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목숨을 건 1987년, 6.10 민주항쟁...6.29를 얻었지만 지금이 민주시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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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목숨을 건 1987년, 6.10 민주항쟁...6.29를 얻었지만 지금이 민주시대인가?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4.06.0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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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수호를 외친 대학생들...박종철.이한열 열사의 공권력에 희생
-박종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고문치사, 명동성당서 밝혀...분노한 국민들
-4.;13 호헌발표에 호헌철폐와 전두환 타도 전국에 확산
-6.9 이한열군 경찰최루탄 피격으로 전국일파만파
-6.29 선언으로 대통령직선, 3김복권, 언론자유, 노조설립등 '민주화 봇물'
6.10 민주화항쟁당시인 1987년 6월 9일 서울시청앞에서 호헌철폐와 전두환 타도를 외치는 집회현장.[사진= 신수용 닷컴].png
6.10 민주화항쟁당시인 1987년 6월 9일 서울시청앞에서 호헌철폐와 전두환 타도를 외치는 집회현장.[사진= 신수용 닷컴].png

12.12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3김씨를 가두고, 언론을 통제하고,결사 자유를 막았다.

때문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시민들의 적잖은 피해에도 꿈쩍않던 전두환 일당의 공포정치, 당시 보안대 정권은 날로 포악해졌다.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갔고, 대학마다 교정언저리에  탱크와 군인들이 배치되는 암울한 시기였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사진=월간 말지].png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사진=월간 말지].png

▶▶ 박종철군 고문치사=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쯤 하숙집에서 치안본부(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됐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중이던 박종운을 검거의 실마리를 찾기위해서다.

박종철은  경찰 취조실로 끌려갔다.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숨졌다.

6.10 민주항쟁을 기린 포스터.[사진= 청주시청 제공].png
6.10 민주항쟁을 기린 포스터.[사진= 청주시청 제공].png

이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렸고,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경찰은 고문치사를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서울 광주 대전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가 열렸다.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생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면서 '임을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 '솔아솔아 푸른솔아', '상록수'가 대도시에 울려퍼졌다.

대학마다 '독재타도', '전두환 퇴진'구호가 넘쳐났고, 외신들이 서울로 몰렸다. 

▶▶ 1987년 4.13 호헌조치=이런 국민들의 외침도 헛구호였다.

그해 연말 치를 제 6공화국 대통령선거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터였다.

그런데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요구에 전두환 정권은 같은 12.12 쿠테타 동지인 노태우에게 체육관 선거를 재현하려고 들었다.
 
그게 바로 개헌논의 유보, 또는 4.13 호헌조치라고 부른다.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했다.

6.10 민주화항쟁당시.[사진= 뉴시스 오마이뉴스].png
6.10 민주화항쟁당시.[사진= 뉴시스 오마이뉴스].png

민정당에 대해서도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국민들로부터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기름을 붙는 격이었다.

 곧바로 다음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한열 연세대생 최루탄 사망=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했다.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서울 대전등 전국으로 번졌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하필 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 시위에서 최류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과 그를 부축하는 이종창.[사진= 신수용 닷컴].png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 시위에서 최류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과 그를 부축하는 이종창.[사진= 신수용 닷컴].png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했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했다.

다음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장로회가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고,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 제개헌 공동쟁취 선언'도 낭독했다.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회(시위)에 참석한 연세대생 이한열이 서울 서대문구 연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 쓰러졌다.

이한열이 피격당한 다음날  6월 10일 잠실운동장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고,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서울시청 광장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여기에 재야민주세력 그리고 대학생은 물론 30대 직장인까지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이전의 시위는 대학생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가했다.

시위는 서울.광주와 대전역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이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끝내 7월 5일 안타깝게 숨졌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이는 6월항쟁을 임계점으로 이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 대전은 어땠나=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대전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열린 10일까지는 극도로 달아올랐다.

대전에 세워진 6.10 민주항쟁 30년 기념 표석.[사진= 대전시 제공].png
대전에 세워진 6.10 민주항쟁 30년 기념 표석.[사진= 대전시 제공].png

6월 15일 오후 교내 집회를 마친 충남대생 7000여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유성구 궁동 캠퍼스에서 대전역까지 3시간에 걸쳐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대전역에 운집한 대학생 시위 대열에 그동안 지켜만 보던 ‘넥타이 부대(화이트칼라 계층)’와 일반 시민이 합류하고 대전역과 충남도청 사이 1.2km 중앙로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이 모습은 다음 날 대전일보등에  대서특필됐고 부산을 비롯해 광주, 서울로 민주화 열기가 이어지면서 결국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을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하게 된다.

▶▶ 6.29 선언으로  전두환.노태우 백기.

6월항쟁은 연일 전국 곳곳에서 번졌다.

언론들까지 연일 대대적인 보도로 전두환 정권에 민심은 등을 돌렸다.

결국  ‘6.29선언‘이라는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특별선언을 내놨다.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직선제,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사면복권, 언론자유화, 결사 집회허용, 노조허용등이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1987년 6월 29일 발표한 대통령직선제등을 담은 6.29 선언.[사진= 신수용 닷컴].png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1987년 6월 29일 발표한 대통령직선제등을 담은 6.29 선언.[사진= 신수용 닷컴].png

이를 통해 1987년 12월 제 12대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다. 

6월항쟁은 시민들이 독재정부의 장기집권 의도를 막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는 의미가 있다.

이로써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6월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다.

 이후 노동자들이 생존권 확보 및 노동조합 결정에 나섰던 역사의 대 전환점이다.

이후 전두환.노태우일당의 12.12쿠테타, 독재, 부정부패, 인권유린등을 다룬 5공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면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영남 호남 충청 지역 연고주의 정치가 되살아나는 폐해도 있다.

하지만 6.10 민주화 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19 의거처럼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보여준 기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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