 지방 한국교회의 요람인 장대재교회는 상수리 특별호텔에서 1km쯤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예배에 나온 사람들은 200명가량 되었다. 

북쪽에서는 김규식이 기독교인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김구가 기독교인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후 김일성을 비롯한 북로당 지도부는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했던 남북요인들만의 야외회동을 준비했다.  회동 장소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쑥섬이었다.
  
  회동에는 남쪽에서 간 우익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과 좌익의 박헌영, 허헌, 백남운,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 그리고 강량욱, 홍기주 두 목사와 북로당의 대남연락부장 임해와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치공작원 성시백이 참석했다. 

  쑥섬회동은 남북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의 성과를 재확인하는 경축연회 겸 친목도모 자리였다. 정오쯤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평양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이야기, 김구 등의 평양 나들이 소감, 남한 형편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4월 30일 밤에 서명한 '공동성명서'의 의의가 거듭 강조되고, 김구와 김규식이 제기한 송전과 송수의 계속, 조만식의 월남, 안중근 유해 봉환 등의 문제도 다시 거론되었다.

 이어 어죽 잔치가 벌어지고, 회식이 끝나자 낚시와 나룻배 타기 등이 오후 4시 넘어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과 김구.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한 김구일행[사진= 신수용대기자 DB]
김일성과 김구.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한 김구일행[사진= 신수용대기자 DB]

훗날 북한은 이때의 회합을 기념하여 쑥섬을 ‘통일전선 사적지’로 조성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을 떠나 오기 전날인 5월 3일 오후에 각각 김일성과 회담했다.

김구는 조만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김구는 “… 남조선 사람들에게 면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나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라며 조만식을 자기에게 내어 줄 것을 요망했다. 
김구가 중요하게 거론한 것은 송전 계속 문제였다. 
 
이어 송전과 연백평야에 대한 송수의 계속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에도 힘써 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그러면서 조만식의 서울행 문제도 소련군쪽과 적극적으로 협의하여 원만히 해결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성이 그자리에서 여러 차례 김구의 신변을 염려했다.

김구는 “내가 남쪽으로 돌아가서 정말 활동하기 어려우면 북으로 올 테니까 그때는 과수원이나 하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 하고 농담 비슷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도 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북행했던 남쪽 대표들은 5월 4일 아침에 평양역에서 출발하는 특별열차를 타고 38선까지 가기로 되었다. 

문제는 남쪽 대표들 가운데에서 북한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민주독립당 위원장 홍명희, 건민회 위원장 이극로,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백남운 및 이영, 민족자주연맹 상무위원 최동오, 민주한독당 상무위원 김일청, 사회민주당 간부 장권(張權), 남조선신문기자단의 정진석 등 잔류 인사는 70여명에 이르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잔류한 데에는 북한쪽의 권유 공작도 있었다.
 
효성이 남다른 김구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는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로 성묘 한 번 하지 못한 해주 텃골〔基洞〕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불효의 한을 풀고 싶었다. 
김두봉을 통하여 김구의 뜻을 전해 들은 김일성은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면서 은근히 평양에 남기를 권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김구. 김구.김규식등은 1948년 4월 남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유엔결의를 거부하고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귀경했다.[사진= 신수용대기자 DB]
김일성과 김구. 김구.김규식등은 1948년 4월 남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유엔결의를 거부하고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귀경했다.[사진= 신수용대기자 DB]

김두봉은 금강산의 요양 시설을 소개하면서 잔류를 권했다.

평양 출발전에 김구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질문 : 국가체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 미래의 국가는 민족자주에 기초해야 하고, 국가는 반드시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국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질문 : 미국인들은 남조선의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는가?  
  답변 : 미국인들은 남조선에서 조선의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이 인민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질문 : 서울의 라디오 방송은 남조선에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된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답변 : 남조선에는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어떠한 자유로운 분위기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김구는 황해도 해주 텃골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돌아오자마자 성명을 냈다.

  공동성명은  북한 당국자는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고 강조한뒤 남한 송전과 연백평야의 송수, 그리고 조만식선생의 월남, 안중근의사 유해봉안등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은 방북의 구체적인 성과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우리는 행동으로서만 우리 민족은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첫째 북조선 당국자가 남조선 미당국자와의 분규로 인하여 남조선에 대하여 송전을 최단기간 내에 정지하겠다고 남조선 신문기자에게 언명한 바 있었고 둘째 연백(延白) 등 수개처의 저수지 개방문제도 원활히 하지 아니한 일이 있었지마는, 이번 우리의 협상을 통하여 그것이 다 잘 해결될 것이다. 앞으로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 당국자는 이번에 실행시킬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고뇌와 좌절감에 찬 17일 동안의 김구의 평양방문과 김일성등과의 남북협상은  이렇게 끝났다.
  ◇… 파행과 왜곡...역사적인 5.10선거 .

  선거는 5월 9일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9일은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고, 하필이면 그날이 일식이 일어나는 날이어서 총선일을 하루 늦춰  5월 10일로 정했다.

물론 5.10총선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  현재까지도 선거일이 공휴일로 이어져왔다.

 

1948년 2월6일 유엔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부터 총선을 치르기로 결의했다는 당시 경향신문 그해 2월27일자 보도[사진=경향신문켑처]
1948년 2월6일 유엔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부터 총선을 치르기로 결의했다는 당시 경향신문 그해 2월27일자 보도[사진=경향신문켑처]

미군정청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김규식 의장등 관선의원 측과 가능한 지역 내의 선거 및 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민선의원 측 간의 대립하자 1948년  2월 23일 본회의 가능한 지역 내에 서 총선 실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3월 17일 자유·평등(대일부역자 제외)·비밀선거, 임기 2년, 정원 200명 등을 주요골자로 한 전문 57조로 된 '입법의원선거법'을 제정·공포(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5호)했다.

이어 김동성, 김법린, 김지환, 노진설, 이갑성, 이승복, 박승호, 백인제, 오상현, 윤기섭, 장 면, 김규홍, 최윤동, 최두선, 현상윤 등 15인을 중앙선거위원으로 선출하였다. 

5번의 수정을 거친 '입법의원선거법'에는 선거권은 만 21세에 달하는 모든 국민에게 부여됐다.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이르는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은 자나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 판임관(判任官) 이상자,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자, 고등경찰이었던 자, 훈(勳) 7등 이상을 받은 자, 중추원의 부의장·고문·참의 등에게도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이처럼 독립정부 수립의 기반이 될 총선거일이 다가오자 일반국민의 관심은 총선거에 집중되었다.

 좌익정파들과 남북협상파들의 공식적인 선거보이콧에도 불구하고 4월 16일에 마감한 국회의원 입후보자 등록에는 정원 200명에 무려 948명이 등록하여 4.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지금과 같은 정당공천제는 없었다.

선거구 유권자 200명의 지지서명서만 받아서 선거구의 국회선거위원회에 제출하면 되었다. 

이승만의 의견에 따라 모두 개인자격으로 입후보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235명을 비롯하여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91명, 이청천의 대동청년단 87명,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20명, 대한노동총연맹 10명 등으로 후보자를 낸 정당과 사회단체는 43개에 이르렀고, 무소속이 417명으로서 절반가량 되었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것은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그리고 중도좌파 등 소속정당이나 단체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입후보한 인사들의 경우가 많았다. 
 
 

미군정청[사진=신수용 대기자DB]
미군정청[사진=신수용 대기자DB]

5·10선거에서 시행된 선거법은 완벽한 평등 보통선거가 제도화된 가장 민주적인 선거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은 선거법의 이상과는 간극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 많은 입후보자 가운데 여성입후보자는 18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성입후보자와 관련하여 이승만은 4월 22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전한 민주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전민족의 반수가 되는 부녀 해방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번 총선거에 다수 부녀를 선거해서 남자와 대등을 만든다는 것은 지나친 말이므로 누구나 생각도 말아야 될 것이거니와 상당한 인망을 가지고 입후보한 구역에서는 동등한 대우를 표시해서 부녀의원을 국회에 참가케 하는 것이 건국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요, 또 세인의 이목에 우리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5)
  
  그러나 5·10선거에서 당선된 여성입후보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제헌국회 2년 동안 여성의원은 1949년 1월 13일에 실시된 경북 안동군(을)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임영신(任永信)뿐이었다.

 민주의원의 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임영신은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의 보궐선거에는 수도관구경찰청장과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장택상(張澤相)도 출마했는데, 임영신(7,263표)은 장택상(5,488표)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경쟁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울이었다. 정원 10명에 내로라하는 인물 83명이 출마하여 8.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무투표 당선자도 13명이나 있었다. 서울 동대문(갑)의 이승만을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군의 해공 신익희(申翼熙), 가평군의 홍익표(洪翼杓), 전북 정읍군(갑)의 나용균(羅容均), 전남 광주시의 정광호(鄭光好), 영암군의 김준연(金俊淵), 영광군의 조영규(曺泳珪), 경북 영양군의 조헌영(趙憲泳), 영덕군의 오택렬(吳宅烈), 영천군(갑)의 정도영(鄭島榮), 영천군(을)의 이범교(李範敎), 김천군(을)의 이병관(李炳瓘)등이다.

그것은 이 시기의 한국 정치풍토의 특성인 명망가 중심 정치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망가 중심 정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특성은 후보자들의 학력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었다. 문맹률이 70% 이상인 상황에서 입후보자 가운데 대학졸업자와 중퇴자, 전문학교 졸업자가 38%나 되었다.
  
  문맹의 유권자를 위하여 투표지에는 후보자의 이름 위에 숫자 대신에 막대기 기호가 표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좌익계는 물론이고 중립계와 일부 민족진영의 불참운동도 만만치 않은 긴장된 분위기하에서 선거는 진행되었다.

좌익계의 파괴적 방해공작과 남북협상파 및 중립계 정치인의 공식적인 불참 아래 선거가 진행되었고, 결국 제주도가 투표방해로 제외된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 남로당의 살상.테러.폭파.방화... 미군에도 특별경계령 내려져
  
  5.10 총선일이 다가오면서 남로당의 ‘구국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연석회의의 결의에 따라 결성된 남조선단선 반대투쟁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된 데다가 남로당 선전선행대의 무장투쟁이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로당의 공세에 대비하여 경찰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은 5월 3일에 경무부 안에 비상경비총사령부를 두고 각 관구 경찰청에도 비상사령부를 두어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

수도관구경찰청도 장택상을 총사령으로 하는 5·10비상경비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특별경비태세에 들어갔다.

 조병옥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투표에 참가할 수 있도록 5월 7일에 다시 투표 당일의 치안 대책을 설명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동리는 향보단의 자위력으로 방위하고, 동리와 투표소 사이의 길 위험 지점에는 경찰과 향보단이 합류하여 경호했다.

이어 투표소 부근에는 경찰과 향보단의 혼성팀이 배치되어 방위하고, 경찰청의 기동경찰대는 소관 경찰 본서를 지키고, 각 경찰서의 신편 기동부대는 관할 지서를 유동 시찰하여 경비한다는 것이었다.
  

남로당수인 박헌영이  5.10총선을 방해하자고 격려하는 신문[사진=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비교켑처]
남로당수인 박헌영이 5.10총선을 방해하자고 격려하는 신문[사진=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비교켑처]

 

  또한 하지 장군도 4월 29일에 이어 5월 8일에 또다시 전 주한 미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려 5월 10일의 선거에 대한 남로당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특별경계령의 내용은 5월 10일에 대부분의 미국인은 무기를 휴대하고, 순찰대는 총기로 무장하며, 그 밖의 군대는 비상사태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420명의 미국 민간인 직원들도 가두를 보행하고 투표장 부근을 순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와 아울러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은 4월 28일부의 행정명령 제21호로 선거기간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5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에는 어떠한 정당이나 사회단체 또는 청년단체도 시위 또는 행렬을 할 수 없고, 주류 판매를 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5·10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남로당의 마지막 공세는 5월 8일을 기하여 남한 전 지역에서 일제히 전개되었다. 

 대전에서는 9일 새벽에 대전역 구내에서 기관차와 기관차가 충돌하여 기관차가 전복하고 레일이 파손되었다. 

이날 오전에는 대전과 두계 사이의 전선이 절단되고, 밤에는 보문산(寶文山)에 봉화가 올랐다. 

10일 새벽에는 판암동 한 선거사무소에 괴한 10여명이 돌멩이를 던지고 사무소 땔나무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여 투표가 1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충남 청양군에서는 9일 새벽에 3개소의 투표구사무소가 문서와 함께 전소했다.

부산도 마찬가지다. 5월 8일 저녁에 부산 시내 주위 산봉우리에 봉화가 오르고, 9일 밤에는 초장동 투표소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사건과 영도의 한 투표구 사무소에 괴한 2명이 침입하여 흉기로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다가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5.10총선 포스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5.10총선 포스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또 10일 오전 11시에는 부산중구의 한 투표소에 괴한 6명이 침입하여 위원 3명을 난타하고 선거인명부를 탈취했으나 3명은 체포되었다. 

같은 날 부산 영도의 한 투표소에는 권총을 든 청년 2명이 침입하여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 했으나 부재중이어서 그냥 도주했다.
  
  대구에서는 관공서를 비롯한 각처에 “단선 단정 반대” 전단이 살포되고, 대구방직공장에 청년 30여명이 곤봉과 일본도를 들고 침입하여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하다가 1명이 경찰에 사살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민성일보사(民聲日報社) 공장이 괴한들의 수류탄에 파괴되었다.
  
  전남 광주에서도 5월 8일에 관내 각처의 전주가 절단되어 광주로부터 남원, 순천, 전주를 제외하고 일절 불통이 되었다.  또 망월(望月)터널 안의 궤도 파괴로 목포발 서울행 열차가 탈선했다.
  
  목포에서는 9일 저녁에 괴한 6명이 부청 문서 창고에 침입하여 권총 2정으로 협박하여 선거관계 서류와 투표용지를 빼앗아 불 질렀다.
  
  무안군 현경면에서는 10일에 괴한들이 근무중인 경찰관의 무기를 탈취한 뒤 함평군으로 도망한 것을 함평, 무안 양 경찰서 서원과 목포기동부대가 포위 사격하여 폭도 4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강릉에서는 5월 10일 새벽에 강릉 경찰서 관내 3개 지서가 폭도들에게 습격당했는데, 폭도 1명이 사살되고 피해는 없었다.
  
  인천에서는 9일 오전에 송현동의 한 투표소에 괴한이 수류탄을 던져 선거위원 2명이 부상했고, 10일 오후 6시 반쯤에는 송림동의 한 투표소에 괴한 20여명이 침입하여 투표함에 휘발유를 뿌리며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같은 날 새벽 3시쯤에는 부평에 있는 미군 디젤공장 차고가 전소했다. 
   

5.10 남한 총선거를 무력으로 방해한 남로당의 테러., 방화,파괴등으로 1200여명이 살상을 당하고 건물이 불에타는등 적잖은 사건이 일어 났다.[사진=박찬표 한국국가형성과 민주주의]
5.10 남한 총선거를 무력으로 방해한 남로당의 테러., 방화,파괴등으로 1200여명이 살상을 당하고 건물이 불에타는등 적잖은 사건이 일어 났다.[사진=박찬표 한국국가형성과 민주주의]

 

개성에서는 9일 밤에 진봉산(進鳳山)에 봉화가 오르고, 10일 정오에는 10여명의 괴한들이 두세 사람씩 분산하여 투표소와 파출소 등에 수류탄을 던져 순경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했다. 범인 1명도 사살되었다. 체포된 폭도 가운데에는 전직 경찰관도 섞여 있었다.  
  
 남로당이  2월 7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선거방해를 위한 남로당의 잔인한 폭력행동에도 총선거 저지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5·10선거로 이승만이 집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5·10선거는 미군정부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에 대한 신임투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엔위원단이나 하지 중장뿐만 아니라 각 정파들의 관심사도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율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90%가 넘었다. 

유엔위원단의 총선후 5.10 보고서는 등록 유권자 783만 7,504명의 95.2%에 해당하는 703만 6,750명이 투표에 참가, 총 유권자수의 75%에 이른다고 기술했다.

그것은 등록 유권자 784만 871명의 95.5%에 해당하는 748만 7,649명이 투표했다고 하는 국회선거위원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기권자는 5%에 불과했다.

이러한 높은 투표율은 지역에 따라 행정기관과 경찰 등에 의한 위압적인 권유가 적지않았다.

여기에다 미군정부의 귀속농지 불하조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에 의한 일반국민들의 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었다.

 또한 처음 실시되는 보통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유효투표율이 96.4%에 이르렀다는 것은 국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5.10선거결과[자료=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비교연구켑처]
5.10선거결과[자료=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비교연구켑처]

 

이승만은  총선에서 유권자의 높은 투표율에 담화를 냈다.

그는 총선거 결과에 대해 5월 12일 담화내용은 이렇다.

“이번 총선거에 90% 이상의 호성적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한번 다시 표명한 것이다. 외국 신문기자들이 말하기를 한국 부인들의 투표가 50% 이상이나 된다 하니 한국의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열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  ◇…무소속 당선자가 많은 5.10총선. 

미국정부도 5.10총선에서 높은 투표율을 보인데 긍정평가했다.  

당시 마셜(George C. Marshall) 미 국무장관은  5월 12일의 정오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에서 이틀전 끝난 5.10총선을 평가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소수자들에 의한 불법적인 선거 저지와 방해 활동에도 불구하고 90%가 넘는 등록 유권자들이 투표했다는 것은 한국인들이 민주적 방법으로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다”  
    
  사태가 발생해 선거가 연기된 재쥬도 북제주군(갑)(을) 두 선거구를 제외한 전 선거구의 당선자 198명이 확정되었다.

 국회선거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정당 및 사회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85명으로서 가장 많았다.

5.10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선전홍보물[사진=국가기록원]
5.10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선전홍보물[사진=국가기록원]

이어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 한국민주당이 29명, 대동청년단이 12명, 조선민족청년단이 6명, 대한독립촉성 농민총연맹이 2명의 순이었고, 그 밖에 대한노동총연맹 등 11개 단체가 각각 1명씩이었다.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 단체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한 정당 단체도 31개나 있었다.
  
  당선자 가운데에서 최다득표자는 서울 성동구에서 당선된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4만 532표)이었고, 최소득표자는 경기도 장단군의 무소속 후보 조중현(2,791표)이었다. 
  
  당선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74세인 이승만이었고 최연소자는 27세인 경북 봉화군의 대동청년단 후보 배중혁이었다. 연령층으로 보면 20대 3명, 30대 41명, 40대 78명, 50대 58명, 60대 16명, 70대 4명으로서 40대가 가장 많았다
  
  당시 평가를 보면 무소속 당선자가 많았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 근대적 민주국가 운영의 기본원리인 정당정치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인식이 낮은데다,해방 이후의 폭발적인 정당난립 현상에 대한 혐오감이 선거에서도 정당을 기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명망가 중심주의 정치풍토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소속이 최대 다수로 발표되었으나 순수한 무소속은 10명 내외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한독당과 중간 진영이 근 30명, 그 밖에는 한민당원 내지 한민당과 노선을 같이하는 의원들이다.  

김성수가 이끈 한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91명 가운데에서 29명명만 당선됐다,

 그중에  전남 광산군의 홍성하, 고흥군(을)의 서민호,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한 백남훈, 경기도 연백군(갑)의 함상훈, 충남 아산군의 윤보선 등 한민당의 중요 간부 여러 사람이 낙선해 논란이 일었다. 

5.10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5.10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하지만 공식 발표로는 한민당소속으로 불과 30명밖에 안되나 무소속으로 당선된 당원을 비롯하여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과 이중으로 소속된 당원을 전부 합하면 한민당 정당원은 현재 84명에 달한다.

 한민계열에 포섭될 인사 및 노선을 같이할 인사까지 계산한다면 100명 이상으로서 한민계 세력은 국회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상황이었다.

김구의 한독당 관계자 가운데에서 총선거 거부라는 당론과 달리. 출마해 당선된 것 인사는  경기도 옹진군(갑)의 오택관 목사를 비롯하여 안성군의 김영기, 경북 영일군(을)의 김익노, 충남 홍성군의 손재학, 전북 전주시의 신성균, 충북 괴산군의 연병호 등 10명에 이른다.

5.10 총선거 불참을 선언한 뒤 충남공주 마곡사에 가서 한동안 정양하기로 했던 김구가 마곡행을 중지한 것은 이러한 당내 사정 때문이다.


 정원 10명에 83명이 입후보한 서울의 총선거는 전국 선거의 샘플이었다. 

그중에 박순천, 김활란, 황현숙, 황애덕 등 저명한 여성들도 7명이나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3명이 출마한 서울 중구에서는 이승만의 비서장 윤치영( 2만 8,496표)이 한민당으로 출마하여 차점자 박정근( 8,594표)보다 3배가 넘는 득표로 압승했다. 널리 알려진 의사 백인제( 5,688표)는 3위에 머물렀다. 
  
  8명이 출마한 종로(갑)구에서는 김성수에게서 선거구를 양보 받은 이윤영( 2만 497표)이 박순천(5,518표)을 크게 누르고 당선했다.
  
  9명이 출마한 종로(을)구에서는 장면( 2만 3,188표)이 차점자 최규설( 5,499표)의 4배가 넘는 득표로 압승했다. 
  
  9명이 출마한 동대문(을)구에서는 한민당 소속의 의사 이영준( 1만 4,695표)이 민주의원 장연송( 1만 1,006표)을 근소한 표차로 이겼다.  
 

5.10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5.10총선거[사진=신수용 대기자 DB]

3명이 겨룬 성동구에서는 이청천(4만 1,532표)이 한민당의 중진 백남훈(1만 1,108표)과의 맞대결 끝에 큰 표차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6명이 출마한 서대문구에서는 한민당의 김도연( 3만 1,181표)과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8,340표)이 함께 ‘박사’임을 내세워 대결했으나 김도연이 대승했다.
  
  13명이 경쟁을 벌인 마포에서는 한민당 발기인이었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상돈( 2만 56표)이 독촉국민회의 행동대장 유진산( 1만 497표)을 꺾었다.
  
  12명이 출마한 용산구에서는 평양 출신의 한민당 중진 김동원(1만 9,183표)이 남송학( 1만 3,466표)과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7명이 겨룬 영등포에서는 대동청년단 영등포단장인 의사 윤재욱( 1만4,296표)이 차점자 조광섭(1만 1,887표)을 근소한 차로 눌렀다. 
  
 
 제헌국회의원은  모두 198명.

▶충남(21명)= 성낙서 송진백 진헌식 김명동 신방현 유진홍 최운교 남궁현 김이수 이훈구 임석규 이종근 손재학 윤병구 이종린 김동준 김용재 서용길 이병국 이상돈 김용화

▶충북(12명)=박기운 홍순옥 이만근 김교헌 정구상 박우경 송필만 연병호 이의상 김기철 유홍렬 조중승
▶서울(12명)=윤치영 이윤영 장면 이승만 이영준 이청천 김도연 김상돈 김동원 윤재욱  이인 홍성하
▶경기(29명)=곽상훈 조봉암 이성득 서상달 최국현 신익희 김덕렬 이진수 서정희 이재형 이유선 정준 윤재근 김웅권 조중현 신광균 김경배 신현모 홍익표 유내완 원용한 송창식 민경식 김영기 최석화 홍길선 김웅진 오택관 김인식
▶전북(23명)=신성균 윤석구 배헌 나용균 김종문 김영동 백관수 조재면 백형남 이문원 조한백 홍희종 이요한 유준상 이석주 오거열 정해준 신현돈 김봉두 김교중 이정기 노인환 진직현
▶전남(30명)=정광호 이남규 박종남 정균식 서우석 김종선 김옥주 김문평 황병규 황두연 조옥현 오섭주 유성갑 이정래 조국현 김중기 차경모 송봉해 이성학 김준연 김용현 장홍영 이항발 김상호 이성우 조영규 김상순 김장렬 김병희 강선명
▶경북(37명)=최윤동 서상일 백남채 김우식 박준 정우일 권병로 김익기 정현모 김봉조  조현영 오택봉 박순식 김익로 김철 이석 정도영 이범교 박해정 박종환 김상덕 이호석 장병만 권태희 이병관 육홍균 한양희 전진한 조병한 박상영 최석홍 배종혁 서이환 임영신
▶경남(33)=문시환 허정 한석범 박찬현 권태욱 이강우 황윤호 안준상 강옥중 국중회 이주형 박해극 정진근 최봉식 김수선 김약수 이상학 조규갑 김태수 주기용 김재학 서순영 이구수 최범순 박운원 강달수 강기문 김경도 표현택 이원홍 김호석 허영호 최창섭
▶강원(12명)=최규옥 이종순 이재학 원용균 홍범의 장기영 황호현 최태규 원장기 최현길 김진구 김광준 
▶제주 (3명)=홍순영 양병직 오용국
 

제헌국회 임기동안 국회의원의 도지사, 주미대사, 장차관 임명과 선거무효에 따라 여덟 번의 보궐선거와 한 번의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재보선으로 9명이 새로 당선되는 기록을 남겼다.

장면의 주미대사 임명으로 실시된 서울 종로(을)구 보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대검찰청장 이인,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에 따른 서울 동대문(갑)구 보선에서는 전남 광산군에서 낙선한 한민당의 홍성하,   이병국의 사망에 따른 충남 천안군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김용화,   김용화의 선거 무효에 따른 재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의 이상돈, 신현돈의 전북 도지사 임명에 따른 무주군 보선에서는 대동청년단의 김교중, 이남규의 전남 도지사 임명에 따른 목포시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강선명, 정현모의 경북 도지사 임명에 따른 보선에서는 앞에서 본 대로 임영신, 문시환의 경남 도지사 임명에 따른 부산시(갑)구의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허영호, 김효석의 내무차관 임명에 따른 경남 합천군(을)의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최창섭이 각각 금배지를 달았다.


​  ◇…유엔한국위원회가 5.10총선 보고서. 


  유엔한국위원단은 5월 12일에 총선거의 임시 결과를 '공보' 59호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5·10선거의 결과에 큰 의의를 느끼고 있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5.10총선거를 홍보하는 정부기관 정문앞 현수막[사진=신수용 대기자 DB]
5.10총선거를 홍보하는 정부기관 정문앞 현수막[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유엔위원단의 전 위원은 조선문제에 관한 관심에 있어서 언제나 만장일치였지만 이번 선거를 찬양하는 데에는 위원들 사이에 어떠한 의견의 상이가 있다. 위원들 가운데에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러한 의심을 포회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남조선의 선거를 전국적인 선거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공보'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위원들은 5.10 총선을 “결정적으로 우익적인 선거”라고 부르고자 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유엔위원단의 다른 위원들은 위원단의 성과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이번 선거는 조선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 전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게시했다.
  
  '공보'는 " 이번 선거 진행 중에 몇몇 위원은 선거법 위반과 위원단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했다"면서" 그 사례로 향보단과 청년단원이 투표소 안과 주변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위원단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몇 개 투표소에서 비밀투표가 이행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고도 했다. '공보'는 결론으로 이렇게 기술했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이번 선거는 원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또한 능률적으로 수행되었다. 투표 숫자가 두세 시간 안에 고율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선거의 능률성을 증시(證示)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률성을 찬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신중한 유보가 필요함을 나는 명기하는 바이다. 여하튼 이번 감시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후일에 내릴 터이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에 포함시킬 것이다. …”
  
  이 '공보'는 임시의장을 맡고 있는 친 소련계 시리아 대표 무길(Yushin Mughir)이 각 지방에 파견되었던 위원들이 서울에 돌아오기도 전에 개인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었다. 

한민당은 5월 14일에 무길의 주장에 유감을 표명하고, 빨리 국회가 소집되어 정식 중앙정부가 조직될 것을 고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앞서 전남지방의 투표상황을 감시하기 위하여 파견됐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Jackson)은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던 4월 24일에 광주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국회의원이 정부를 수립하느냐 남북협상을 추진시켜서 수립하느냐의 두 가지 방법이다. 유엔은 남북협상의 좋은 소식을 하루속히 듣고자 한다”고 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48년 1월 12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유엔위원단의 첫 회의 광경[사진=신수용대기자 DB]
1948년 1월 12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유엔위원단의 첫 회의 광경[사진=신수용대기자 DB]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유엔위원단 위원들은 5월 12일 저녁 무렵까지 모두 귀경했다.
  
 총선 감시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한 유엔한국위원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남북협상에 참석했던 김구와 김규식과 여운홍을 초청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5월 13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늦게까지 김구, 김규식, 여운홍의 차례로 따로따로 덕수궁의 유엔위원단 회의실로 가서 유엔위원단과 회담했다.
  
  유엔위원단은 '공보' 60호로 한 시간 반에 걸친 김구와 위원단 사이의 대화를 극히 형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문 : “조만식씨가 협상에 불참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 “그분은 대표로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문 : “왜 조만식씨와 함께 오지 않았는가?”  
  답 : “조만식씨에 관한 문제는 추후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문 : “남북협상의 내용은 어떠한가?”  
  답 : “공동성명서에 발표한 것과 같다.”
  
  문 : “공동성명서의 내용과 같이 실행될 수 있는가?”  
  답 : “남북 정당사회단체의 각 대표들이 서명 날인하고 꼭 실행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문 : “미소 양군이 철퇴한다면 진공기간의 치안유지 방법은 무엇인가?”  
  답 : “공동성명에 표시한 바와 같이 남북 양쪽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기 현상을 유지하며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일체 문제를 토의 해결할 것이다.”
  
  문 : “북조선에서 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통과하였다는데 …”  
  답 :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장래에 국회에서 헌법을 토의할 때에 제안하기 위한 초안이다. 북조선에서 즉시 실행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 : “ 남조선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들도 전국정치회의에 참가하게 될 것인가?”  
  답 : “여하간 모든 문제의 최후 결정은 전국정치회의에서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김구로서는 그 이상 책임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김구에 이어  김규식은  유엔위원단과의 면담에서는 더 구체적인 대화가 오갔다.

 면담시간도 두 시간이나 걸렸다. 

김규식은 유엔위원단과의 회담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이튿날 발표했다.
  
 김규식과 유엔위원단의 면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군 철퇴 후에 북조선군이 남조선에 쳐오지 않을 것을 당신은 믿는가?”라는 중국 대표 유어만(劉馭萬)의 질문에 김규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대목이다.
  
  “사람의 일인 만큼 무엇이나 꼭 어떻다고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전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언약이 김일성 장군으로부터 제안되었으며 우리가 정중히 서명했는 만큼 나는 불신임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믿지 못할 일이 많다. 많은 국제조약이 파괴되지 않았는가. 우선 통일조선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총선거를 감시하는 것이 당신네 유엔위원단의 사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당신들은 자신이 유엔결의안을 준수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김규식이 김일성이 제안하고 자신을 포함한 남쪽 참가자들이 “정중히 서명했는 만큼” 북한군이 남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데대해  논란을 불러왔다. 
  
◇…이승만.김구 결별수순과 제헌국회 1948년 5월31일 첫 개회.


  국회 개원일은 5월 31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역사적인 국회 개원을 앞두고 5월 26일에 이화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수립과 관련한 중요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1948년 5.10총선 때 서울종로을구 투표소에서 맨먼저 투표하는 이승만[사진=신수용대기자 DB]
1948년 5.10총선 때 서울종로을구 투표소에서 맨먼저 투표하는 이승만[사진=신수용대기자 DB]

 

회견말미에 한 기자의 마지막 질문은 '김구 및 김규식과 합작할 용의는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단호한 어조로 그의 지론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것이 그 두 분과 같은 길로 나가려고 많은 힘을 써 왔으나(되지 않았다).  나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으나 그분들이 응하지 않은 것이며 반대한 것인데, 그분들과 합작하려면 그분들이 그 정책을 버리든지 내가 주장하는 정부수립을 그만두든지 해야 할 것이다. 쓰러진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먼저 세워 놓고 다음에 쓰러진 다른 부분도 살려야 된다는 것이 본래부터의 나의 주장이며 세계가 다 옳다고 인정하는 바인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합작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양씨가 뜻을 고친다면 서로 협력할 수 있다. 한 사람은 부산으로 가고 한 사람은 인천으로 가는데 서로 악수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니 그러자면 한군데로 방향을 고쳐야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탄이 났다.

 김구는 열성적으로 주동했던 남북협상의 결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구의 정계 은퇴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휴양이 필요하다고 권했다. 

마침 김구와 인연이 깊은 공주의 마곡사로부터 불탑의 증수가 끝났다면서 여러 차례 초청했다. 
그리하여 김구는 마곡사에 가서 한동안 휴양하기로 결심했다. 마곡사행을 밝히면서 김구는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했다.
  
  “오늘 마곡사에 갔다가 내일이라도 서울에 일이 있으면 곧 돌아올 것이다. … 시국이 복잡다단한 이때인 만큼 구구한 억측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한갓 신경과민 혹은 아전인수격인 억측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전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주권을 전취해야 할 혁명 시기에 있는 것이요 정권쟁취가 목표가 아니다. … 내가 정계에서 은퇴 운운이라는 말은 나에게 부당한 용어이다. …”

하지만 김구의 마곡사행은 5월 20일에 갑자기 중지되었다.

 신문에는 평양회담에 참석했던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로 마곡사행을 중지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로 선거정국을 관망하면서 침묵하던 김구와 김규식이 새로운 접촉을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의 첨예한 신경전 속에, 제헌국회가 그해 5월31일  첫 개회를 했다 

남북통일과 완전자주독립의 사명을 띠고 민의를 대변할 제 1대 국회는 이날 오후 2시 서울 부민관자리인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제1대 국회의원(제헌의회의원들)[사진=신수용대기자 DB]
제1대 국회의원(제헌의회의원들)[사진=신수용대기자 DB]

개회에 앞서 이날 오전부터 국회의사당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방청객과 내외귀빈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198명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임원을 뽑았다.

식순에 따라 애국가봉창,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열사에 대한 묵념이 있은 뒤 국회선거위원장인 노진설이 국회소집까지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 최고연장자인 이승만을 임시의장에 추대하여 취임시킨 뒤 이윤영의원의 감사기도를 한다음 국회임시준칙을 축조토의하자는 동의가 있어 이를 가결시켰다.

 준칙 결의안에 따라 의장 1명, 부의장 2명으로하자는 이정래의원의 동의가 가결되어 무기명 투표로 의장, 부의장 선거에 들어갔다. 

투표결과 198명중 188표를 얻은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에, 그리고 부의장에 해고 신익희가 116표, 김동원 101표로 당선됐다.

1948년 5월31일 역사적인 제헌의회가 열리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1948년 5월31일 역사적인 제헌의회가 열리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초대의장이 된 이승만은 식사를 했다.

"우리는 민족 공선에 의하여 신성한 사명을 띠고, 국회의원 자격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직무와 권위를 행할 것이니,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 민주정부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 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국회의원 198명이 제창한 선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의원은 조국재건과 자주독립을 완수하기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의 정부를 수립하여 남북통일을 완성하여 국가만년의 기초를 확정하고, 국리민복을 도모하여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최대 충성과 노력을 다할 것을 이에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000만동포에 삼가 선포함"

 초대 국회의장인 이승만의 집권은 점차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이화장은 찾아오는 내외국 인사들로 인성만성했다. 

답지하는 축전 가운데에는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보낸 것도 있었다.
  
 

이승만 초대 제헌의회의장이 1948년 5월31일 열린 역사적인 제헌의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 초대 제헌의회의장이 1948년 5월31일 열린 역사적인 제헌의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은 정부수립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먼저 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를 열어 중앙정부수립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원회는 5월 20일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중앙선거위원회를 열고 중앙정부 조직에 관하여 국회 안에서 행동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부서를 결정했다.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명제세와 백남훈, 그리고 총무부에 고휘동 외 5명, 기획부에 이종현 외 5명, 선전부에 양우정 외 5명, 외교부에 이활 외 5명, 조사부에 유진산 외 5명이 선정되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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