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1)]일제 귀속재산 불하, 불로소득과 정경유착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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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1)]일제 귀속재산 불하, 불로소득과 정경유착의 기원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1.05.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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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속재산 농지는 농지개혁법으로, 기업.공장등은 귀속재산처리법으로 불하.
-귀속재산 총자산가치는 당시 우리나라 총 자산가지의 80%에 달해. 
-하지 미군정청, 신한공사 설치해 일제에서 압수한 30만 정보농지. 기업. 부동산등 수천건.
- 접수된 귀속사업체  3,551개...불하재산 기업체 513건, 부동산 839건등 2,268건.
-정부수립뒤 6.25 전쟁후 불하본격화...특혜.부정.정경유착등 비리 얼룩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해방무렵의 적산 기업[사진=네이바블로그켑처]
해방무렵의 적산 기업[사진=네이바블로그켑처]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된데 이어 같은해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다

그 뒤 2년 임기의 제헌국회는 1950년 5월 30일 막을 내린다.

제헌국회의 대표적인 활동은 헌법과 정부조직법등의 제정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근간이 됐고, 정치.경제, 사회,문화등의 틀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반민특위법.보안법.농지개혁법.귀속재산처리법 제정...논란과 반발.

반면,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 제정을 반민 특위를 구성했다.

제헌 국회의원 10명이 참여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탄압으로 그들은 실형선고를 받았으나, 재심청구로 모두 풀려났다.

조사기간은 약 7개월로 이승만 정부와 한민당의 반대에다, 조사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위원 테러와 사무실습격등 방해로 실패했다. 

또한 ​ 1948년 제주 4.3사태와 여순 좌익군인 폭동을 계기로 좌익 군인의 색출을 목적으로 보안법이 제정되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권력기반강화에 악용된 '용공조작'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는 친일청산, 민족반역자등의 처단을  포기한 대신, 반공(反共), 승공(勝共)을 구호로 외치며 북조선과 대립하며 체제강화에 힘썼다.

반민특위조사로 기소된 인사들의 재판정[사진=신수용 대기자db]
반민특위조사로 기소된 인사들의 재판정[사진=신수용 대기자db]

때문에 한때 죽은 목숨이던 일부 친일경찰이 보란듯이 살아났다.

그러자, 이승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승만을 등에 업고 온갖 보복 횡포를 부렸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장경근 당시 중부서장( 자유당정권서 내무차관)이 지휘해 습격했다.

사건 현장을 점검하러 나간 권승렬 초대 검찰총장을 무릎꿇리고,폭행하고, 권총을 빼앗았다.

친일청산과 민족반역자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를 둘러싸고 친 이승만계와 다른 정파간의 대립과 반목이 꿈틀댔다.

그간에 친일청산을 외치거나 주장해온 야당정치인, 학자,언론인,그리고 전국 각지역 반민특위 지지자및 선동자를 모두 '빨갱이'로 낙인찍어 

이승만은 국회나, 군과 검찰보다, 경찰을 더 신뢰했다.

경찰내 사찰(정보), 대공분야를 강화하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계기가 됐다. 

38도선 북녘에서는 인민군을 키우고,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업고 키운 인민군을 훈련시켜 남침을 획책하는 동안 이승만 정부는 국방에 허술했다.

김일성.박헌영.허헌.김두봉등이 소련.중공과 손을 잡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안 이승만 정부는 경찰을 앞세운 정적 제거에 혈안이 되있었던 시대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에는  농지 개혁법을 제정했다.

지주들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불하하였고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기준으로 한 법이다. 

여기에 농지 외의 임야는 제외하고 농지 개혁법 제정 이후 지주전호제와 소작제는 소멸하였고 남한 공산화 저지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농지개혁, 토지개혁은 젊은 날 이승만 대통령이 꿈꿔온 구상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위해 실현시키기위한  초대 농림부장관을 누구를 발탁할지 큰 관심을 끌었다.
 

조봉암등의 사형언돌르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사진=경향신문 켑처]
조봉암등의 사형언돌르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사진=경향신문 켑처]

이승만은 여러 예상과 달리  훗날 진보당 사태로 사형을 받은 사회주의자 죽산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을 발탁했고, 죽산이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제헌국회내 우익정파와 심지어 미국정부에서 조봉암발탁에 유감을 표할 정도였다.

이승만이 사회주의자였던 조봉암을 장관에 임명한데는 일제때 온갖 수난을 당한 농민들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계략이 숨어 있다.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라이프등과의 회견에서 죽산조봉암 발탁이유에 대한 질의를 받자, '농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 조봉암을 임명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을 둘러싸고 7개월간 논란을 빚었다.

이를 다룰 제헌국회내 산업위원회의 국회의원중  지주가 4분3였기에 '이승만의 농지개혁법의 비토'때문이었다.

산업위원회 몇몇 의원은 지주인 자신이 피해가 없도록 법안을 만들어 산업위에 내기고 했고, 산업위원회 자체의 농지개혁법안이 제출되는등 혼란을 극심했다.

국회와 정부가 줄다리기를 한 국민들은 농촌마을 마다 땅을 가진자와 소작농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각했다.
  
이러다가 가까스로 1950년이 되어서야 개정안, 수정안을 놓고 오락가락하다가 법안이 통과됐다.

제헌 국회는 1949년과 1950년에는 '귀속재산처리법'도 제정했다.

귀속재산 몰수와 불하는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무산된뒤라 관심이 뜨거웠다.

 일본인 소유의 기업, 공장과 주택을  민간인에게 불하하는 내용이다.

1945년 일본군이 패전으로 한국을 떠나는 항구모습[사진=ys20607켑처]
1945년 일본군이 패전으로 한국을 떠나는 항구모습[사진=ys20607켑처]

공장 임차인과 관리인 주주 관리직 직원에게 불하하는것이 조건이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민간 기업이 탄생했고, 농업국인 한국이 60, 70년대를 거치며 공업국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미군정청 귀속농지불하( 歸屬農地拂下)를 놓고 이승만 반발.

이에 앞서 해방 후 미 군정청이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몰수해 국민들에게 분배했다.

 미 군정은 1946년 2월 21일 미군정법령 제52호로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세우고 과거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한 일체의 재산을 인수하게 했다.

대신 소작료를 3·1제로 정했다. 

▲적선건물중의 하나인 훗날 중앙청.미군정청 중앙청 초대 이승만 대통령집무실로 사용한 조선 총독부 건물[사진=신수용 대기자DB]
▲적선건물중의 하나인 훗날 중앙청.미군정청 중앙청 초대 이승만 대통령집무실로 사용한 조선 총독부 건물[사진=신수용 대기자DB]

그러나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와 소작료 3·7제를 주장하면서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바라는 농민들의 열망이 날로 높아졌다.

북한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미 군정역시  토지개혁정책을 서두르게 됐다.

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 편찬회, 2005. 9. 10)에 따르면 1947년 12월 농지개혁법안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상정되었으나, 우익 측 의원들의 출석거부로 회의는 열리지 못해, 법안 역시 심의되지 못했다.

해방후 귀국한 이승만은 크게 반발했다.

청년 정치인일 때 이승만이 꿈꿔온 농지개혁였는데, 미군정이 선수를 쳤다고 분개했다.

당시 미군정청장 하지 사령관(중장)에 대해 심한 반발에 이어, 미군 극동지역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공식적으로 '미군정청의 일제 귀속재산 불하 반대'입장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잘아는 미국 상.하원 일부의원들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그뒤 미 군정은 전면적 농지개혁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로 미뤘다.

미군정청은 대신  일본인 소유지만의 매각에 착수했다. 

이는 이승만의 반발과 농민들을 무마하고 장차 단독정부의 원만한 수립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지 중장과 이승만의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 졌다.

때문에 이승만은 남한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이승만은 김구계열의 인사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라는 등의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을 정도다.

미군정은 1948년 3월 신한공사를 해체하고 중앙토지행정처를 설치했다.

미군정청은 '소작지 또는 소유지가 2정보 이하인 자로 매각토지의 소작인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 외 농민, 농업노동자, 해외에서 온 귀국농민, 북한에서 이주한 사람에게 매각한다'고 밝혔다.

귀속농지불하등에 쓰인 지가 증권[ 사진=붇옹산 카페]
귀속농지불하등에 쓰인 지가 증권[ 사진=붇옹산 카페]

 또 '농지의 대가는 당해 토지의 주생산물 연간 생산고의 3배로 하고 지불은 20%씩 15년간 연부로 현물납입하며, 분배된 농지의 매매·임대차·저당권 설정은 일정기간 금지한다'는 조건으로 매각했다.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토지는 경작지 27만여 정보, 택지·산림을 합해 총 32만여 정보였다.

그러나 , 미 군정이 매각·분배한 것은 논과 밭에 한정되었으며, 이승만정권 수립까지 약 85%가 매각·분배되었다.

◇…귀속재산 불하, 불로소득과 정경유착등 부작용발생.

미군정청의 1947년 5월 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한상공회의소나 한국민주당은 관리인에게 우선권을 주어 8 · 15 당시의 값으로 귀속재산을 빨리 불하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한민당이 1945년 창당할 때 창당 선언문에 담은 '주요 공장 및 광산의 국영 내지 국가관리'와, '계획경제의 확립'에서 입장이 바뀐 것이다.

반면 당시 한국독립당 등 대부분의 정치세력은 귀속재산 국유화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특히 중도파는 통일된 임시정부가 귀속재산을 처리해야 한다면서 미군정이 귀속재산을 불하한다면 친일파, 모리배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반대했다.

적산가옥 사진[사진=bau83카페]
적산가옥 사진[사진=bau83카페]

 당시는 귀속재산자체가  우리 민족의 자산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1946년 2월 농지 · 주택 및 소기업체 매각허용과 대규모 공장 불하를 계획하고, 1947년 들어 불하방침을 확정했던 것이다.

다만 미군정청 시대에는 소규모 업체와 가옥 중심으로 불하되어 귀속재산 가운데 미미한 부분(추정가치의 0.85%)에 불과했다.

이가운데 기업체는 귀속기업체 총가치의 0.5%로 미미했다.

결국 귀속재산 불하의 대부분은 정부수립 이후 이루어졌다.

귀속기업 불하는 6.25 전쟁 중인 1951년~1953년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왜냐면 한국전쟁에 필요한 재원마련을 위해 급한 대로 귀속재산불하 방법을 택했다.

 이후 1955년부터 대규모 사업체 불하가 많아졌다.

 당시 불하 순위는 임차인 및 관리인, 주주, 사원, 농지개혁법으로 농지를 매수당한 자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지주 출신은 별로 없었다.

1946년 말 남조선 과도정부 성립을 전후해서 기업체를 지배하던 임차인 및 관리인이 연고자로 우선권을 받은 경우가 불하의 3/4 이상에 달했다.

불하받은 이들은  1950년대 신흥 자본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큰 문제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정태헌, 2010. 11. 29)에 따르면 귀속재산 불하는 국민자산이 사적자본으로 전환되어 종속적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형성됐다.

더구나  정경유착을 통해 민간 독점자본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시세보다 낮은 불하가격, 분할상환제도, 잦은 상환체납 등을 통해 격심한 인플레 속에서 엄청난 불로소득을 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6.25 전쟁 후에는 액면가를 훨씬 밑도는 가격으로 구입한 (농지개혁 당시의) 지가증권으로 불하대금을 납부해 이중으로 이익을 취하면서 대자본가로 급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한국의 자본가층이 성장하는 데는 이와 더불어 정경유착과 정부의 저환율, 저금리, 중점융자정책이 큰 배경이었다는 지적이 이 때문이다.

1960년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과 자성대 모습이다. 1917년 면화의 재배 및 매매, 면사와 면포의 방직 및 판매, 동일 사업에 대한 투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사진=한민족문화대전켑처]
1960년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과 자성대 모습이다. 1917년 면화의 재배 및 매매, 면사와 면포의 방직 및 판매, 동일 사업에 대한 투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사진=한민족문화대전켑처]

예컨데 유엔의 원조물자를 배정받거나 산업은행 대출을 받은 기업가는 자유당에 10~15%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중에도 6.25 전쟁 당시 정부가 한화(韓貨)로 지급한 유엔군 대여금의 달러 상환액을 늘리기 위해 저환율정책을 실시했다.

그러자 수입 중간재와 자본재의 원가가 낮아져 원조물자가 시세보다 훨씬 싸게 매매될 수 있었다.

 즉 원조배분을 받는 자체만으로도 큰 특혜였다.

 기록들은 삼백산업(밀가루, 설탕, 면)의 경우, 정부가 선정한 실수요자는 대한방직협회, 대한모방협회 등 원료카르텔이었다.

그런데도 협회가 ‘보유시설능력’에 따라 회원기업에 원조물자를 불하했다.

 원료를 독점한 대기업은 저환율로 시가보다 낮은 가격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대기업은 저금리 금융혜택도 독점했다.

전쟁이 끝 난 뒤인  1953년 12월 재정자금이 주요재원인 장기개발금융전담기관으로 창설된 한국산업은행의 금리는, 원조물자나 원조자금의 인수를 지원하는 경우 연 13.87%로 낮게 책정되었다.

적산건물의 하나인 동양척식주식회사[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적산건물의 하나인 동양척식주식회사[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거액융자일수록 낮았다. 

그래서 산업은행의 중점융자 대상이 된 대기업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적산으로 불리는 귀속재산 불하 근거와 상황.

앞서 언급됐듯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간 체결된 '귀속재산처리법 2조 1항'이 있다.

구체적으로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 8 ·15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였던 재산을 뜻한다. 이를 적산(敵産)이라고도 한다.

한.미 정부의 협약의 골차는 8·15광복 후 미군정에 의해 구 일본국 및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한국민에게 이전, 처리하기 위하여 취해진 법적·행정적 조치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귀속재산은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하여 처리되나, 귀속농지는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처리된다(2조 1항).

하지 미군정청장(중장)과 이승만 당시 박사가 1947년 7월 회동[사진= 신수용 대기자db]
하지 미군정청장(중장)과 이승만 당시 박사가 1947년 7월 회동[사진= 신수용 대기자db]

 귀속재산은 귀속재산처리법과 이 법에 의하여 내려지는 명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유 또는 공유재산, 국영 또는 공영기업체로 지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의 국민 또는 법인에게 매각한다(3조).

 이와 같은 지정 또는 매각이 될 때까지는 정부가 관리하고, 정부가 관리하는 귀속재산은 대한민국의 국민 또는 법인에게 대여할 수 있으며, 대여하기에 부적당한 귀속재산은 관리인을 선정하여 관리하도록 한다(24조 ·25조). 

귀속재산에 관한 사무는 지방세무관서가 관장하며, 귀속재산처리에 관한 소청(訴請)을 심의 결정하기 위하여 국세청에 귀속재산 소청심의회를 둔다(37조 ·39조).

귀속재산 가운데 일부 소규모 사업체와 귀속농지는 미군정청에 의해 불하되기 시작했으며, 나머지는 1948년 8월 15일 이후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49년 12월에 제정·공포된 '귀속재산처리법'을 토대로 1958년까지 대부분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다.

8.15 광복 당시 한국내에 있던 일본의 모든 공유 및 사유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규정되어 미군정청의 ‘귀속재산’으로 접수됐다.

당시 접수된 귀속재산은  귀속농지가 약 30만 정보로 우리 나라(남한) 총 경지면적의 약 14%를 차지했다.

6.25한국전쟁당시 피난민들[사진=mi2591켑처]
6.25한국전쟁당시 피난민들[사진=mi2591켑처]

 귀속된 사업체역시  3,551개였다.

그 가운데에는 제조업체가 우리 나라 전체 사업체의 66.3%인  2,354개였다.

불하된 재산은 때 기업체 513건, 부동산 839건, 기타 916건등  2,268건이다.

 나머지는 이후 '한미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에 의해 이승만정권에 넘겨졌다.

 이승만정권은 약 33만 건의 귀속재산을 처리했는데, 그 방법은 일부는 국영·공영 기업체로 지정하고 나머지는 개인·법인에게 매각하는 방식이었다.

이외에도 건물·주택·대지·점포 등의 부동산과 귀금속·유가증권 등의 동산도 상당액 있었다. 

일제 강점기 적산기업의 변신[ 자료=블로그nonepapa]
일제 강점기 적산기업의 변신[ 자료=블로그nonepapa]

귀속재산의 총 가치는 우리 나라 총 자산가치의 약 80%에 이른 것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귀속재산의 관리를 위해 군정청 내에 중앙관리처(中央管理處)를 두고, 각 도에는 지방관재처(地方管財處)를 설치하였다.

 미군정청 직속으로 신한공사(新韓公社)라는 특별기관을 설치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족항일기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소유재산을 비롯하여 막대한 토지재산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귀속농지 외의 부동산과 기타 동산류의 관리는 미군정청내 재산관리처에 의해 해당 소재지 내의 금융기관에 위임됐다.

귀속사업체의 경우에도 재산관리처가 해당 사업체의 고문관이 임명됐다.

이 고문관이 관리인 임명 등 사업체 운영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도록한  '고문관제도'가 신설됐다.

그러나 귀속사업체는 관리 및 운영권을 둘러싼 부정과 부실 경영으로 인한 가동률 저하 등 관리행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도 일어난다.

미군정청은 뒤늦게  고문관제도를 폐지하고 사업체관리권을 미군정청 내의 소관 부서장에게 위임했다.

그러다가 다시 해당 사업체의 이사회에 위촉하는 등 여러 차례의 법령 개정을 시도했다고 여러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미군정청은 1946년부터 소규모 귀속사업체를 민간인에게 불하할 계획을 세우고, 1947년 3월에는 불하를 위한 행정조처를 취하였다. 
그와 더불어 도시지역에 소재한 일반 주택과 귀속선박 및 귀속광산에 대한 불하조처도 취해졌다.

또한, 당시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의 주된 요인이었던 농지소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개혁도 이때 계획된 것이다.

그런데 농지개혁법안이 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자 1947년 9월에 미군정청이 독자적으로 개혁법안을 작성하여 신한공사 관리하의 귀속농지만을 대상으로 분배계획을 세웠다.

이후 1948년 3월 법령 제173호를 공포하여 귀속농지 정리에 착수하였다.

◇…6.25 전쟁 전후의 귀속재산 불하와 몰고온 문제들.

귀속농지는 연간 생산량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할 지불하는 유상분배방법다.

일제시대 문서. 1934년 전주의 “소작계약증서” 앞면이다. 일제시대 조선의 농지 중 86%가 지주 소유였으며 농민의 60% 정도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사진=붇옹산카페]
일제시대 문서. 1934년 전주의 “소작계약증서” 앞면이다. 일제시대 조선의 농지 중 86%가 지주 소유였으며 농민의 60% 정도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사진=붇옹산카페]

해당 농지의 소작인에게 우선적으로 불하되었음은 문제가 없다.

 귀속농지는 미군정 기간 동안 무려 75% 가량이 불하됐다.

이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도 귀속농지 분배사업은 계속되어 붏하 사업이 완료된  1952년 2월까지 91.4%에 달했다.

 귀속재산은 정부수립 후 1948년 9월 11일에 체결된 ‘대한민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의하여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

 정부는 그후 귀속재산 처분을 둘러싸고 국회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등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2월에야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공포하고, 국공유 재산으로 지정된 것을 제외한 귀속재산에 대해 불하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곧이어 6·25전쟁이 발생함에 따라 수많은 재산이 파괴, 유실되어 불하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때문에  본격적인 귀속재산 불하는 휴전 후인 1954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부산 초량 적산가옥[사진=elma-723]
부산 초량 적산가옥[사진=elma-723]

귀속재산 불하사업은 1958년 5월 말까지 총 26만3774건으로 90% 이상의 처리실적을 올리고 완료되었다.

귀속재산은 당시 우리 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가 워낙 막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히 귀속사업체의 경우 생산시설이 좋은 대규모기업이 대부분이었고, 귀속농지도 토질이 비옥하고 생산성이 높은 논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광복 당시 우리 경제의 순환과정은 귀속재산에 의해 주도되다시피 했다.

때문에 귀속재산의 불하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경제적 유산을 처리한다는 점과 광복 후 국민경제의 재건을 담당하게 될 경제 주체를 결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귀속재산 불하는 연고자·종업원·국가유공자 및 그 유가족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불하대금은 일시불을 원칙으로 하나 최고 15년까지의 분할 납부도 가능하였다.

불하가격은 매우 저렴하게 책정됐다.

적산기록[사진=네이버블로그켑처]
적산기록[사진=네이버블로그켑처]

 뿐만아니라 정부에 의한 재정·금융상의 지원과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거의 무상에 가까워 실질적으로 귀속재산의 불하는 엄청난 정책적 특혜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불하과정에서의 부정과 정경유착(政經癒着)과 같은 부조리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건전하고 민주적인 국민경제 건설은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미군정에 의해 계획, 시행된 귀속농지 분배는 정부수립 후 실시된 우리 나라 농지개혁의 역사적 단서를 마련함으로써 농촌경제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자료 문헌=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 편찬회, 2005. 9. 10),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정태헌, 2010. 11. 29),에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참고문헌및 인용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조선경제연보(조선은행조사부, 1948),재정금융의 회고(재무부, 1958), 한국경제론(이종훈, 법문사, 1979), 현대한국경제사(유광호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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