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3)] 6.25 개전초 한강철교 폭파와 명령따라 지휘한 공병감 처형...사후 무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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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3)] 6.25 개전초 한강철교 폭파와 명령따라 지휘한 공병감 처형...사후 무죄 논란.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3.03.2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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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戰爭)발발로  동족상잔의 비극(悲劇)
- 신성모 국방, 채병덕참육본참모총장,지시받고 명령수행한 최창식대령 사형집행
-서울을 사수한다던 이승만 대전으로 피란한 뒤  거짓 방송... 국민 분노.
-숨진 최창식 대령의 부인의 끈질길 노력으로 14년 만에 무죄 받아내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4.19의거, 5.16군사쿠테타와 1.21사태,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현직대통령들의 구속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2021년 5월22일 잠시중단했던 시리즈를 재개한다<편집자 주>

1950년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하자 이승만정부는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사진=네이버이미지켑처].png
1950년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하자 이승만정부는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사진=네이버이미지켑처].png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정확히 1950년 6월 28일이다. 

전날인 6월 27일 초저녁에 정부, 국군 및 국회 사이에서 서울을 사수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 아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있다는 허위 녹음방송에 피란포기한 시민들.

6월 27일만해도 이승만 정부는 ‘전선(戰線)에 이상없다’,‘아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공산괴뢰군은 패퇴중이다’라는 방송과 벽보를 믿고 피난민들은 다시 서울시내로 들어가기도 했었다.

의정부를 탈환한 국군 정예부대는 적을 격퇴시키고, 북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정부의 보도에 엉거 주춤,안도에 기대를 걸었다.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사진=존 리치 촬영].png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사진=존 리치 촬영].png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김일성의 불법남침이 채 사흘도 안걸려, 인민군들의 탱크가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인민군들은 속속 경무대, 정부부처, 수도경찰청, 방송국이 점령되고, 학교도 인민군들이 모두 장악했다. 

그러자 서울용산에서 한강교에 이르는 용산가도는 피난민의 물결이 뒤덮혔다.

이런가운데 이승만과 정부는 국민을 또 속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으며, 우리 국군이 곧 인민군을 물리칠 것이니 국민들, 특히 서울시민들을 걱정말라는 라디오 방송을 계속 틀어줬다.
   

1950년 6월28일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뒤 그해겨울 한강변 얼음위에 부교를 놓고 피난을 떠나는 시민들[ 사진=신수용 닷컴].png
1950년 6월28일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뒤 그해겨울 한강변 얼음위에 부교를 놓고 피난을 떠나는 시민들[ 사진=신수용 닷컴].png

이승만  부부는  이미 임시수도인 대전으로 내려와 대전시 대흥동 퇴미고개의 충남지사 관사로 피난 온 상태였다.

이 라디오 방송은 사전에 이승만이  " 서울은 안전하니 국민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녹음 테이프를  경성방송과 대전방송에 걸어두고 반복해 틀어줬다.

그러니 이 박사(당시는 대통령보다 이승만 박사로 더 통함)와 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피난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지난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승만이 거짓방송을 틀어놓고 서울을 떠나고 이후 최동열기자 (정동환분)가 텅 빈 방송국에서 혼자 돌아가고 있는 테이프를 발견하고 분노하여 때려 부수는 장면이 이를 말한다.
당시 미 국무성이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와 다나카 다쓰오 전 일본 통산성 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각에 이승만 대통령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대사한테 일본 망명 의사까지 전달했다. 

이 내용은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교도통신을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 6.25 전쟁초 국군이 한강인도교,철교 폭파.

한강교에 도착한 시민들은 인도교위에 군데군테 놓인 열 개의 사과 궤짝만한 상자들과, 늘어진 전선을 의심하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운명의 상자’로써,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기위한 다이너마이트가 가득히 들어있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운명을 재촉하듯 27일 황혼이 깃들면서 돌이킬수 없는 민족의 비극을 애도하듯 한강일대는 정적속에 보슬비가 내렸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蔡秉德)소장은 인민군 전차가 서울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1950년 6월27일 서울역을 떠난 마지막열차가 몇시간뒤 폭파되는 한강다리를 지나고 있다[사진=신수용 닷컴].png
1950년 6월27일 서울역을 떠난 마지막열차가 몇시간뒤 폭파되는 한강다리를 지나고 있다[사진=신수용 닷컴].png

그러자 채 소장은 촉각을 다툰다고 판단해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을 불렀다.

최창식 대령은 서울 출신으로 경복고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수재로 알려진 분이다.

채 소장은 공병감 최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고 곧바로 후방인 경기도 시흥으로 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 시간이 역사의 비극인 바로 6.25 전쟁 발발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이다.

1950년 6월 말에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인민군 탱크. 이때 이미 잘못된 정보로 한강 대교는  우리 정부에의해  서둘러 폭파되었다.[ 사진=신수용 닷컴].png
1950년 6월 말에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인민군 탱크. 이때 이미 잘못된 정보로 한강 대교는 우리 정부에의해 서둘러 폭파되었다.[ 사진=신수용 닷컴].png

기관총과 박격포소리와 대포의 요란한 폭음이 심야의 서울의 거리를 뒤흔들고 있을 무렵, 노량진지휘소와 최대령이 이끄는 일개 중대의 공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무렵 공병대에 날아오는 폭파조 전방전초기지의 전황보고는 “괴뢰군 탱크가 출몰했습니다”라는 보초병의 숨가뿐 소식을 전해왔다.

예상보다 2시간이나 빨리 적의 기갑부대가 출현했다는 보고는 최공병감을 당황시켰다.

새벽 두시... 두시반...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났다. 이와함께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했다.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 상태가 됐다.  이날 한강대교폭파로 서울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민간인 최소 500명등 최대 800명이  폭사내지 익사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진실은 분명하지 않다.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사진=kbs 제공].png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사진=kbs 제공].png

단지 군경 77명이 이로 인해 전사를 했다는 정설만 남아았다.

훗날 조사에서 극도의 초조와 초조한 공포속에서 적의 내습을 지키던 초병이 어두움속에서 서울을 철수하는 기병 순경대의 말굽이 아스팔트를 울리는 소리를 적의 탱크소리로 착각, 확인한 사이도 없이 당황한 것이라는 진술이 나와 충격을 줬다.

한 언론사  주한 특파원의 기록에는 민간인 희생은 거짓이라고 들고 있다. 왜냐면 당시 피난민들은 인도교 근처에 설치된 부교를 이용하여 이동중이었다.

 또한 한강 인도교는 헌병에 의한 통제상태로, 폭파 중지명령을 하달하려던 장창국대령조차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이 인도교 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6.25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 나온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표폭파로 발길이 끊긴  국군 병사들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표폭파로 발길이 끊긴 국군 병사들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그런데도 육군본부는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서둘러 폭파하면서 한국정부가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이 증명됐다.

결과적으로  외국군이 오히려 동맹국의 영토를 더 지키려 애쓴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일어난 셈이다. 
처치 준장 뿐 아니라 다른 고문단 장교들 또한 어떻게든 서울을 사수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서울 봉일천 방면에서 국국제1사단과 보병학교부대가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 근교 우이동.미아리. 망우리 방면에서는 제 2사단과 제 7사단이 혈투로 막았기에 이들  우리 국군의 도강(渡江)도 큰 문제였다.

◇ 대전의 충남지사관사로 피란 온 이승만과 정부는 뭘했나

이런 상황속에 당시 대통령이승만,국방부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각료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피난간 뒤였다.

최근 펴낸 충남도사(忠南道史)를 보면 이승만은 한강대교가 폭파되기 전날, 즉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27일 저녁에 대전시 대흥동 퇴미고개의  충청남도지사관저로 피신해 머물렀다.

1950년 6.25 발발 이틀 째인 27일 서울에 있다는 방송을 계속틀어주어 안심시킨 이승만부부는  대전시중구 대틍동 퇴미고개의 충남지사관사로 피신했다[ 사진=네이버블로그 nadreampine켑처].png
1950년 6.25 발발 이틀 째인 27일 서울에 있다는 방송을 계속틀어주어 안심시킨 이승만부부는 대전시중구 대틍동 퇴미고개의 충남지사관사로 피신했다[ 사진=네이버블로그 nadreampine켑처].png

그리고 27일 저녁에 대전 충청남도지사관저에서 이 방송녹음테이프를 제작했다

제작된 이승만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KBS 제1라디오로 방송됐던 것은 밤 10시였다.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이승만과 정부는 전날 이미 피신한 뒤였으며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시민들과 한강 이북에서 싸워온 많은 국군등은 한강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한강이 폭파되는 바람에 옴싹달싹을 못했다.

발이 묶인 국군들은 서울시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로인한 국군 병력, 국군 전략에도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당시의 전황은 북한군 주력은 서울 외곽에 있었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도권 피난민이 몰려오는 대전역 광장[ 사진=네이버블로그 ohyh45켑처].png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도권 피난민이 몰려오는 대전역 광장[ 사진=네이버블로그 ohyh45켑처].png

우리 국군은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반면 개성-문산의 경의선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 1사단 처럼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또한 동부전선의제6,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북한 측 자료에서도 6월 28일 새벽을 기점으로 총공세가 펼쳐져 6시 경에는 전차부대 주력의 서울 진입과 주요 시설 접수가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급한 국군지휘부는 허둥대다가 찾은 선택이 한강대표 폭파였다.

국군지휘부는 이날  새벽 2시 쯤  성북부 미아리의 국군 방어선을 뚫고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전차의 목격했다.

그러자 서울 방어선이 돌파되었다고 착각, 패닉에 빠져 교량 폭파 명령을 내린 것이란 것이 정설이다.

정부와 국회, 서울시민을 모두 적지에 두고 새벽에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왼쪽).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이다..png
정부와 국회, 서울시민을 모두 적지에 두고 새벽에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왼쪽).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이다..png

육군본부는  한강대교 폭파 이전까지 임진강 철교 등 국군의 주요 교량 폭파 시도가 여러 이유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육국본부는 공세 둔화에 실패하였던 이력과 한강 도하를 허용한다는 것의 상징성 때문에 지나치게 조급증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당시 종군기자들의 기록과 증언이 있다.

◇이승만 대전에 피신한뒤 정부의 거짓 방송들.

6월 27일 오후 9시에 했던 이승만의 방송은 기가 막혔다.

이승만은 "적이 서울에 다가오고 있으나 우리는 싸울 것이 전무하다. 그러나 맥아더장군과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고 빠른 시일내에 도착할 것이며 이 좋은 소식을 국민들에게 전한다"고 했다.

6.25 전쟁 초반 HLKI 대전중앙방송국의 모습. 18일 동안 KBS 네트워크의 키 스테이션 역할을 수행한 HLKI 대전방송국은 대전 함락 이후 파괴되고 만다.  [사진=네이버블로그 korcadtv켑처].png
6.25 전쟁 초반 HLKI 대전중앙방송국의 모습. 18일 동안 KBS 네트워크의 키 스테이션 역할을 수행한 HLKI 대전방송국은 대전 함락 이후 파괴되고 만다. [사진=네이버블로그 korcadtv켑처].png

이 방송 내용은  막강하다는 국군이 진격하는 인민군을 막지 못했고 인민군이 서울 교외 가까이까지 진출한 상황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6.25 개전초 국군이 밀리는데도 국군이 승리하는 것으로 발못보도된 신문[ 사진= 동아일보 지면].png
6.25 개전초 국군이 밀리는데도 국군이 승리하는 것으로 발못보도된 신문[ 사진= 동아일보 지면].png
6.25 개전초 국군이 밀리는데도 국군이 승리하는 것으로 발못보도된 신문[ 사진= 경향신문 지면].png
6.25 개전초 국군이 밀리는데도 국군이 승리하는 것으로 발못보도된 신문[ 사진= 경향신문 지면].png

문제는 몇 시간 전에 국방부 보도과와 공보처가 이전 방송은 전부 사기(詐欺)였다.

그 보도 방송에서 행한 의정부 전투에서 아군의 대패를 왜곡해 국민을 속였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한다는 내용도 거짓이었다.

또한 국군이 서울 이북의 현 전선 고수해 적을 막고 있다는 내용, 아승만과 정부가 서울 사수 내용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허위 자료를 냈다..

그러니 이전 방송이 왜곡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맥락을 연결해서 들으면 서울사수로 해석되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서울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충분히 알았던 상태였는데도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을 사수했다',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연달아 하더니 대통령이 직접 '열심히 싸워라, 미군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난처에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네이버블로그milcamp켑처].png
피난처에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네이버블로그milcamp켑처].png

전후 맥락을 연결하면, 북한군에게 밀려서 피난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방송이다. 

이 탓에 북한군의 침략에 공포에 빠졌던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며 대통령과 정부를 불신하게 만든 것이다.

◇한강폭파 명령 받고 이행한 비극의 주인공 육본 공병감 최창식 대령.
 한강교은 두동강이 서울 하늘이 붉게 물들여지면서, 요란한 폭음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국군의 작전은 약 1주일의 여유를 얻었지만 잔인무도한 적의 손아귀에서 무참히 희생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금자리를 빼앗겼다.

6.25 전쟁직전인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소련군 민정사령부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 대표들. 앞줄 오른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오른쪽부터 주녕하 교통상, 박일우 내무상, 최창익 재정상[사진= 네이버블로그 ohyh45켑처].png
6.25 전쟁직전인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소련군 민정사령부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 대표들. 앞줄 오른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오른쪽부터 주녕하 교통상, 박일우 내무상, 최창익 재정상[사진= 네이버블로그 ohyh45켑처].png

이로부터 3개월간 적의 만행과 고난을 받아온 선량한 서울시민들이  하늘 같이 밑었던 정부와 국군의 비인도적이고 무모한 처사에 날카로운 비난과 원성을 아무도 달랠수 없었다.

문제는 이승만의 거짓방송으로 분노가 치솟던 차에  조기에 이뤄진 한강폭파에 대한 국민의 원성과 비난에 못이겨 정부는 한강교 폭파책임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정부는 이에따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부산 임시수도에서 군사재판소에 회부, 사형선고를 내렸다.    

최 대형은 그해 9월21일 부산 외곽 어느 한적한 들판에서  총살을 당한다.

6.25전쟁중에 상부의 지시로 한강철교 폭파를 지위한 공병감 최창식대령[ 사진= MBC켑처].png
6.25전쟁중에 상부의 지시로 한강철교 폭파를 지위한 공병감 최창식대령[ 사진= MBC켑처].png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체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한  고 최 대령은 한강폭파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혼자 지고 만 비극의 재물이 되었다.

물론 최 대령에게 한강폭파를 지시한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 보다 앞서 같은해 7월에  경남하동 전선에서 전사했다.

◇고(故) 최 대령의 억울함을 파헤친 미망인.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고 최창식 대령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철두철미한 군인정신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동료 선후배의 신망이 두텁고,장래가 촉망되던 장교로서 대한민국 국군 창군에 크게 기여했었다.

그는 6.25동란 발발당시, ‘모든 군인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부인 옥정애(당시 25.玉靜愛)여사와 9개월된 병욱(炳旭)군에게 ‘몸조심하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그는 영원한 길을 떠났다.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철모를 쓴 뚱뚱한 인물).png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철모를 쓴 뚱뚱한 인물).png

옥 여사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막연한 불안감속에  육군본부로 달려가는 그를 전송한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모른 채 피난 길에 나서지 못했다.

적치하에서 3개월 동안 옥여사는 국군의 수뇌인 공병감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남다른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했다.

잔인무도한 그들로부터 반동분자의 아내라는 압박속에 어린아들을 보호하며 감시를 피해 이곳 저곳을 숨어다녔다.

오직 남편의 승전만을 믿으며, 개선의 날을 손꼽으며, 기도해왔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시원한 가을 바람과 함께 수백만 서울시민이 그렇게 목메이게 기대하던 환희의 날이 찾아온 것이다.

 9.28일 용감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 열광적인 시민의 환영을 받으려 보무도 당당히 입성했다.

1950년 6월28일  화염에 휩싸인 한강철교[ 사진=네이버블로그ohyh45].png
1950년 6월28일 화염에 휩싸인 한강철교[ 사진=네이버블로그ohyh45].png

옥여사도 환영인파대열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남편은 없었다.

대신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한강교 폭파 책임으로 지난 21일 부산교외에서 사형집행’이라는 신문 뿐이었다.

 옥여사는 이 소식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최대령의 부인 옥여사를 통해 벗겨진 누명작업.

6.25 동란은 단란했던 수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헤일수 없는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버렸으니, 옥정애 여사 자신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남편을 빼앗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더구나 옥여사에게는 가슴이 터지는 슬픔속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무거운 슬픔과 아픔은 ‘사형당한 죄인의 아내’라는 것이었다.

옥여사는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고 육군본부를 찾아가 남편의 처형 경위를 따졌으나,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국방부보통군사법원[사진=방송켑처].png
국방부보통군사법원[사진=방송켑처].png

죄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그 누구도 대꾸하지 않아 슬픔과 고통은 더 크다.
 
하지만 이를 반복하면서 알아차린 것은 남편 최대령은 상관의 명령과 지시로 한강교폭파를 지휘한 사실, 공병감이란 직책과 계급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음을 알게됐다.

때문에 남편의 결백한 성품에다 철저한 군인 정신을 너무 잘알고 믿고 있는 옥여사는 지하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못하고 있을 희생의 재물이 된 고인의 누명을 벗기기위해 죽음보다 더한 고통속에서도 오직  남편의 죄를 벗기기위하여 투쟁하는 것으로 남은 생명을 다바치기로 굳게 결심했다.

1950년 6월 28일 피난길에 나선 군인과 서울시민들이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고립된 모습[ 사진=mbc켑처].png
1950년 6월 28일 피난길에 나선 군인과 서울시민들이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고립된 모습[ 사진=mbc켑처].png

그것만이 지하의 남편을 위한 길이요,남편의 단하나의 혈육인 어린 병욱이를 위해  할수 있는 어머니로서 또한 아내로서의 길인 것이기 때문이다.

옥여사의 이런 애절한 진정도 이승만 정권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4년만에 무죄로 누명벗은 한강폭파 지휘관 고 최창식 대령.

그러나 옥여사의 염원은 변함이 없었다.

옥여사는 형부는 인민군에게 납치당하고 홀로있는 언니와 함께 보람이 있는 날을 고대했다.

4.19의거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자,기회가왔다고 판단한 옥여사는  4촌오빠 옥창남변호사와 의논하여 남편 누명을 벗겨달라는 진정사를 정부에 냈다.
옥여사가 손수 쓴 재심청구진정서를 1960년 5월20일  등기우편으로 국방부에 부쳤다.

그러나 그후 서류조사를 하고 있다는 풍문만들렸을 뿐 안타깝게도 판결을 기다리는 옥여사의 심정을 외면한채 민주당정권에서도 피눈물의 호소에 답을 주지못하고 5.16을 맞았다.

옥여사가 비명에 간 남편을 위한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위해 나선지도 십여년이 지났다. 

군사법원 상징ci[사진=방송켑처].png
군사법원 상징ci[사진=방송켑처].png

옥여사는 용기를 잃지않고 다시금 진정서를 썼다.

구구절절이 십여년간 한결같이 남편의 무죄를 믿고 그 누명을 벗기기위한 염원과 애절한 호소를 담아 험난한 가시밭길과 같은 길로 달렸다.

그때마다 사촌 오빠인 옥변호사와 상의해 진정서를 국방부에 보냈다.

그러나 군정이 민정으로 바뀌고, 또 한해가 바뀌어도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지칠대로 지친 옥여사는 거의 체념에 가까운 심경으로 세월만 헤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서울 명륜동 자택에 기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사모님, 드디어 최대령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제 부군의 누명도 벗겨지고, 정부가 그간의 정신적. 물질적인 손해에 대한 배상도 받게됐습니다”

상부의 지시로 한강철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사형이 집행된뒤 14년만에 무죄로 누명을 벗었다[ 사진=MBC켑처].png
상부의 지시로 한강철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사형이 집행된뒤 14년만에 무죄로 누명을 벗었다[ 사진=MBC켑처].png

옥여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기자들과 달려온 친지들의 축하에 말을 잊고 눈물만 흘렸다.

1964년 10월27일, 최 대령이 사형된 지 만 14년만에 옥 여사의 손에 누명도 벗겨져 고인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됐다.

당시 신문을 보면 옥여사는 그 감회를 이렇게 전했다.

“모두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정말로 너무나 큰, 그리고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빌면서 기다려온 기쁨이기에 모든 사람에 고마움과 감사를 올릴 뿐입니다. 이에 모든 슬품도 괴로움도 다 잊을수 있습니다.그분도 평안히 눈을 감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병욱이와함께 우리도 외롭지 않게 살아가겠습니다.”   

6.25 한국전쟁발발속에 이승만정권에 대한 불신이 높아가자  엉뚱하게 한강폭파 지휘관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전가해 사형에 처한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

▶▶참고자료 문헌=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 편찬회, 2005. 9. 10),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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