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25)] 초대대통령 이승만선출... 감동과 반공담은 취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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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25)] 초대대통령 이승만선출... 감동과 반공담은 취임사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11.0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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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20일 제헌의원들이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부통령 뽑아.
- 중국공사등이 김구에게 부통령제의 거절... 김규식등과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이승만 거처 이화장이 조각본부...정파간 간섭많아
-이승만 취임당일 오후부터 중앙청에서 집무.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투표 나흘뒤인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건물) 광장에서 열렸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투표 나흘뒤인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건물) 광장에서 열렸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초대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중심제의 채택에 따라 국민의 관심사는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쏠렸다.

그무렵 조선일보는 흥미로는 분석보도가 화제였다.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선거에 앞서 제헌국회내 3개의 정파의 분위기와  전망을 소개했다. 

 “국회 내의 동향 및 항간에 이미 유포되고 있듯이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가 확실시라 하며, 부통령에는 이시영(李始榮), 오세창(吳世昌), 김구(金九)씨 등이 논의되고 있으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을 것이나 물망 중의 인물은 신익희, 김성수(金性洙), 조소앙(趙素昻)씨 등으로 지목되고 있다. … 19일까지의 국회 내 각파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 한국민주당계 = 19일 오전 11시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 독촉국민회 계열을 포함한 약 50명이 회동하고 사전 협의한 바 있다. 따로 한민당원은 하오(오후) 2시에 당회의실에서 회합하고 협의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시영씨를 지명 투표하기로 하였다 하며, 국무총리에는 김성수씨를 추천 공작중이라 한다. 
  
  ○ 무소속구락부 = 17, 18, 19 연 3일간 회합하고 대통령에 이 박사, 부통령에 김구씨를 추대하고 국무총리에는 조소앙씨를 추천하기로 하였다 한다.
  
  ○ 독촉국민회계 = 대통령에는 이 박사, 부통령에는 이시영씨를 추대하기로 하였다 하며, 국무총리에는 신익희씨를 추대할 것이라 한다. 

  
  이로 보아 대통령에는 이 박사, 부통령에는 이시영씨가 유력시되나 절대 다수표는 독점하기 곤란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일부에서 서재필(徐載弼) 박사, 김구씨 등에게도 분산투표가 예상되는 까닭이라 한다. 그리고 정·부통령 선출 후에는 국무총리 임명이 주목되는 바인데, 국회 내의 3파세력의 각자 추천인물이 미묘한 관계와 그러한 점을 고려하는 이 박사의 태도는 규지할 수 없는바 예측키 곤란하다.

 여하간에 국제정세로나 특히 국내정세로 보아서라도 불원간 북조선에서도 정부수립 기도설이 전해지고 있는 이때에 남북통일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명실상부히 유능한 인물의 등장이 긴요한 만큼 국회의원의 금일의 투표 여하는 중차대하다 할 것이다. …”
  
◇… 이승만, 180표의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 당선.
  
  UN을 비롯 국내외 주요 관심사인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그해 7월 20일에 열린 제33차 국회 본회의에서 열렸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한 제헌의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신수용대기자DB]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한 제헌의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신수용대기자DB]

선거는 무기명 투표로 진행됐고 국회 내 주요 세력들이 후보를 추대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은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이시영을 지명했다. 

반면 무소속구락부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부통령 후보로 지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예상과는 달리 대통령 선거결과는 이승만(당시 초대 국회의장)의 압승이었다. 

당시 서울신문은 '대통령(大統領)에 이박사(李博士)'란 보도내용에서 이를 상세히 전했다.

대통령 선거는 오전 10시25분부터 1시간가량 무기명투표로 진행됐다.  재적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출석하여 투표에 참가했다.

 개표결과 180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김구는 13표로 차점이었다. 

그 밖에 안재홍(安在鴻)이 2표, 서재필이 1표였으며, 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가졌으므로 그의 표는 무효라는 서우석(徐禹錫) 의원의 긴급동의에 따라 만장일치로 무효로 처리되었다.
  
이어  부통령 선거는 오후 2시부터 실시되었다. 부통령 선거에 앞서 이승만은 국회의장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부통령에는 누가 당선되기를 희망하는가?”라는 기자들이 질문했다.

이승만은 이미 이시영으로 낙점해 놓고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당시 동아일보 7월 21일자 '일주일내( 一週日內)에 조각(組閣)'이란 기사내용은 이렇다.
  
  “나로서는 그것을 결정할 수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오세창, 이시영씨가 좋다고 하였는데, 최근에 와서는 조만식(曺晩植)씨 설도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만식씨를 매우 존경한다.조만식 씨는 히틀러 독재하에 있던 전시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을 한 뉴멜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조만식씨를 부통령으로 모시는 것은 조만식씨 자신을 위하여 위험천만이라고 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역설하지 못하는 것이며, 만일 실패하는 경우에는 안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러자 기자들은 대통령 선거 때에 김구의 표가 나왔던 사실을 들면서 “부통령에 김구씨가 나오게 되면 합작할 의사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이승만 초대 대통령[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이에 대해 이승만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면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대답을 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김구씨의 태도는 아직 동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의사가 맞는 사람이 일치단결하는 데서 정부가 공고히 되는 것이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의사가 맞지 않으면 정부는 자연적으로 흔들려지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서는 김구씨가 불원간 태도표명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구씨는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미국사람이 우리 정부에 간섭할 것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 정부 수립하는 데 미국은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있다. 사실 미국사람이 우리 정부에 간섭한다면 나 자신도 그것을 반대한다.”
  
  이어서 그는 “그렇다면 김구 국무총리설도 낭설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국무총리를 준다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퉁명스럽게 일축했다.
  
◇…제헌국회내  김구 지지세력 적지 않아

부통령 투표 때에는 대통령선거 때 불출석했다가 한 의원이 더 출석하여 197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그해 7월21일자 경향신문은 '부통령(副統領)에 이시영씨(李始榮氏)'를 보면 개표결과가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張澤相) 3표, 서상일(徐相日) 1표로 최고득점이 출석의원의 3분의 2가 되지 못하여 헌법 규정에 따라 재투표를 실시했다.

 재투표 결과 이시영이 20표가 더 늘어난 133표의 최고 득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 당선 당시 조선일보 호외[사진=신수용 대기자DB]
이승만 초대대통령 당선 당시 조선일보 호외[사진=신수용 대기자DB]

차점인 김구는 62표로 2차 투표에서도 3표밖에 줄지 않았다. 김구의 정부참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국회 안에 그의 지지세력이 3분의 1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이구수(李龜洙)가 1표, 무효표가 1표였다.
  
 1948년 7월22일자 동아일보의 '오락가락하는 사람들 善導(선도)란 기사에서 이시영은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서면 오락가락하는 민족적 정기를 상실한 그릇된 사람들을 선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의미심장한 의견을 피력했다
  
  대통령 선거에 대하여 대표적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두 신문이 각각 다음과 같이 논평한 것은 우익진영 간의 여론의 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민당계의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박사의 대통령 당선은 그 인망으로 보거나 국내 정국의 귀추로 보아 당연한 일이며 대외적인 신망으로 보아 국제적으로도 다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외국인도 박사에게 중임이 낙착될 것은 이미 예측한 것 같으며 또 미-소가 세계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정세하에서 박사 이외에 인물이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여하간 우리는 우리의 자율적인 의사를 가지고 대통령을 선출하야 정부수립을 앞둔 박사로부터 국민의 공복이 될 것을 우리는 또한 들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 있어서도 일생을 갖은 압제와 폭압에 굴하지 않고 고절(苦節)을 지키던 그 위대한 정신을 살려서 여생을 독립완수에 헌신하기를 바란다.”
  
  한편 김구에게 호의적인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국회가 남조선만으로 성립된 거기에도 무한한 적요〔寂寥: 적적하고 고요함〕를 느끼거니와 김구, 김규식씨 등 커다란 정치세력의 불참이 국회의 또한 적요감을 주었다. 부득이 남북이 미-소 외교전의 결과로 갈리지 않을 수 없다면 남(南)은 남만으로라도 자주적 질서를 육성하여 앞으로 북과의 평화적 통일을 전제하야 모다 뭉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 남조선의 대다수의 심정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오늘 초대 대통령으로 추천된 이 박사는 오랫동안 태평양을 격하여 있었다 하지만 국권회복에 노심분투하던 분 중 어느 분보다도 당연히 합력되었어야 할 김구, 김규식 양씨를 위시하야 오늘 국회에 불참한 일파와 한자리에서 신국가의 구상을 토론치 못하게 된 것을 이 박사 자신이 누구보다도 적적히 여길 것을 접어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국내 국제의 다단한 관계를 생각할 때에 지금 착수될 정부조직에 있어서 이 박사의 고심도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니, 이것이 또한 오늘 국민의 가슴에 서린 어설픈 느낌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을 맡은 이 박사야말로 난국타개에 더 큰 분투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승만은 이화장의 작은 별채를 조각본부로 정하고 조각작업에 착수했다. 

이화장은 7월 21일 아침부터 인성만성했다.

오전 9시에 통위부장 유동열(柳東說)과 해안경비대 사령부의 손원일(孫元一)이 방문한 데 이어, 9시30분에는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 10시에는 하지 사령관, 10시30분에는 신익희와 대법원장 김용무(金用茂), 11시5분에는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金活蘭)이 차례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하지는 노블(Harold Noble)과 제이컵스(Joseph E. Jacobs) 두 정치고문을 대동하고 와서 30분 동안 요담을 나누고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처인 이화장[사진= 신수용대기자 DB]
이승만 대통령의 거처인 이화장[사진= 신수용대기자 DB]

하지가 이승만의 사저를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두사람의 큰 불화로 하지의 경질 설이 나올 때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요양 중이던 이시영은 오후 1시15분에 이화장을 방문했다. 

이어 오후 4시10분쯤에는 하지의 경제고문 번스(Arther C. Bunce) 박사, 그리고 오후 5시에는 유어만 공사의 방문을 받았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948년 7월21일자동아일보 사설은 ' 초대대통령이승만박사(初代大統領李承晩博士)'라는 글을, 같은 날 조선일보사설은  '초대대통령(初代大統領)'에 이박사(李博士)'로 흔들리는 민심의 길라잡이가 됐다.

이어 다음날 동아일보는 '내각(內閣)의 산실(産室), 이화장(梨花莊)'을,  같은 날 조선일보는 '이화장(梨花莊)에 조각본부(組閣本部)'라는 보도로 초대내각구성에 분주한 이승만의 이화장에 유력인사들의 방문을 각각 보도했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인 '통일독립촉진회( 統一獨立促進會)' 결성


이에 앞서 그해 7월 11일에 김구를 면담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한국 주재 총영사 유어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 

유어만은 대통령 선출이 유력하던 이승만에게 김구의 부통령 출마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경기 여주군 신륵사를 찾은 김구와 김규식[사진= 신수용 대기자DB]
경기 여주군 신륵사를 찾은 김구와 김규식[사진= 신수용 대기자DB]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동아시아에 다가올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의 우파 지도자인 김구와 이승만이 힘을 합치기를 바랐다.

유어만과의 대담에서 김구는 이승만이 한국민주당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정부에 참여한다면 심각한 갈등이 불가피하므로 재야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어만은 7월 13일 김구가 정치를 재개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고 중국 외교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구는 7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다는 소문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을 향해 미군과 소련군 철수 이후 남북협상에 참여한 단체들을 중심으로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이승만.이시영정권이 들어서게 되지 김구.김규식의 정치 발걸음이 빨라졌다.

김구. 김규식의 행보도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양 김씨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우선 정.부통령이 뽑힌 바로 다음날 7월 21일 정오에 소공동의 연무관(硏武館)에서  통일독립촉진회의 발기 겸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중앙에 자리한 가운데 70여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인 대의원 150여명이 참석했다.

 사회를 맡아 개회사를 한 김붕준이 임시의장에 피선되어 대회를 진행했다.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사진=신수용 대기자DB]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사진=신수용 대기자DB]

 조헌식(趙憲植)의 경과보고에 이어 두 김의 치사가 있은 다음 엄항섭의 국내외 정세보고가 있었고, 권태양이 강령과 규약을 낭독하고 통과시켰다.

 강령은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집결을 기함','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도모함', '민족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이었다.

 규약 수정에 관해서는 새로 선출되는 중앙집행위원회에 일임했다. 
  
  회의는 토의사항으로 들어가서 전국정치회의 소집문제와 유엔총회에 대표 파견문제를 상정했으나 역시 중앙집행위원회에 일임했고,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와 유엔총회에 “통일자주독립의 조속한 완수에 귀국의 원조와 협조를 요망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배성룡이 낭독하여 의결했다.

 회의는 이어 임원선거에 들어가서 주석에 김구, 부주석에 김규식을 추대하고 중앙감찰위원을 선출한 뒤 오후 4시쯤에 폐회했다. 
 

김구는 1948년 8월8일 중국 대륙에 묻고 온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를 인천에서 맞았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어 만주 지방이 중공군 수중에 떨어지자 둘째 아들 김신(金信)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의 장로였던 이동녕(李東寧)과 중경시대의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었던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함께 모친 곽낙원(郭樂園), 아내 최준례(崔遵禮), 큰아들 김인(金仁)의 유해를 옮겨 오게 했다. 이동녕은 기강에, 곽낙원과 김인, 차이석 세 사람은 중경에, 최준례는 상해에 묻혀 있었다.  김구는 이날 비가 내리는 인천 부두에 나가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와 큰아들 김인의 유해를 맞아  경교장에 안치했다가 8월 20일에 서울중학교 운동장에서 기독교 연합장으로 장의식이 거행되었다. 장의식은 이시영, 오세창, 김창숙(金昌淑), 김성수, 조소앙, 조완구, 명제세, 피치 박사 등의 내빈과 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사회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세 사람의 유해는 정릉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에 최준례의 유해는 김구의 묘에 합장되고, 곽낙원과 김인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김구는 1948년 8월8일 중국 대륙에 묻고 온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를 인천에서 맞았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어 만주 지방이 중공군 수중에 떨어지자 둘째 아들 김신(金信)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의 장로였던 이동녕(李東寧)과 중경시대의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었던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함께 모친 곽낙원(郭樂園), 아내 최준례(崔遵禮), 큰아들 김인(金仁)의 유해를 옮겨 오게 했다. 이동녕은 기강에, 곽낙원과 김인, 차이석 세 사람은 중경에, 최준례는 상해에 묻혀 있었다. 김구는 이날 비가 내리는 인천 부두에 나가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와 큰아들 김인의 유해를 맞아 경교장에 안치했다가 8월 20일에 서울중학교 운동장에서 기독교 연합장으로 장의식이 거행되었다. 장의식은 이시영, 오세창, 김창숙(金昌淑), 김성수, 조소앙, 조완구, 명제세, 피치 박사 등의 내빈과 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사회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세 사람의 유해는 정릉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에 최준례의 유해는 김구의 묘에 합장되고, 곽낙원과 김인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그런데 이날 김구와 김규식이 한 치사 내용에는 눈여겨볼 만한 차이가 있었다. 

김구의 치사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현하 우리 환경을 싸고도는 정세는 대단히 악독하고 험악한 바 있다. 일제가 물러간 오늘날의 현상은 어떠냐. 남북에 외국군은 주둔하여 있고 민족의 유혈은 날이 갈수록 심화하여 앞으로 열릴 유엔총회에서 저울질을 받게 되었다. 조국의 운명이 외국사람들의 손에 좌우된다는 것은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탐관오리, 모리간상, 친일역배, 악질반동배들이 발호하고 있음은 통곡할 일이다.
  
  민족의 통일독립만이 우리 민족을 살리는 길이다. 우리 민족은 우리 자신이 살려야 하겠다. 친소 친미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조국을 친하고 우리 자신이 통일한 연후에 비로소 친소도 할 수 있고 친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번 평양회담도 해 보았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또하나의 정부를 세운다 하니 이는 그들의 배신적 행위이므로 우리 애국통일독립운동자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통일을 위하여 싸워야 하겠다.”

  
 이처럼 김구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강행한 것을 “배신적 행위”라고 비판했으나, 남한의 정부수립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  이승만의 첫 조각에 각정파마다 '감 놔라, 배놔라' 훈수.

  반면   김규식은 남한에 설립되는 정부에 반대도 하지 않고 참가도 하지 않지만 잘되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말할 흥취도 나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이 40년인데 그것이 통일 못돼서 그렇게 된 것이었고, 그동안 갖은 고초를 다하여 해방이 되었는데 이 해방도 남의 덕분으로 된 것이다. 유감인 것은 우리가 북에서 발표한 공동커뮤니케이션의 제안은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북에서 정부를 세우느니 하는 말이 들리는 까닭이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북조선에 있는 동포들도 엄정하게 성명한 글발에 대해서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바라기를 우리는 얼마든지 식구가 많든지 적든지 우선 남쪽에 있는 동포들이 통일이 되어서 우리 독립을 쟁취하는 데 필세(畢世)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제 남조선 국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었는데, 나는 과거의 나의 성명과 같이 반대도 안하고 참가도 아니하는 동시에 그것이나마도 잘되어 나가기를 바라며, 그것이 정부가 아무렇든 간에 외국인의 군정부보다는 낫게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북에서 또하나 정부가 선다면 그 북정부와 남정부가 한데 합하여 우리가 살길을 얻기 바란다. 여러분은 앞으로 속히 다같이 중간이고 좌이고 우이고 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통일을 완수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해 내기를 바란다.”45)
  
 손세일의 비교 평전인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1948년 7월22일자 서울신문의 당시 두사람의 치사를 비교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통일독립(統一獨立)만이 우리의 활로( 活路)'라는 보도에서 김규식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미군정부의 미국인들과 계속적인 접촉과 그들의 설득에 따른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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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승만은 초대 내각구성에 분주했다.

그런 가운데 독립정부의 첫 조각을 앞두고 제헌국회 정파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훈수가 연일 보도됐다.
  
이승만은 그럴 때마다 “내가 원(願)하는 것이 민의(民意)와 같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는 독립정부의 첫 조각을 앞두고 정파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훈수가 연일 보도, 이승만의 고민을 가중시켰다.

물론 이를 이승만은 여간 못마땅한게 아니었다.

이화장에서 이승만 초대대통령[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이화장에서 이승만 초대대통령[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이승만은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아예 무시할 만한 수중의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승만은 특유의 저돌적인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심했다. 믿는 것은 ‘민의’, 곧 민중의 지지였다. 

이승만은  7월 22일에 이화장에서 '국무총리 인선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무총리는 아직 지정한 사람은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다. 각 정당 사회단체가 다 소망대로 되기를 기대하는 중에도 이번에 여러 가지로 발표되고 낭설이 유행되었으나 나의 생각에는 이와 같이 되지 않을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놀랄 것으로 본다. 내가 또 믿는 것은 모든 정당과 단체가 자기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자기들의 믿는 사람이 정당한 자리에 앉아야 나라일이 잘될 줄 알고 기대하는 것뿐이니, 어쨌든지 자기들의 의외의 사람이 나서 일이 잘될 줄 믿게 되는 때에는 일심으로 복종할 줄 안다.”  
 

이승만 대통령 취임선거[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이승만 대통령 취임선거[사진= 신수용 대기자DB]

기자들은 '국무위원의 각파비율에 대해 정하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이 질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민의와 같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정부수립은 남의 조직된 나라와 달라서, 어떤 정당이 득세하거나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오직 이것은 국권을 회복해서 새로 국가를 건설하는 정부이므로 정당이나 파당주의를 초월해서 오직 민의를 따라서 세워야만 될 것이다. 만일 우리 민의가 나의 뜻하는 바와 근본적으로 달라서 딴 길로 나아간다면 나는 극력 충고해서 만회하기를 도모할 것이다.
  
  내가 귀국 후로 체험한 민의는 전적으로 나의 뜻과 같으며 나의 원하는 것이 민의와 같으므로, 우리의 부강 전진이 용이하게 될 것을 믿고 많은 자신과 흥분을 가지고 용감스러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하니 민족 전체는 다 지지 추대해서 국가의 위신을 존중히 여길 줄 믿는 바이다. 앞으로 국무위원 조직이 발표될 때에는 낙심 낙망할 사람이 얼마는 없지 않을 것이다.”46)
  
  그것은 좌고우면 끝에 결단한 이승만의 책략이었다.
  
  ◇…   ‘눈물’ 이야기로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 취임사.​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투표 나흘뒤인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건물) 광장에서 열렸다.

최초 국회의사당 (옛 조선총독부제공)[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최초 국회의사당 (옛 조선총독부제공)[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제헌국회 국회의원 전원을 비롯하여 과도정부 부처장, 국방 및 해안경비대원,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그리고 유엔위원단, 하지 중장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을 비롯한 미군정부 간부 등 외국 내빈들이 다수 참석했다.

 취임식은 국회 제34차 본회의에서 거행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선서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국회부의장 신익희의 개회사가 있은 뒤  이승만은 헌법 제54조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선서를 했다. 그는 그때  일흔네 살이었다.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선서한뒤 선서문에 서명했다.
  
 뒤이어 있은 이승만의 취임사는 조각인선 문제로 눈코 뜰 사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승만 자신이 특유의 문장력을 한껏 발휘하여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감동적인 수사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요사이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 합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이 아닌만치 나도 뼈에 맺히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명되는 까닭입니다.”
  

  이승만의 취임사에는 독립정부의 두가지 원칙도 담고 있었다.
  
  이승만은 먼저 5·10선거가 민주적으로 실시되었다는 점과 이 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국회는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성공적으로 제정했다고 국회의원들을 치하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남녀가 단순한 애국성심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되어 2, 3개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채로 지목받는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충돌로 분쟁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렬한 쟁논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야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내에 원만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어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인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낭설이 유포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투표나흘뒤인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건물) 광장에서 열렸다[사진=대통령기록관 제공]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투표나흘뒤인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건물) 광장에서 열렸다[사진=대통령기록관 제공]

그러면서 " 며칠 안으로 결정하여 발표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부조직의 원칙을 두가지로 설명했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회상 명망이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관계로나를 다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이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을 민의대로 준행해 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작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혹은 작아서 큰 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능히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작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서 무슨 책임을 맡기든지 대소와 고하를 구별치 않고 작은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들이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일해 나가면 우리 정부 일이 좋은 시계 속처럼 잘 돌아가는 중에서 이적을 많이 나타낼 것이요, 세계의 신앙과 동정이 날로 증진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수립하는 정부는 어떤 부분적이나 어떤 지역을 한하지 않고 전민족의 뜻대로 전국을 대표한 정부가 될 것입니다.”
  

◇…   충남금산출신 임영신극찬과 반공주의 선언.

이승만은 이어 “내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면서 그의 지론인 민중이 주인의식을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외신지에 소개된 이승만 초대대통령[사진= 이승만기념관 제공]
외신지에 소개된 이승만 초대대통령[사진= 이승만기념관 제공]

그리고 정부승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는 바는 승인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먼저 국권을 공고히 세우는 데 있나니, 모든 우방이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만 해 나가면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도우며 후원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우리가 일 잘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9월에 파리에서 개최하는 유엔총회에 파견할 우리 대표단은 특별히 긴중한 책임을 가지니만치 가장 외교상 적합한 인물을 택하여 파견할 터인데, 아직 공포는 아니하였으나 몇몇 고명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으니, 정부조직 후에 조만간 완전 공포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레이크 석세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영신(任永信.훗날 상공부장관)에 대하여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칭찬함으로써 조각작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쏟아졌다.
  
  일부 신문에는 임영신이 이승만이 출마했던 동대문 갑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하여 곧 귀국한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실제로 임영신이 당수로 있는 여자국민당은 7월 23일에 긴급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임영신을 동대문 갑구의 보궐선거에 출마시키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취임사중에 눈에 띠는 대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으름장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북 동포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야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딴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남북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개과(悔心改過)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만일에 시종 깨닫지 못하고 분열을 주장해서 남의 괴뢰가 되기를 감심할진대 종차는 천의와 인심이 결코 방임치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렇게 국가보안법 제정의 필요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친선해서 평화를 증진하며 외교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소(親疎)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이든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간에 우리가 국제상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말도 할 수 있고 우리일도 할 수 있나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 대로만 정해 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실정을 알려주어서 피차의 양해를 얻어야 정의(情誼)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평화를 보장하는 방법입니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취임한 오후부터 집무 시작. 
 
  이승만은 끝으로 새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새백성이 아니고는 될 수 없다는 말로 취임사를 마무리했다.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상[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상[사진= 대통령기록관 제공]

  “새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만 새백성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 반석위에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이시영 부통령은 양분된 국토를 통일하고 산업을 재건해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역설했다. 

오세창의 기쁨에 넘쳐 울음 섞인 축사와 김동원 국회부의장의 만세 삼창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빗방울 속에서도 세종로까지 가득 차 있었던 군중은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당시 언론은 대한민국 정·부통령 취임을 통해 마침내 한민족이 잃었던 조국을 되찾았으며 3·1 기미독립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은 취임식이 거행된 바로 그날 오후부터 집무에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은 중앙청 3층의 200호실로 정해졌다. 

부통령실은 미군정장관실로 결정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안건은 '대한민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안이었다. 

그것은 1945년 12월부터 미군정부가 접수하여 관리해 오던 귀속재산 '구 일본정부 및 일본인 소유의 재산'의 소유권을 한국정부에 이양하는 중요한 협정이었다.

 이승만은 이 협정문을 같이 검토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의 최순주(崔淳周)와 백두진(白斗鎭), 식산은행의 장봉호(張鳳鎬) 세 사람을 오후 2시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오라고 불렀다. 최순주는 미국 유학생으로서 아는 사이였으나 다른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네 사람은 회의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국문과 영문으로 된 전문 14조의 협정문과 보충협정이 있고 부속문서도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그 중요한 문서를 즉석에서 검토하기란 세 은행가의 능력에는 부치는 일이었다.

 장봉호가 이승만에게 이 문서를 빌려주시면 가지고 돌아가서 잘 연구하여 내일 의견을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 문서는 외부에 내보낼 수 없다면서 이 자리에서 몇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잘 보고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세 시간이나 진땀을 뺐다.
  
  백두진이 한 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협정문 제9조에 미국무부 해외물자청산위원회(Office of Foreign Liquidation Commissioner)로부터 공여된 물자대금에서 미국정부가 한국 내에서 필요한 토지 및 건물의 매수 가격을 뺀 금액에 대하여 1년에 2%의 이자를 붙여 원(圓)화로 변제하기로 되어 있는 조항에 대하여는 이의를 제의하여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 조항은 잘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협정안은 아마도 7월 21일 오후에 이화장을 방문한 하지의 경제고문 번스가 가져온 것이었다.

이를 봐서 이승만은 조각준비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 협정안을 직접 검토한 것이 틀림없었다.
  
  별로 긴 토론은 없었고, 세 은행가는 이 짧은 시간에 저희들이 무슨 책임있는 말을 하기에는 곤란하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재임기간 내내 예산이나 경제정책, 특히 달러의 운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챙겼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숫자에 매우 밝은 장점을 갖고있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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