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영 칼럼】  설에 읽는 기인 토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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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칼럼】  설에 읽는 기인 토정 이야기
  • 장석영 언론인
  • 승인 2020.01.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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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언론인(전 서울신문 논설위원.편집국장)
장석영 언론인(전 서울신문 논설위원.편집국장)

해마다 설을 맞이하면 집집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일이 지방에서는 많아진다. 이 비결을 지은 이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기인으로 유명하다. 이 분의 호는 지금은 없어진 서울 마포구 어귀에 토담집을 짓고 살았던 데서 붙여진 것이다. 내 고향인 충남 아산은 토정 선생이 현감으로 근무했기에 그 분에 대한 비사들이 여럿 있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 보면 우리 마을에선 유난히도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언젠가 토정선생이 천안 삼거리에 있는 한 주막에 머르게 되었다. 그 주막에는 마침 한양에서 곧 있을 과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고향을 떠나온 젊은 선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과거급제를 바라고 공부한 사람들이어서 당대 대학자이며 기인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는 토정선생에게서 한 말씀 듣기 위해 토정선생 방으로 모여들었다. 토정은 젊은이들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한 젊은 선비를 향해 "자네는 운이 없으니 서운 하겠지만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시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젊은이는 다른 젊은이들이 자신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민망했던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갔다. 청천병력 같은 토정의 말에 아연실색한 그 선비는 주막을 나와서 대문 옆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시험도 보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향사람들이 못난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고, 그렇다고 대학자의 말을 무시하고 과거를 보러갔다가 정말 낙방이라도 하게되면 평소에 흠모해 오던 토정선생의 말씀을 우습게 아는 놈이 되겠고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선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거니 땅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 수많은 개미떼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도대체 이 개미들은 어디를 향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호기심에 몸을 일으켜 선두에 선 개미의 가는 방향을 따라가 보았다. 가다보니 선두에서 가고 있는 개미가 있는 곳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큰 항아리가 하나 놓여있고, 그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차 금시라도 넘칠 듯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쓰고 버린 허드렛물이 배수 하수관을 통해 항아리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고, 물이 가득차게 되면 독이 기울어져 도랑 쪽으로 물이 쏟아부어지도록 만든 구조였다. 이제라도 부엌 쪽에서 누군가가 물을 버리면 그 독이 기울여져 이동하고 있는 개미들을 향해 쏟이지면 수많은 개미들이 때 아닌 물벼락을 만나 다 죽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는 황급히 뛰어가 구정물이 가득한 독을 힘겹게 옮겨 도랑에다 대고 물을 모두 부어버렸다.

그가 빈 독을 옮겨 제자리에 갖다 두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아래를 내려다 보니 개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긴 행열을 이루어 가던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는 한참 후에 토정선생이 하던 우울한 말씀이 생각나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쪼그리고 앉아 다시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자네,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토정선생이 문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하여 던진 말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니 토정은 그 젊은선비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세히 살펴보더니 흠칫 놀라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는 아까 방에서 내가 낙방을 할 운이니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한 그 젊은이가 아닌가?" 젊은 선비가 그렇다고 하자 토정선생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가 조금 전에 자네에게 얘기를 할 때 본 자네의 상과 지금 보는 자네의 상이 완전히 다르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묻는 것이었다. 젊은 선비가 너무나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고 있자 토정이 재차 물었다. " 잠깐 사이에 자네의 상이 아주 귀한 상으로 바뀌었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을 테니 내게 숨김없이 말씀해 보시게"

젊은이는 개미들을 살리기 위해 항아리를 옮겨 물을 쏟아버렸다는 자초지종을 소상히 말씀 드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토정은 "수백 수천의 생명을 살렸으니 하늘인들 감응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선비에게 "과거를 보러가게 꼭 급제할 것이니 아까 내가 했던 말은 염두에 두지 말고 한양으로 올라가게"라고 말하고는 선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격려한 뒤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젊은 선비는 토정의 말씀대로 과거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한다. 사람의 상도 마음에 의해 뒤바뀌게 마련인가 보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설을 맞으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까지 " 과연 나는 선하게 살아왔는가?" 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덕을 쌓아가며 살자고 다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충남 아산출신. 대전고. 연세대. 서울신문 기자.사회부장,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대안언론인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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