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0)] 6.25 발발 3개월 만에 감격의 서울 수복...중앙청 태극기 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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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0)] 6.25 발발 3개월 만에 감격의 서울 수복...중앙청 태극기 게양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3.05.2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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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9.16 인천수복→9.28 서울 수복→북진 
-한미해병대 수원, 경인가도등서 승전보...인민군 주요요새인 영등포에서 치열한 전투
-13일에 걸친 수도권지역 시가전끝에 9월 27일 새벽한국해병대 장병들 중앙청 태극기게양 
-박정모 해병소위의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양병수 이등병조·김칠용 견습해병·최국방 견습해병 넷이 태극기 게양
-29일 맥아더 일행, 이승만등 정부인사도 서울 도착...9월29일 환도식
3개월 만에 되찾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해병대 장병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3개월 만에 되찾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해병대 장병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했다.

수도 서울 수복이란 감격을 넘어 조국의 소중함을, 그리고 치를 떤 조선민주주의 인민군공화국( 인공. 人共) 치하에서 석달동안 버틴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했을 뿐 낙동강까지 쫒고 밀리던 국군.유엔과 인민군간의 공방은 전국의 산하 곳곳에서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수복...서울 수복 교두보확보.

앞서 전했듯이 같은 달 15일 국군과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면서 그간 열세였던 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맥아더 원수가 손수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유엔군은 월미도(그린 비치), 인천 북쪽(레드 비치), 인천 남쪽(블루 비치)를 설정해 감행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중인 미 해병들[ 사진=6.25 전사].png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중인 미 해병들[ 사진=6.25 전사].png

유엔군은 인천 상륙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군산에 특공대를 상륙시키고 삐라를 살포했고,, 항모와 순양함을 동원해 남포와 달양도를 공격했다.

이어  미주리의 삼척 포격, 장사동 상륙작전등 기만작전을 펼치며 상륙지점을 정확히 알수 없게 하였다.

 인민군 사령부역시 유엔군이 곧 상륙을 할것이라 판단해 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중공군수뇌부가 유엔군이 인천이 아니면 진남포에 상륙할것이라 판단했으나. 김일성은 낙동강 총공세에 몰두하고 있어 인천에 대한 방어조치도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인해 무엇보다 수도 서울탈환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리에 수행한 국군과 유엔군은 여세를 몰아 서울로 진격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먼저 인천 진입에 성공했다.

이어 곧바로 주둔 중이던 인민군을 소탕해 나갔다. 

그 결과 인천은 상륙 다음날인 16일 아침에 인공 치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인천 수복 과정에서 인민군의 저항이나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인천상륙작전 (2015년 한국국사).png
인천상륙작전 (2015년 한국국사).png

이러한 이유로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다.

 비전투 사상자를 포함해도 부상자가 188명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이후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부대는 인천 수복에 성공하자마자 바로 역할을 분담한다.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는 경인가도의 북쪽, 1연대는 남쪽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며 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 수비에 전념한다는 계획이었다.

 5연대와 1연대는  9월 17일 오전 내륙으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다음 날인 18일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며 영등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뒀다. 

인민군은 인천 방면의 증원을 위해 T-34-85 전차와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이 증원 병력이 부평 근방의 경인가도에서 오히려 미리 매복한 미 해병대에게 궤멸 당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제서애 김일성은 인천이 주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김일성은  경인가도에 지뢰를 엄청나게 부설하는 한편, 낙동강 전선을 향해 대전 이남인 김천시까지 남하했다가 급히 진격방향을 바꿔서 다시 올라온 인민군 9사단 87연대가 필사적으로 영등포를 방어하게 했다.

◇···본격 서울 탈환에 나선 국군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

영등포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서울로 동원할 수 있는 인민군의 2선급 부대를 모두 동원하며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는 듯 했다.

서울 탈환 시가전중인 국군들[ 사진=6.25 전사].png
서울 탈환 시가전중인 국군들[ 사진=6.25 전사].png

하지만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중공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의 주요 정예부대는 극히 일부만 빼내서 서울로 올렸다.

때문에 병력에서나 장비에서나 국군과 유엔 상륙군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이와달리 인천 상륙작전의 선봉에 선 미국해병 제1사단과 국군해병대는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다.

그 일부는 영등포와 여의도비행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 방면을 공격, 서울의 동쪽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역시 일부는 시흥·안양·수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9월 19일 행주 방면에서 강습도하를 감행한 한·미해병대는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이어 21일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안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했다.

당시 6.25 전사등에 의하면  한·미해병대는 인민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함재기와 포병의 강력한 화력지원하에 돌격을 감행, 9월 24일 오후 연희고지를 점령하였다.

서울 탈환작전중인 국군과 유엔군[ 사진=6.25 전사].png
서울 탈환작전중인 국군과 유엔군[ 사진=6.25 전사].png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 부근에서도 한강도하작전이 이루어져 미군은 서울 남산·왕십리 방면을 제압하고, 국군은 망우리 일대를 탈환하였다.

이같이 북쪽의 의정부 방면을 제외하고 서울 시가지를 3면에서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 밤이 깊어가면서 점차 서울 중심부로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경인가도 남쪽으로 향했던 미 해병대 1사단 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됐다.

서울 탈환에 나선 국군. 시가전을 위해 진격하는 장병들 사이에 태극기를 든 모습이 보인다[ 사진= 6.25 전사].png
서울 탈환에 나선 국군. 시가전을 위해 진격하는 장병들 사이에 태극기를 든 모습이 보인다[ 사진= 6.25 전사].png

이 때가 9월 20일이었다. 영등포 점령에 나선 미 해병대 1사단 1연대는 포병대와 항공기의 맹폭을 하루 내내 지원받았으나, 인민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다음 날인 9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영등포 서북측(현재의 양평동, 당산동 방면)과 서남측(현재의 문래동 방면)을 향해 각각 호킨즈 대대와 사타 대대가 공격했으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호킨즈 대대는 안양천을 건너지도 못했으며, 사타 대대는 영등포 남쪽 고지에서 받는 포격으로 인해 안양천을 건너는 데만 85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시가 중심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1선 독려를 돌고 있던 호킨즈 중령이 영등포 적진지를 상세히 정찰해 보았더니 시가 중앙부(현재의 영등포 로터리)에 인민군이 거의 배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민군 요새 영등포의 시가전과 한.미해병대의 맨 처음 영등포 장악.

 호킨즈 중령은 예비병력인 에이블 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하였다.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 대장으로부터 유엔기를 받는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왼쪽.1950. 7. 15)[ 사진=6.25 전사].png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 대장으로부터 유엔기를 받는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왼쪽.1950. 7. 15)[ 사진=6.25 전사].png

에이블중대는 돌격태세를 갖추어 쏜살같이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약 600미터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현재의 영등포구청 사거리)에 다다른다.

 이 과정에서 중대는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고 정찰한 결과대로 영등포중심부에는 한 사람의 인민군도,물론 민간인도 없었다.

 6.25 전쟁당시 에이블 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중대의 좌우 후방에서는 격심한 총성이 나고 있는 반면 영등포 중심부는 죽음의 거리처럼 조용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좌우후방의 총포성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음에도 호킨즈 대대장은 에이블 중대에 "개의치 말고 계속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에이블 중대장은 잠시 인민군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명령이 있기에 동쪽으로 계속 밀고 나갔다. 

중대는 서울 방면에서 구보로 증원해 온 수십 명의 인민군병사를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궤멸해 버린 후 정오 경에는 영등포 시가의 동쪽 끝에 진출한다.

 그곳에는 경부국도가 동서로 뻗어 있었으며, 중대는 이 도로 제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영등포 시가 중심부, 북쪽으로는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이 곳에서 진지공사를 하면서 병사들은 인민군의 공격이 있을까 가슴을 졸였으나 인민군은 시가지 양단의 전투에 몰두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날 오후 늦게 북한군 소부대가 정찰적 공격을 해왔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시켰디.

이때 진지 남쪽 300미터 정도에 있었던 인민군 탄약고를 폭파해 버렸다.

 저녁 무렵에는 인민군은 5량의 T-34 전차가 시가 중앙 쪽에서 나타나 진지에 공격을 가해왔다.

서울 수복후에 본 폐허의 서울시내[ 사진=6.25 전사].png
서울 수복후에 본 폐허의 서울시내[ 사진=6.25 전사].png

이 때 나머지 보병들은 개인호에 엄폐하고 바주카병들만 응전하여 2량을 완파, 2량을 반파시켜 격퇴했다.

밤부터는 인민군의 야습이 개시됐다. 이날 밤  4차례에 걸친 야습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중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물리쳤다.

이가운데  네번 째 야습에는 진지 앞 10미터 정도까지 유인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여 인민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민군이 민간인 가옥 뒤에 숨어 5회째의 야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웹 하사가 몰래 접근하여 훈시 중인 지휘관을 저격한다.

 5차 야습은 함성을 지르는 것만으로 끝났다. 날이 밝고 보니 인민군은 퇴각하였으며 제방 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1연대는 그것으로 영등포 점령을 완료하였다.

한편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영등포의 남쪽, 현재의 관악구.구로구 일대의 북한군을 완전히 소탕했다.

경인국도의 북쪽을 맡은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는 국군 해병대 1연대와 함께 내륙으로 진격했다.

한.미 해병대는  9월 18일 가까스로 김포비행장을 확보했다.

이후 행주나루를 거쳐 9월 20일에는 인민군이 농성하던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이 모래내(홍제천 일대)에 진출한 것은 9월 21일 저녁때다. 

◇··· 서울로의 진격위한 서벽 전투.

이 때만 해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다음 날이면 서울을 탈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서울 시청을 앞에 두고 진지를 구축해 시가전을 벌이는 미 해병대원들[ 사진= 6.25 전사].png
서울 시청을 앞에 두고 진지를 구축해 시가전을 벌이는 미 해병대원들[ 사진= 6.25 전사].png

그러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무악재 산계. 높이 296m의 안산(安山)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금화산(105m), 노고산(105m), 와우산(105m) 일대로 이어졌다.

이 산계는 지금은 건물이 밀집하여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60~100m 정도의 산맥과 계곡이 북한산 구파발부터 마포 용강동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수직으로 수없이 연이어 있는 지형이다.

그래서 인민군의 천연요새였다. 미해병대는 당시 이 금화산, 노고산, 와우산을 각각 105북고지, 105중고지, 105남고지라고 불렀고 작전계획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은 이 곳에 군사연습용의 각종 토치카, 교통호, 개인호 등을 구축하여 군사 훈련을 진행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인민군은 서울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서울 주위의 산들과 시가지 안에 진지구축을 개시했다.

이 때 무악산 일대를 방어한 인민군 부대는 독립 25여단과 독립 78연대였다. 

25여단은 낙동강 전투에 파견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중 급거에 서울 방어명령을 받고 배치된 부대로, 총원은 약 2,500명이었다.

이 부대는 보병 2개대대, 중기관총 4개대대, 공병 1개대대, 76mm 포 1개대대, 120mm 박격포 1개대대를 기간으로 한 특이한 편제였고 방어 전문 부대였다.

9월 22일 아침 미 해병 제5연대와 국군 해병 제1연대가 서울 서벽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중구일대에서 벌이는 한미 해병대원들[ 사진=6.25 전사].png
서울 종로구. 중구일대에서 벌이는 한미 해병대원들[ 사진=6.25 전사].png

당시 기록을 보면  제1대대가 105남고지를, 제3대대가 안산에서 105북고지까지를 맡고 국군 해병 제1,2 대대가 연희104고지를 맡았다. 

여기에 인천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F4U 콜세어가 공중지원을 하여 일대에서는 혈투가 벌어졌다. 

그 날 미 해병 제3대대는 가까스로 안산 산정을 점령했으나 금화산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국군 해병대는 연희산을 탈취하는 데 실패했다. 

미 해병 제1대대는 오후 5시 30분에 와우산 고지를 탈취했다가 다음날 낮 인민군의 결사적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고 만다.

 국군 해병대는 악전고투끝에 이틀 후인 24일에 결국 연희104고지와 능선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후반의 고지전의 예고편격인 이 전투는 25일 미군 지원부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 남쪽 압박에 참여하며 승리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앞서 구로,관악 일대를 평정한 후 사평리(현재의 서초구 잠원동 일대)까지 진출했다.

그러는 동안 7사단장인 알몬드 소장이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에 따라 국군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25일 새벽 서빙고 나루를 건넜다.

1950년 9월 피난에서 돌아온 서울 시민들이 폐허가된 집터를 보며 망연자실하는 모습[ 사진= 신수용 닷컴].png
1950년 9월 피난에서 돌아온 서울 시민들이 폐허가된 집터를 보며 망연자실하는 모습[ 사진= 신수용 닷컴].png

오후에는  남산과 장충단 일대도 점령했다.

 철옹성같은 서벽에 비해 남벽의 수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영등포를 점령한 미 해병 제1연대도 25일 아침 밤섬을 거쳐 서강나루에 상륙했다.

병력의 증원과 그에 따른 인민군의 수비 분산에 따라 고지들이 하나씩 점령되었다.

25일 오후에 접어들며 인민군의 서벽 방어선은 거의 허물어졌다. 

이 때 인민군의 패주를 결정적으로 만든 것이 M4 셔먼 전차의 개량형 전차들이다. 

M4 셔먼 전차, 화염방사전차들이 인민군의 토치카들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불도저 전차는 아예 참호를 생매장시켰다. 

이는 미군이 태평양 전쟁의 전훈을 십분 활용했다.

25일 저녁 무렵에 한미 해병대는 마포구 전차종점과 용산역을 거쳐 삼각지 근처까지 진격했다.

◇··· 본격 서울도심지에서 피아간 격렬한 시가전 

9월 26일 아침, 남산을 점령한 미 육군 32연대는 계속해서 흥인지문, 낙산 일대를 점령해 나갔다.

6.25 동란 발발 3개월에 되찾은 서울시내  지하 땅굴에 숨은 인민군 잔당과 시가전을 벌이는 국군과 종군 기자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 동란 발발 3개월에 되찾은 서울시내  지하 땅굴에 숨은 인민군 잔당과 시가전을 벌이는 국군과 종군 기자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용맹한 한국 육군 17연대는 훨씬 더 동쪽으로 가서 용마산 고지 일대의 인민군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 안의 탈환 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이 담당했다.

 미 해병 1사단  제1연대는 용산 삼각지에서 서울역-서울특별시청 방면을 향했다.

 국군 해병 제1연대역시  서울역에서 갈려 남대문시장-한국은행-소공동 방면으로, 미 제5연대는 금화산을 넘어 서대문형무소-독립문-서대문네거리-광화문-세종대로 방면으로 진격했다.

미해병 제7연대는 사직동 뒷산을 넘어 경복궁과 중앙청 방향으로 직행했다.

 미 해병들은 위에서 말한 줄기 격인 도로만 따라 선(線)의 전진을 한 것이 아니라, 가지에 해당하는 대로 주변의 골목을 다 소탕하고 주요한 거점은 점령하는 면[面]적인 점령을 해가면서 부채살 형태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의 시가전은 바리케이드전투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민군은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주요 도로 요충지에 2-300미터의 간격으로 전진 방해용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흙을 담은 가마니와 돌과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 올려 만든 이 바리케이드 주변에는 적의 지뢰가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길 양쪽의 2,3층짜리 건물을 토치카로 해서 박격포와 기관총, 저격수를 깔아두었으니 접근이 매우 곤란했다.

본격 시가전과 중앙청앞 도로에 친 국군과 미군 바리케이드. 경무대와 중앙청을 앞에두고 서울 시청일대에 쳐진 한국군과 미해병이 쌓은 진지[사진=6.25 전사].png
본격 시가전과 중앙청앞 도로에 친 국군과 미군 바리케이드. 경무대와 중앙청을 앞에두고 서울 시청일대에 쳐진 한국군과 미해병이 쌓은 진지[사진=6.25 전사].png

이에 대응하여 미 해병대가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적의  전차와 보병이 바리케이드 주변의 저격수와 기관총을 무력화시키면 공병들이 뛰어 들어 지뢰를 제거했다.

그 후에 전차가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서 진격로를 열었다.

이런 방법으로 바리케이드 하나를 돌파하는데 평균 1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천천히 한미 연합군은 서울을 점령해 나가서, 26일 밤에는 서울 시가지의 절반을 점령하면서 인민군의 저항은 기가꺾였다.

이후 그 다음날인 27일 새벽 3시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접근해 이날 새벽 6시10분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박정모 해병소위가 이끄는 국군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양병수 이등병조·김칠용 견습해병·최국방 견습해병 넷이 명령을 어기고 중앙청으로 진입,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사진= 6.25 전사].png
박정모 해병소위가 이끄는 국군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양병수 이등병조·김칠용 견습해병·최국방 견습해병 넷이 명령을 어기고 중앙청으로 진입,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사진= 6.25 전사].png

당시 작전 계획상 유엔군이 중앙청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모 해병소위가 이끄는 국군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양병수 이등병조·김칠용 견습해병·최국방 견습해병 넷이 명령을 어기고 중앙청으로 진입,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당시 미 해병대가 서울 시내의 빌딩을 점령할 때마다 성조기를 달았는데, 일제 지배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시점에서는 다른 나라 국기가 한국 정부청사에 게양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상황을 주요일정대로 나타낸 한국교과서(2009년 제작).png
6.25 전쟁상황을 주요일정대로 나타낸 한국교과서(2009년 제작).png

27일 밤 서울 일대의 인민군이 전부 후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막을 내린다.

 인천상륙작전후 인천수복과 서울 수복을 하기까지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이었다.

그 대신 인민군 1만 5000여 명을 사살하고 포로 6000여 명을 획득했다.

서울 탈환 이틀 뒤 손원일 소장(한국 해군제독)은 한국군 최선임자로서 공식 포고문을 발표했고, 포고문은 백지에 붓으로 쓰여져 서울 시내 곳곳에 붙었다.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당시의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한국 해병대에는 훈련소가 있는 제주도 출신 장병들이 많았다. 

이들은 처음 서울 시내에 와서 시가지나 노면전차 등을 매우 신기해하며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유엔군에선 '전투 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매우 용맹한 군인들'이라고 오해(?)했다고 한다.

또한 시가전 도중 덕수궁이 잿더미가 될 뻔한 일도 있었다. 인민군이 덕수궁 일대에 집결했다는 걸 관측한 미군이 포격을 가하려 했다. 

9.28 수복후 환도한 서울의 경복궁인근 종로일대가 폐허로 변한 모습[ 사진= 한국국사교과서 2015년 ].png
9.28 수복후 환도한 서울의 경복궁인근 종로일대가 폐허로 변한 모습[ 사진= 한국국사교과서 2015년 ].png

그러나 당시 포병 부대 지휘를 맡았던 미군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덕수궁이란 귀중한 문화재를 파괴하는 건 양심에 어긋난다며 상관을 설득해서 포격을 연기했다.

인민군이 덕수궁에서 을지로와 태평로 쪽으로 빠져나간 뒤에 포격을 가했다.

 이후 1996년 한국 정부는 딜 중위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비슷한 내용으로, 일본 주재 대표부 공사였던 김용주는 맥아더에게 경복궁, 남대문 등 중요 문화재에 대한 공중 폭격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서울 시내의 주요 문화재들은 대부분 화를 면했다.

이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한 후 1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 지 3개월만에 서울을 완전 수복했다.

이 기세를 몰아서 한국군은 38도선을 넘어서 통일을 목표로 북진을 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9월28일 정오에 서울 수복 석달만에 처음 중앙청에 들어와 차에 내리면서 도열해 있는 정부관계자및 경호책임자등과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6.25 전사].png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9월28일 정오에 서울 수복 석달만에 처음 중앙청에 들어와 차에 내리면서 도열해 있는 정부관계자및 경호책임자등과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6.25 전사].png

서울시와 경찰은 서울이 완전히 탈환된 28일 낮부터 시정을 재개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시설을 급속히 복구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과 일행이 도쿄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이승만 대통령 일행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함께 서울시내로 향하였다.

◇··· 이승만의 환도와 서울 환도식

 수도 서울 환도식은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고, 이로써 3개월간 북한의 점령하에 있던 수도 서울은 탈환되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직후 환도식이 열렸다.

하지만 9월 29일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으나 의장대와 군악대가 참석하지 못했다.

서울 수복후 이승만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중앙청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6.25 전사].png
서울 수복후 이승만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중앙청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6.25 전사].png

원래대로면 해병대에서 군악대가 왔어야 했는데, 전투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보니 군악대가 죄다 소총부대로 전환, 전선에 투입되어 잔적 소탕을 하느라 환도식 행사에 참석하질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병력이 태부족인지라 비전투요원까지 죄다 소총병으로 전용한 것이다.

미군들도 악기들도 죄다 도쿄에 두고 와서 환도식 행사 때는 그냥 군악대와 의장대 없이 진행했다라고 전한다.

인천항에 서있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원수의 동상.png
인천항에 서있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원수의 동상.png

에피소드이긴한데, 원래 해당 행사에서 맥아더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줘야했으나, 만들 곳이 없어서 타이프로 찍은 표창장 사본만 수여했다.

훗날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장기영씨(한국일보 발행인)가 일본 도쿄까지 건너가서 직접 맥아더에게 훈장을 줬다고 하는데, 정작 맥아더 기념관에는 실물이 없다.

▶▶자료출처=6·25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한국전쟁(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전투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대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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