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73)] 현충일에 기려야 할 6.25 전쟁중 조국에 목숨 바친 '학도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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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73)] 현충일에 기려야 할 6.25 전쟁중 조국에 목숨 바친 '학도병들'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4.06.0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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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2명 “조국 위해 죽겠다”...한강방어선부터 참전해  선무공작 나서
-낙동강전투, 장사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 대전등 전국에서 3만명 북진, 흥남철수등에도 참전
-유엔 연합군, 학도병 선무공작통해 '곧 영덕·군산으로 상륙”... 거짓 정보로 북한군 속여 
-군번도, 군복도 없이 중학생, 고교생, 대학생, 여학생, 재일동포까지 학도의용군에 합류
-1951년 3월 이승만.문교부 '학도병은 학교로 복귀하라' 복교령 발표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의 세월에 갖혀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찾아온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학생들이 군 장비를 지급받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찾아온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학생들이 군 장비를 지급받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시대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중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간데 없이...'라는 대목이 있다.

 조국을 위한 주인공였으면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이름도 간데 없이' 산화한 무명의 젊은 이들이 1950년 6.25 전쟁에서다.

6.25  전쟁의 필름과 사진을 돌려보면 소총을 듣고 교모( 敎帽)를 무명의 젊은 학생들이 나온다.  이른바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이다.

군번도 없이 군복도 입지 않은 채, 학생 신분으로 소총만 지급 받고 군인이 된 학도병! 겨우 4∼5일 동안 총 쏘는 기초훈련만 받고 참전한 학도병들은 전국에서 3만여 명이나 됐다. 주로 낙동강 전선인 안동·영천·안강·포항전투 등에서 군을 도우며 큰 공을 세웠다. 

◇···6·25전쟁발발 초, 소총 구경도 못한 학생들이 "조국 구하자 일어서"

최근 미 정부의 6.25 한국 전쟁관련 문서에도 한국 학도의용군이 등장한다.

맥아더 유엔사령관이 6.25 전란 초, 부산에 도착했을 때 젊은 학생들이 '총만 달라'는 아우성을 듣고 참천을 결정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내용의 요지는 '미군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을  결정하게 한 감동적인 것은 한국의 젊은 이들이다. 맥아더 원수(당시 일본 주둔 극동사령관, 이후 유엔 사령관)가  한국을 다녀와서 낸 보고서중에 조국을 구하기위해 분연히 일어선 학생들이 총을 달라고 찾아 왔다.

소총을 구경하지 못한 이들 학도의용군은 모자를 쓴 교복차림에 앳된 학생이었다. 조국을 구하겠다고 나선 이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한국을 공산주의자로부터 건져야한다'고 되어 있다.

학도 의용군을 세계를 감동시켰고, 16 개국이 유엔 결의로 한국을 구하기위해 참전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6.25 전쟁당시 의분한 전국의 학도의용군.[사진-블로그 seliz 켑처].png
6.25 전쟁당시 의분한 전국의 학도의용군.[사진-블로그 seliz 켑처].png

'신수용의 사건 반세기(대전일보)''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6.25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미 국방부, 라이프지 )',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 블로그 ohyh45),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책밭)등을 보면 이런 역사가 기록되어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1950년 8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해안(영덕)과 서해안(군산. 서천 장항) 두 지역에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쳤다.

그러면서 인민군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다. 특히 군산.장항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은밀하게 흘려보냈다. 

1950년 9월 13일 미주리호를 동해안 삼척 부근 해역으로 보내 구경 40㎜ 함포 사격을 가해 정보를 사실처럼 꾸몄다.

또 서해안에서는 9월 12일 밤, 영국함대가 미 육군과 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를 군산과 충남 서천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14일 미 공군은 전단 살포를 통해 ‘연합군이 곧 군산에 상륙하니 시민들은 내륙으로 피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모두 적을 기만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인민군은 여기에 속아 인천에는 경계를 소홀히 한 반면 군산 서천과 영덕 지역에 집중 방어 대책을 세웠다.

◇···조국을 위해 죽겠다라고 나선 교복차림의 학생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던 1950년 8월,  피아의 모든 군사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때 학도병들은 분연히 일어나 낙동강 전선으로 모여들었다. 남 학생뿐만아니라  여학생들도 군부대를 찾아왔다. 

6.25 당시 교복차림에 펜 대신 소총을 들고 전선을 향하는 학도의용군.[사진=신수용 닷컴].png
6.25 당시 교복차림에 펜 대신 소총을 들고 전선을 향하는 학도의용군.[사진=신수용 닷컴].png

그러나 나이 (15∼18세) 가 너무 어려서 국군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집으로 귀가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여러날을 떼를 써서 학생 신분으로 부대를 배치받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군번도 없이 군복도 입지 않은 채, 학생 신분으로 소총만 지급 받고 군인이 된 학도병들이다.

너무도 전세가 다급한 겨우 4∼5일 동안 총 쏘는 기초훈련만 받고 참전한 학도병들은 전국에서 3만여 명이나 됐다. 

주로 낙동강 전선인 안동·영천·안강·포항전투 등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한강방어선 참전에서 비롯된 학도의용군 어떻게 생겼나

인민군의 남침으로 의분한 학도의용군은 1950년 6.25 발발하자마자 국군의 한강방어선 전투에 참전하면서  시작됐다.

6.25 발발 남녁 피난길에 나선 서울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 모여 ‘비상학도대’를 결성으로 비롯됐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9일부터 한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군부대로 들어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방부 정훈국은 비상학도대 산하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피난민 구호, 전황 보도 및 가두 선전 등 주로 후방에서의 '선무( 先務)공작'을 담당하도록 했다.

많은 학생들은 후방에서의 임무 수행만으로는 의분을 달래지 못하여 개별적으로 현역 입대를 지원해 나갔다.

나머지 학생들도 국방부에 학도만으로 전투부대를 구성해서 일선에 나설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6.25 당시 교복차림에다 교모를 쓰고 펜 대신 소총을 들고 전선을 향하는 학도의용군.[사진=블로그 seliz 켑처].png
6.25 당시 교복차림에다 교모를 쓰고 펜 대신 소총을 들고 전선을 향하는 학도의용군.[사진=블로그 seliz 켑처].png

그러나 국방부의 고위 인사들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학도들의 참전을 만류하면서 정훈국의 지도에 따를 것을 종용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임시수도인 대전에  7월 1일 내려온 피난 학도들과 대전지역 학도들은 다시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했다.

어린 중학생 소년에서 장성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실전에 참여했다.

◇··· 어린 중학생, 대학생, 그리고 여학생까지 개별 참전까지 줄이어

학도의용군은 그로부터 6 · 25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모두 3만명, 기록에는 2만7700여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후방지역 또는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만 명이나 되었다.

개별적으로 현지 입대를 지원하여 국군 정규 부대의 장병으로 참전하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다.

상당수의 여학생들도 간호원으로 출정하였다. 

학도의용병들은 대구로 내려가 다시 한번 조직된 다음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 편입됐다.

학도병들은 여기서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백의종군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당시 참전한 여성학도의용군.[사진= 국가보훈처 제공].png
6.25전쟁 당시 참전한 여성학도의용군.[사진= 국가보훈처 제공].png

한 학교에서 100∼200명씩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평양탈환작전·백마고지전투 등 격전이 있는 곳마다 참전했다. 그만큼 희생도 많았다.

이 한목숨 조국에 바치겠다로 뭉친 학도병 772명은 1950년 9월15일 경북 영덕군 장사해안에서 문산호에 올라 국군과 함께 '장사상륙작전'을 벌였다.

민간석박 문산호에 오른 학도병은 심한 파도에 배는 요동치는 바람에  바다로 몸 던져 실종되거나 전투에서 희생 됐다.

당시 좌초됐던  민간선박 문산호 1997년 해병대가 발견, 조성된 장사상륙 위령탑·공원에 전시됐다.

◇···인천상륙작전앞서 양동작전에도  학도의용군의 "헌신적"  

한편 양동작전 명령을 받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이곳에 투입될 군 병력이 부족했으므로 현역 군인 대신 학도병 772명을 투입했다. 

학도병들은 처음부터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정규군과 같은 중무장도 하지 않은 채, 2700톤급 해군 수송선(LST) ‘문산호’에 실려 작전지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에게는 ‘오직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뿐이었다.

그러나 희생이 너무 컸다. 그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나머지도 소수의 생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실종됐다. 

작전 당일 동해안에 심한 파도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학도병을 태우고 영덕 해안까지 달려온 문산호는 해안에 정박하기도 전에 심한 파도에 휩쓸려 배가 요동쳤다. 

그러나 용감한 학도병들은 상륙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중 절반은 상륙에 성공했으나 나머지는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실종됐다.

6.25 당시 학도의용군이 타고 영덕과 군산상륙작전을 펼거라는 선무공작을 폈던 민간석박 문산호.[사진= 장사 상륙전승 기념관 제공].png
6.25 당시 학도의용군이 타고 영덕과 군산상륙작전을 펼거라는 선무공작을 폈던 민간석박 문산호.[사진= 장사 상륙전승 기념관 제공].png
6.25 당시 학도의용군이 타고 영덕과 군산상륙작전을 펼거라는 선무공작을 폈던 민간석박 문산호. 당시 좌초됐다가 1997년 해병대가 발견해 수리한 문산호.[사진= 장사 상륙전승 기념관 제공].png
6.25 당시 학도의용군이 타고 영덕과 군산상륙작전을 펼거라는 선무공작을 폈던 민간석박 문산호. 당시 좌초됐다가 1997년 해병대가 발견해 수리한 문산호.[사진= 장사 상륙전승 기념관 제공].png

당시 생존자 고 채종만 옹은 ‘성난 파도에 휩쓸려 해안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학도병이 상륙에 성공, 장사리 남쪽 고지를 점령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훗날 전했다.

 상륙한 병사들도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희생됐다.

군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해군 수송선을 보냈지만 대부분 전사하거나 실종돼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은 군번도 없는 무명용사였으므로 현충원에 위패도 없이 이름만 남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에는 이처럼 뒤에서 희생한 수많은 학도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한편 학도병을 태우고 최초 상륙작전에 투입된 2700톤급 ‘문산호’는 결국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좌초했으며, 오랫동안 갯벌에 파묻혀 있다가 1997년 3월 6일 해병대에 의해 발견됐다. 

​◇··· 학도병 일본에서 훈련받고 2개월뒤 인천상륙작전참전

그 가운데 약 700 명의 학도병들은 7월 중순 부산에서 유엔군으로 편입,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마친 다음 9월 15일에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에 정규 부대원으로 참전했다.

전사 기록에 의하면 국군 제3사단 예하의 22연대와 26연대, 국군 제1사단 예하의 15연대의 경우 그해 7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충병의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다.

이어 8월 초순 대구에서 새로이 편성된 국군 25연대도 병력의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T사진=ohyh45 켑처].png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T사진=ohyh45 켑처].png

이들 부대에 들어간 학도들은 기계(杞溪) · 안강(安康) · 다부동(多富洞) · 포항 등 여러 곳의 전투에서 숱한 희생을 입어 가며 조국 수호의 초석이 됐다.

8월 초 대구에서 육군본부 정훈감실 산하에 조직된 학도기간대(學徒基幹隊) 약 1500여 명은 곧이어 밀양에서 창설된 국군 유격부대에 편입되었다.

 ◇··· 학도의용군, 낙동강전투이어 인천상륙작전.태백산맥 소탕전 '혁혁한 공(功)'

이들은 적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 중 제1대대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하나의 양동작전으로 감행된 경상북도 영덕지구에서의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무려 1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됐다.

 제2 · 제3 · 제5대대는 10월 초부터 태백산맥 일대에 투입되어 쫓겨 달아나는 적을 소탕하다가 12월부터는 다시 호남지구로 투입되어 그 잔당을 소탕했다.

학도병들은 그 밖에도 공비의 출몰이 빈번하던 38선 이남의 취약지구.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에서 주민들에 대한 선무활동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일부 학도병들은 포술훈련을 마친 다음 북진포병대를 조직하여 국군 제7사단 포병단과 함께 종군하면서 개성 · 평양 · 순천을 거쳐 덕천(德川)까지 진격했다.

학도의용군의 희생적인 애국정신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이던 포항에서의 공방전으로 대표된다.

학도의용군의 모습.[사진=국가기록원 제공].png
학도의용군의 모습.[사진=국가기록원 제공].png

6.25 발발 20일 만인 7월 14일 대구에서 군의 조직과는 별도로 학생들만으로 편성된 보병 제3사단의 학도의용군 71명은 전사에 남아있다.

당시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북한 제5사단. 766유격대에 맞서 포항시가를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48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입기도했다.

그러나 이곳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아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북한군을 추격하여 한만(韓滿) 국경선까지 진격하였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수복지역의 학도의용군들도 스스로 학도호국단 · 학도의용대 · 대한청년단 학생부 등을 조직하여 국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나섰다.

학도의용군들이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국군 장병및 유엔 장병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ohyh45 켑처].png
학도의용군들이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국군 장병및 유엔 장병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ohyh45 켑처].png

 이들은 1 · 4후퇴와 더불어 집단적으로 남하하여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종군을 계속했다.

그 중 많은 학생들이 정규 국군으로 입대했는데, 그 수는 무려 4000여 명에 이르렀다.
 
◇··· 학도의용군, 재일동포 출신 교포학생들도 '조국에 한목숨을'...참전

이같은 구국대열에  약 700여 명에 이르는 재일교포 학생들도 참전했다.

이들은 급거 귀국, 구출하기 위해 궐기했다.

이들은 조총련의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유엔군 부대에 편입, 참전하여 59명이 전사하고 95명이 실종되는 희생을 치렀다.

해가 바뀌어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저지하고 전선의 균형과 안정을 회복하자, 피난처를 찾아 남으로 내려갔던 국민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생업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6.25 발발후 대전 임시수도로 피난온 대통령 이승만이 수심에 싸인 모습.[사진=외신].png
6.25 발발후 대전 임시수도로 피난온 대통령 이승만이 수심에 싸인 모습.[사진=외신].png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당시 학도의용군을 치하하며 담화를 냈다.

이승만은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문교부도 전국에 흩어진 학도의용군과 학생들에게 4개항을 담은 복교령을 내렸다.

문교부의 복교령은 '모든 학도는 원래의 본분인 학업으로 돌아갈 것', '군복무로 학업이 중단된 학도의 군복무 사실이 인정되면 학교 당국은 무조건 복교를 인정할 것', '군 및 각급 학교는 군복무로부터 복교하는 학도들에게 특별 배려를 해줄 것', '군복무 중 학년 진급이 누락된 학도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학년 진급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3월 16일 강원도 홍천에서 무기를 놓고 군복을 벗게 되었다. 다수의 북한 출신 학도병들을 비롯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던 학도들은 다시 현지에서 입대하여 합당한 계급과 군번을 받았다.

 

 ▶▶참고문헌.기록='신수용의 사건 반세기(대전일보)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6.25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미 국방부, 라이프지 )',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블로그 ohyh45),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책밭)과 국방부, 보훈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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