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2)] 현충일과 유엔 승인받은 3.8선 돌파... 평양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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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2)] 현충일과 유엔 승인받은 3.8선 돌파... 평양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3.06.0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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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9.16 인천수복→9.28 서울 수복→3.8돌파→평양점령 
- 맥아더, 김일성에게 항복권유문...이승만 무력으로라도 남북통일주장
- 서울수복으로 사기충천한 국군...3.8 돌파 유엔승인 기름부은듯
- 서부 유엔군, 중부 7, 8사단, 동부 3사단의 주공으로 3.8선 돌파와 평양진격
- 김일성 10월 소련과 중공에 원병요청...소련은 거부하고 중공은 지원결정
1950년 10월 평양점령후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평양시민들[ 사진=이승만 전기].png
1950년 10월 평양점령후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평양시민들[ 사진=이승만 전기].png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현직 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미 1군단 배속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한국군 2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1950년 10월 18일부터 10월 20일까지 평양시를 탈환하기 위해 치른 전투다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을 수복(收復)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경무대로 돌아왔다.

반면 북한군(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북한의 수도 평양후퇴한 뒤 전면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사진= 신수용 닷컴].png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사진= 신수용 닷컴].png

김일성의 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10월 총공세작전을 퍼트리자, 이전까지 승리하려고 최대한의 전투부대를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던 터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중공이 상륙작전 정보를 북한에 미리 얘기해 주어서, 김일성도 나름의 대비를 하려고 경기도 일대의 부대 조정했다. 

중공 마오쩌뚱은 당시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빠르면 10월말 원산이나 군산상륙작전설을,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는 11월말 인천상륙작전설을 주장하는 등 김일성에게 혼선을 줬다. 

 하지만 이를 노린 맥아더는 북한의 예상을 훨씬 앞당긴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어 전국의 대구.대전.청주.수원등 주요도시를 되찾게 되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했다.

◇···3.8선돌파 유엔에서 합법화...맥아더, 김일성에 항복권유문 전달

석달만에 서울로 돌아온 대통령 이승만은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했다.

강원도 양구지역 한마을을 둘로 나눠놓은 3.8선 [ 사진= 신수용 닷컴]
강원도 양구지역 한마을을 둘로 나눠놓은 3.8선 [ 사진= 신수용 닷컴]

 9월29일 중앙청앞에서 열린 수도환도식에서도 이승만은 우리 국군에게 3.8선 돌파를 공개적으로 명령했을 정도다.

하지만 사실상 국군통수권은 대전전추때 미군에 넘긴터라 이같은 명령은 선언적일 뿐이었다.

3.8선돌파 문제에 대해 영국.호주.필리핀, 네델란드.노르웨이, 브라질 쿠바, 파키스탄등 8개국은 이승만의 명령을 묵인했다.

이들 나라는 '한국이 안전상태를 모든 행동을 취할 것'과 '한국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 한국에서 급속히 부흥을 도모할 것', '이 규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상으로 한국에 주둔하지 않을 것''한국통일과 부흥을 위해 유엔 한국위원회를 새로 임명할 것'을 밝혔다.

3.8 선 돌파에 큰 공을 세운 유엔 특전사장병의 수송또는 적전차 폭격 전투기[ 사진=6.25 전사].png
3.8 선 돌파에 큰 공을 세운 유엔 특전사장병의 수송또는 적전차 폭격 전투기[ 사진=6.25 전사].png

그러자 소련은 전쟁중지와 유엔철수, 한국내 선거실시를 들고 나왔다.

이들 8개국의 결의안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47대 5로 통과됐다.

한국의 유엔 대표인 부여출신 임병직(林炳稷)외무부 장관은 소련의 주장에 북한의 선거는 환영하지만 한국의 선거는 반대한다라고 연설했다.

 이로써 유엔군은 3.8선 돌파가 합법화됐다.

3.8선돌파에 앞서 맥아더는 9월 30일  김일성에게 항복권유(권고)문을 보냈다 

"북괴군 총사령관에게. 귀관의 군대는 조속하고 전면적인 패배를 당하여,잠재적 전투능력의 완전섬멸이 불가피하다.  유엔의 모든 결정을 수행하는데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최소화하기위해 유엔군 총사령관의 입장에서 귀관과 더불어 한국의 여하한 지역에 있는 것을 불문하고 군사적 지시에 따라 무기를 버리고 적대행위를 정지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귀관의 감독하에 있는 모든 유엔군 포로와 비전투원 억류자를 석방하고 가호와 가료와 급여 및 내가 지시하는 지점에의 즉시 수송에 충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북괴군에 대해 유엔군 수중에 있는 포로를 실행가능하다면 즉시 귀가하도록 허가하겠다. 나는 귀관의 이 이상 무용한 출혈과 재산파괴를 히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조속히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맥아더의 항복권유문을 받은 김일성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는 3.8선 이남 공산군에게  될수 있는한 무기를 들고 이북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군, 유엔군 3.8선 돌파...국군의 날이 된 이유

3.8선 돌파명령은 사기 충천한 국군에게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승만과 맥아더.[사진= 신수용 닷컴]jpg
이승만과 맥아더.[사진= 신수용 닷컴]jpg

초가을인 10월 1일과 10월 2일 국군과 유엔군이 이와 동시 38도선을 넘어 북진에 들어갔다.

동부전선에서 수도사단은 10월1일 3.8선을 돌파했다.

이날을 기념해 10월1일이 국군의 날이 됐다.

우측에서 3사단과 병행해  강원도 인제, 고저를 거쳐 신고산- 원산전선을 장악했다.

3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원산을 향해 양양-간성-고성을 거쳐 장전을 통과해 원산을 취하는 길로 진격했다.

중부전선 2군단산하 7사단이 화천- 김화-평강을 거쳐 이천에서 갈라져 7사단은 성천-순천의 진격로를 취하고 8사단은 양덕-덕천으로 진출하고, 6사단은 서울에서 가평-화천을 거쳐 양덕으로 가는 길을 취했다.

서부를 담당하던 미제 9사단은 전라-충청-경기- 인천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제 1기갑사단을 앞세운 미 제1군단은 경의 본선과 신계, 시변리로 향했다.

이후 김천-신박- 사리원을 거쳐 평양을 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로써 서부-중부-동부를 모두 장악한 아군은 평양진격에 나선다.

적군의 경우 분산된 병력을 수습해 장전능선에서 저항했으나 3사단 22연대에 의해 섬멸됐다.

평양진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들이 인민군의 포격에 은폐하는 모습[사진= 네이버블로그 red4265  켑처].png
평양진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들이 인민군의 포격에 은폐하는 모습[사진= 네이버블로그 red4265 켑처].png

10월 5일 3사단은 장전시내를 접수하고 평양으로 향했다.

동해안의 3사단이 북진하는 동안 서울에 입성했던 국군 8사단은 10월 7일 동두천을 탈환하고 9일에는 연천을 되찾았다.

이튿날 철원에 돌입하자 1개 사단의 인민군이 완강한 저지작전을 펴 점령하자 인민군은 이천으로 도주했다.

10월 9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탈환을 위해 연천군 고랑포를 출발, 황해도와 평양 주변의 북한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다급해지자, 소련과 중공에 직접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평양을 사수하던 조선로동당은 북한군과 함께 평양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김일성의 도움 요청에 소련의 스탈린은 직접 지원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회의 끝에 개입을 결정한다.

◇···평양 진격나선 국군과 유엔군협공...김일성 소련.중공에 지원요청

10월10일, 인민군 5개 사단은 이날 새벽부터 원산을 향해 3면에서 포격을 퍼부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후 북진을 준비중인 국군과 미군이 장비 등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미국기록보존소 제공].png
1950년 9.28 서울 수복후 북진을 준비중인 국군과 미군이 장비 등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미국기록보존소 제공].png

지경리로 우회진출한 3사단 26연대는 여왕산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여기를 점령, 확보했고 소재봉을 향해 진격했으며 22연대는 원산을 점령했다.

동부전선의 진격부대가 원산을 점령하는 동안, 중부의 국군과 경의선을 따라 승승장구한 유엔군은 평양으로 향했다.

인민군은 3.8 선을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월등히 앞선 유엔군의 화력앞에서는 무참히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은 자신들의 목표가 평양이 아닌 해주시~남포시임을 알게 되어 밀번 1군단장을 찾아가 우리가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밀번 1군단장은 미 전차중대 하나를 배속,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미 24사단과 임무교대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10월 14일 신계를 거쳐 16일에 수안까지 도달한다.

10월 17일 미 1군단의 양익을 맡은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외곽방어선이 있는 황주∼율리선까지 진출했다.

이어 미 1군단은 10월 18일을 기해 평양 포위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한편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별도로 강동 쪽으로 우회해 대동강 북쪽 모란봉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국군 2군단 소속 6, 7, 8사단은 평양 동쪽에서 계속 북진 중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 미 1기병사단이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3][4]이에 정일권은 한국군 2군단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함으로서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평양 방면으로 방향을 튼다.[5]

9.28 수복후 고궁 뜰에 차려진 미해병대 주둔지[ 사진= 6.25 전사].png
9.28 수복후 고궁 뜰에 차려진 미해병대 주둔지[ 사진= 6.25 전사].png

10월 18일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이 평양 포위를 전개하며 선교리 일대에서 진격했다.

그런 와중 대동강 상류 쪽에선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2군단 7사단 8연대가 도하를 준비했다.

무엇보다 8연대는 이날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에서 유재흥 2군단장과 신상철 7사단장이 평양을 먼저 점령하라는 작명서와 함께 트럭 20여대를 지원받아 차량화보병 상태로 달려온 상태였다.

이 덕분에 오후 5시 8연대 9중대가 먼저 평양에 입성해 김일성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후 8연대의 본대가 1사단 작전지 내로 침범해 들어왔다.

◇···평양 점령놓고 백선엽의 국군 1사단과 신상철의 국군7사단 대치

이때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후 9시경 백선엽 1사단장으로부터 "당신, 여기 왜 왔냐"라는 의문 섞인 추궁을 받았으나 이에 잔적들을 추격해 왔다며 둘러댔다. 

국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기 나온 시민들[ 사진=6.25 전사].png
국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기 나온 시민들[ 사진=6.25 전사].png

이 와중 8연대의 대대들은 대동강변에 도착 후 근처에 버려진 배 3척으로 밤새 도하했는데, 이후 병력 수를 확인해보니 뜬금없이 1개 대대가 하나 더 있길레 확인해보니 1사단 소속이라길레[6] 이들을 임시 배속받는다.

이후 4개 대대로 김일성 대학을 거쳐 모란봉으로 향해 그곳을 점령하고 교전을 산발적으로 이어갔다. 이후 10시간 뒤 7사단 3연대도 8연대의 진격로를 따라 후속 진입했다.

10월 19일 일출 무렵까지 북한군과 교전하던 7사단 8연대는 갑자기 1사단 11연대로부터 57mm 대전차포로 공격당했다.

1개  소대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는 와중에도 (지뢰 피해까지 겹쳐) 사상자 수십명이 나왔다.

이로인해 당장 여기서 철수하라는 11연대장의 방송까지 들어야 했다.

평양입성 국군들[ 사진=6.25 전사].png
평양입성 국군들[ 사진=6.25 전사].png

그리고 이 와중 국군 1사단 12연대는 도하장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하해 오전 11시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의 선교리로 진출했다. 

뒤이어 오후 2시 쯤, 11연대가 동평양 북쪽 미림비행장을 점령함으로서 선봉 입성의 영광을 얻는다. 

이후 야간에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들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을 점령했다.

이 와중에 모란봉을 거쳐 평양 북서쪽으로 진출,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점령한 뒤 그곳에 CP를 차렸다.

 일대를 탈환해 나가던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전 11시경 1사단장 백선엽과 대면당해 "전장 문란죄가 뭔지 아느냐" 며 추궁당했다.

이에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께서 까라면 까라 어쩔수 없이 왔다며 쩔쩔맸다. 

또한 1사단 장병들 역시 7사단에 대해 '전공 욕심에 눈이 멀었다'는 편견으로 7사단 장병들에게 또 알짱대면 진짜 쏘겠다며 위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한 평양시내 거리에 붙은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격문[ 사진=6.25 전사].png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한 평양시내 거리에 붙은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격문[ 사진=6.25 전사].png

이에 7사단 장병들도 '평양이 니네들 꺼냐, 위에서 까래서 온 거지' 라며 대치했으나 이후 "어쨌든 미군보다 국군이 먼저 평양에 들어왔으니 됐지 않느냐"며 대치를 풀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중대 하나를 먼저 보낸 7사단보다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지키며 사단 전체가 평양으로 진주한 1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국군 1사단 소속 연대들, 7사단, 전사(戰史) 관계자 사이에서 입성 시간대, 점령 및 게양한 위치, 정통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견은 지금도 분분해 지난 2010년 대한민국 국방부도 인정할 정도이며,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도 지난 1985년 이를 공동 입성이라고 증언했다.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역시 전후 7사단의 뒷사정을 알고 '무모하고 위험했으나 뭐라 탓할 수는 없으며, 쌍방 교전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고 술회했다.

평양 입성 국군들이 평양시민환영대회장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6.25 전사].png
평양 입성 국군들이 평양시민환영대회장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6.25 전사].png

국군 7사단과 함께 평양 쪽으로 방향을 튼 8사단은 19일 성천을, 20일엔 강동을 점령했으나 이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이후라 덕천 방향으로 향했다.

◇···이승만 평양 연설과 평양시민환영대회

국군 7사단 5연대는 이 당시 2군단 직속 예비대로 배속돼 8, 3연대를 따라 평양에 들어가지 않았다.

6.25 전쟁중 평양탈환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 6.25 전사].png
6.25 전쟁중 평양탈환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 6.25 전사].png

 

평양에서 연설중인 이승만 대통령[사진=6.25 전사].png
평양에서 연설중인 이승만 대통령[사진=6.25 전사].png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던 바로 그 날 10월 20일 한국군 1사단은 오전 10시 평양시를 완전 장악했다.

제1사단에 이어 미 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또한 평양 선봉 입성의 체면을 살린 이승만은 1사단에게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하사하고 사단 장병 전원을 일계급 특진시켰다.

6.25전쟁중에 탈환한 평양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대통령은 평양연설에서 무력으로라도 남북통일과 국민들이 뭉치면산다는 연설을 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전쟁중에 탈환한 평양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대통령은 평양연설에서 무력으로라도 남북통일과 국민들이 뭉치면산다는 연설을 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명령을 욕먹어가며 수행해온 7사단은 쫓기듯 평양에서 물러나야 했다.

 소련의 앞잡이 김일성이가 5년간 암흑정치를 펴고 1천만 북한 동포를 못살게 하던 평양은 정의의 진격으로 마침내 탈환되었다. 

이제, 괴뢰집단의 아성(牙城)이던 건물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30일 평양 방문에  감격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연설에 나온 평양시민들[ 사진=6.25 전사].png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연설에 나온 평양시민들[ 사진=6.25 전사].png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는 단군의 후손으로 모두 형제요, 한 핏줄이니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죽자." 라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 때 찍힌 사진이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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