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뉴스창】윤.이 29일 용산회담이 '영수회담' 용어 논란... 역대 대통령들 누구와 어떤 영수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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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뉴스창】윤.이 29일 용산회담이 '영수회담' 용어 논란... 역대 대통령들 누구와 어떤 영수회담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4.04.2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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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 개별회담, 영수회담아닌 '행정수반과 야당대표간 회담'해석분분
-노무현 정부이전에는 대통령이 여당대표여서 야당대표와 회담을 영수회담
-역사변곡점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때 영수회담
-김대중과 이회창간 영수회담 7차례통해 의약분업.남북문제.IMF극복등 논의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1998년부터 7차례나 영수회담을 갖고 현안을 논의했다. 사진은 2001년 10월 9일 영수회담.[사진= 신수용 닷컴. 청와대 제공].png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1998년부터 7차례나 영수회담을 갖고 현안을 논의했다. 사진은 2001년 10월 9일 영수회담.[사진= 신수용 닷컴. 청와대 제공].png

영수(領袖)란 어떤 집단이나 조직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영수회담(領袖會談)이란 국가나 정치단체 또는 어떤 사회조직의 최고 수장(首長)끼리가 의제를 갖고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 29일 오후 열릴 윤석열.이재명 회담의 영수회담 의미

그러나 29일 오후 있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간의 회담을 영수회담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두고 해석이 구구하다.

왜냐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간의 회담일 뿐 영수회담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무현 참여정부 이전까지는 대통령이 소속 정당의 총재를 겸하고 있어서, 영수회담은 일반적으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제1야당 대표(옛 총재) 간의 회담이었다.

여당의 실질적 1인자는  대통령이다보니 일반적으로는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의 회담은  영수회담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는 '영수회담'이란 단어는 행정부의 수반이자 집권당 총재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만을 의미한다.

청와대 본관.[사진=청와대 제공].jpg
청와대 본관.[사진=청와대 제공].jpg

 그러나 참여정부이전에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했다가 참여정부 이래로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분리됐다.

예컨데 2000년 6월 24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만나 같은 해 7월 1일 시헁예정인 의약분업을 놓고 회담을 가졌다.

이때 여야영수회담이 옳다. 왜냐면 새천년민주당 총재가 행정수반인 김대중대통령이었고, 이 총재는 다수의석을 가진 야당 총재였다.

그러나 한화갑 새천년민주당 원내대표(원내총무)와 이회창 총재가 만나 회담을 가졌다면 영수회담이라고 부르질 않는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과 만나 연정과 원포인트 개헌을 논의했을 때는 영수회담이 아니라 대통령과 야당 대표회담이라고 불렸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표가 1996년 4월 18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갖기 전에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 청와대].png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표가 1996년 4월 18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갖기 전에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 청와대].png

그래서 국민의힘과 우파에서는 이번 윤대통령과 이 대표간의 회담을 영수회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면 민주당과 진보언론에서는 그 반대다.

민주당에서는 국민의힘측이 회담의 격을 낮추려고 하지만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인만큼 영수회담이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영수회담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무소속이었다. 훗날 자유당을 만들었지만 국회나 정당과는 거리를 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삼권분립을 철저히 하는 미국 정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1963년 김종필 전총리가 공화당을 창당한 뒤인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7월 20일  박순천 민중당 대표와 헌정사상 최초의 영수회담을 가졌다.

이날 영수회담에서는 임시국회를 소집해서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전쟁 파병 동의안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1970년 8월 29일 등  유진산 신민당 총재와 영수회담을 가졌고, 이후 1975년 5월 2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영수회담도 열였다.

김영삼 총재가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조의를 표했고 박 대통령이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김 총재가 유신철폐와 민주화를 제안하자 박 대통령은 영구집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1975년 5월 21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갖기위해 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1975년 5월 21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갖기위해 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동아일보 광고탄압 중지, 투옥됐던 민주화 운동 정치인 일부 석방 등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박 대통령은 그 뒤 1977년 5월 27일  이철승 신민당 총재와 영수회담을 갖고 시국문제를 논의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2월 18일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영수회담을 가졌다. 양자회담은 아니었다.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신민당 측에서는 박한상 사무총장, 황낙주 원내총무, 이택돈 정책위의장이 배석했다.

김총재는 12.12사태에 대한 정국안정, 조속한 개헌과 정권이양, 정치적 중립,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

이보다 사흘 앞서 1980년 2월 15일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와 최영희 유신정우회 의장 등 여당 간부들과 회담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6월 24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6.29 사흘전 영수회담을 열었다.

 김영삼 총재는 4.13 호헌조치 철회, 김대중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

 전 대통령은 '본인은 남은 임기 동안 안보, 남북관계, 올림픽 등 국가적 문제에만 전념할 것이며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정국을 이끌어가는 모든 책임과 권한을 넘겼다'고 밝혔다.

이후 6.29 선언을 통해 김 대통령이 요구한 의제가 거의다 실현됐다.

전두환 대통령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6.29 선언직전인 1987년 6월24일 청와대에서 가진 영수회담.[사진= 신수용 닷컴].png
전두환 대통령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6.29 선언직전인 1987년 6월24일 청와대에서 가진 영수회담.[사진= 신수용 닷컴].png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8월 31일과  1990년 1월 11일에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두번의 영수회담을 가졌다.

노태우 대통령 겸 민주정의당 총재는  1988년 8월 31일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 앞서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8월 22일,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8월 29일에 개별 회담을 했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11일 김대중 총재,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1월 12일에,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1월 13일에 개별 회담을 했다. 이는 1월 22일 3당 합당의 전조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모두 3차례의 영수회담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1993년 6월 15일, 1994년 3월 11일 김영삼 대통령과 이기택 민주당 대표가 영수 회담을 가졌다.

이어 1996년 4월 18일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여야영수회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하지만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김영삼 대통령의 영수회담 횟수는 그보다 많은 5차례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7차례 영수회담가진 김대중.이회창

김대중 대통령은 조순.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8번의 영수회담을 가졌다.

김 대통령은 1998년 2월 27일  조순  총재와, 이어 1998년 11월 10일 등 총 7번의 영수회담을 통해 의약 분업, 남북정상회담, 9.11테러로 인한 민생 안정 조치 등 여러 방면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9월 7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2007년 2월 9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다.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이 앞서 제안했던 대연정에 관한 회담이었다. 

박 대표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부했다. 

2007년 2월 9일 영수회담은 강 대표는 전시작전통제권, 민생경제 관련 영수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해 이뤄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을 갖고 있다.[사진=신수용 닷컴. 청와대 제공].png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을 갖고 있다.[사진=신수용 닷컴. 청와대 제공].png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5월 20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한미FTA비준및 미국산쇠고기 수입문제를 놓고 만났으나 설전만 벌이다 끝났다.

이 대통령은 이어 정세균 대표와 2008년 9월 25일 영수회담을 갖고 경제, 민생, 남북관계 등 국정 전반에 7개항 합의했다.

이 대통령은 2011년 6월 27일 손학규 대표만나 가계부채, 저축은행 사태, 일자리, 대학등록금, 추경, 한미FTA 등 6대 민생현안을 논의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단 한번도 영수회담을 갖지 않았고, 여야 정당대표.5부요인등과 다자회담을 여러 차례열었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지난 2002년 9월 29일 오후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 손을 맞잡고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청와대].png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지난 2002년 9월 29일 오후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 손을 맞잡고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사진= 신수용 닷컴.청와대].png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13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열었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2주 전이었다.

 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요청했고, 홍준표 대표는 '야당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홍 대표는 개헌 철회,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임명 철회, 정치보복 수사 중단, 지방선거 중립, 홍장표 경제수석 해임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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