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의 한국정치사(2)】   남북 갈라놓은  '얄굿은'  얄타회담....  3.8선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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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의 한국정치사(2)】   남북 갈라놓은  '얄굿은'  얄타회담....  3.8선 그었다.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04.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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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기 6개월전에 미.영.소 정상... 얄타에서 만나 남북분할 점령논의.
-해방된뒤 한달도 못되어 그해9월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통할 주둔.
-3.8선 장벽 높아지면서 민족왕래.통신.전력.교통.자원교류 중단.
-3.8선 결국 6.25 동존상잔의 비극 남긴 강대국들의 힘의 대결로 계속.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겨레. 그러나 야속하게 완전한 독립의 길, 민족통일의 길은 멀었다. 그게 바로  이른바 3.8선이다. 지구의 북위를 따져 한반도 3.8선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었다.

그것이 민족의 아품이었고, 시련이었다. 3.8선이 생기리라고 예상을 한 당시 지도자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쪽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적극 반대했다.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블로그 kimseogk켑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블로그 kimseogk켑처]

한반도 허리를 두동강 낸 3.8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말못할 눈물과 헤아리지 못할 동족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의 선이었다.

​◇ 8.15 직전 크리미아 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모여 회담.

3.8선이 그어지자 당시 언론들은 '3.8선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국산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곧 우리 민족이  자의적으로 결정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블로그 SINSUN켑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블로그 SINSUN켑처]

돌려말하면, 힘없는 우리 민족의 의사는 아랑곳 없이 외세가 판단하고 결정해 그어 놓은 비극의 선이었다.

주변 열강들이 만든 특제품이자 전리품으로 전락한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상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과 소련, 이 두나라는 8.15 해방을 선물했지만 대신 해방에 앞서 3.8선을 중심으로 양분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봤던것이다.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 당시 뉴요타임즈 톱기사[사진출처=신수용대기자 DB]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 당시 뉴요타임즈 톱기사[사진출처=신수용대기자 DB]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신수용대기자 DB]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회에서 전후 대책과 대일항전을 논의하는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미국과 소련은 여기서 3.8선 분할통치를 논의했다.[사진출처=신수용대기자 DB]

미.소 양국이 이를 나눴지만, 순하고 순한 우리 민족은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데 감사하다보니 이들의 3.8분단 결정을 사실상 묵인한 셈이다.

1945년  제 2차대전이 막을 내리게한 미.영.소 3국은 크리이마 반도 얄타(Yalta)에서 회담을 갖는다. 이른바 비밀리에 연 '얄타 회담'이다.

그해  2월 4일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지도자들은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 전쟁이 종결된 2, 3개월 후에, 소련이 연합국의 편에 서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할 것을 협정했다.

3국은 세계 전범국가와 피식민지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흥정했다. 

그중에도 피식민지 국가를 전후에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얘기가 오갔다. 

미·영·소 연합국의 정상들은  얄타 회담에서는 한국문제는 공식적인 의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한뒤 한국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는 대화가 오갔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한국을 20~30년 동안 신탁통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기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짧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세계사 학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훗날 얄타회담에 참여했던 3국 대표단 일행중에 몇몇은 당시 '흥정상황'을 사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를 요구했다. 스탈린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한반도를 넣을 욕심이었다.

1945년8월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조인한뒤 서울을 빠져나가는 일본군[사진=신수용대기자DB]
1945년8월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조인한뒤 서울을 빠져나가는 일본군[사진=신수용대기자DB]

일본 군국주의가 물러남과 동시에 한반도를 손쉽게  처리하기위한 속셈이었다.

스탈린의 제의에 미국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철은 매우 당황해 했다.

소련의 당돌함도 당돌함이지만,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저의에 충격을 받았다.

루즈벨트와 처칠은 무엇보다 한반도를 통째로 소련에 내준다는 것은 자존심뿐 만아니라  손익계산에서도 손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셋이 오랬동안 설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한반도의 관할권을 미국과 소련이 분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뒷 얘기로는 스탈린이 회의메모장에 한반도를 그려놓고, 낙서하듯 선을 그어 놓은 것이 곧 우리 민족 원한의 3.8선이 된 것이다. 낙서하는 기분으로 한반도 허리를 잘라 낸 이 한장이 곳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해방이 된뒤 한달도 안되어  미국과 소련은 얄타에서 대화했던대로 한반도에 들어온다. 얄타에서 주고받은 대로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그해 9월 8일 3.8선 이북은 소련군은 그해 8월20일  들어온 것이다.

이어 그해  10월22일에는 서울중앙청광장에서 미국.영국.소련.중국군의 연합군 환영대회를 열 만큼 공식적인 주둔절차를 세계에 알렸다.

  ◇3.8선의 장벽...곧 남북 왕래.통신.물자.교통.우편 단절.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3.8선을 경계로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민족의 분열이라는 비극에 휩싸였다.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수뇌부 회담에서 논의된 한반도를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이 분할해 통치하기로 하고 합의한뒤 해방되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사진=국가보훈처제공]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수뇌부 회담에서 논의된 한반도를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이 분할해 통치하기로 하고 합의한뒤 해방되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사진=국가보훈처제공]

이 바람에 전력, 비료, 석탄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보다는 남한은 심한 민생고에 시달려야했다.

가장 먼저 위기에 봉착한 것이 남한의 공업이 위기를 맞았다. 3.8이북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했던 댐이 많았다.

압록강의  수력을 이용한 수풍발전소를 비롯 전력이 많이 생산됐었다. 당시의 기록을 찾아보면, 북한의 총 발전량은 180만 ㎾였고, 이가운데 남한에 보내지는 전력은 7만5천 ㎾에 달했었다.

이 전력을 남한에서는 주로 화학공업의 동력으로 사용해왔다.

이 까닭에 송전이 끊겨 남한의 공업은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3.8선이 생기기전에 남한의 생산공장 가동을 위해 북한에서 하루 13화차의 석탄을 보내왔으나, 3.8선과 함께 모두 끊겼다.

남한의 석탄은 북한과 일본에서 들어왔었지만 북한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남한에는 그때 8백 개 정도의 공장이 있었다. 그중에 중요한 화학제품공장은 250개 정도 였으나, 겨우 가동된 공장은 100개 이하였다.

농업도 위기를 맞았다. 농업생산의 원동력인 비료는 농촌에서 생명과 같이 긴요했다. 퇴비나 녹비(綠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발전량이 세계적이라며 한때 자랑했던 수풍 수력발전소. 3.8선이 생긴뒤 남한에 송전을 끊어 남한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위키백과켑처]
북한이 발전량이 세계적이라며 한때 자랑했던 수풍 수력발전소. 3.8선이 생긴뒤 남한에 송전을 끊어 남한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위키백과켑처]

생산량 증가를 위해 화학비료, 즉, 금비(金肥)를 써야했다. 그러나  80%이상을 북한 함흥 비료공장에서 의존했었지만 3.8선이 그어진뒤   이 공급이 끊겼다. 곧 수확량 감소로 이어졌다.

여기에다 전량 북한에서 만들어오던 농약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결국 비료와 농약을 공급받지 못해 수확량은 크게 부진, 이로부터 남한은 식량기근현상을 빚기 시작했다.

​◇단절된 남북의 사람의 왕래와 우편.교통.통신.

내나라 내땅이었지만 무심한 3.8선은 민족단절로 이어졌다. 

​교통이 두절되고, 전신·전화의 통신망이 대부분 끊겼다. 당시 남한은 미군정청이, 북한은 소련의 군대가 들어와 있었다.

​때문에 이들이 명령만 내리면 막혀버린 교통과 통신등의 재개가될 수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끊겨버리고 단절되고, 두절되고, 차단되면서 막연한 대기상태가 지속됐다.    

해방된 지 몇달만에 닥친 황당한 3.8장벽으로 일반여행은 물론 학생들의 통학도 불가능했다.

전신전화의 경우는 소련군이  3,8선부근의 전신전화전용선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통화가 두절됐다.

1946년, 당시 북한과 연락되는 선은 서울 중심으로 경원선과 경의선방면을 통하는 지하 반송식(搬送式) 케이블이 있고 전주(電柱)로 통하는 선은 전신전용선이 서울중심으로 10회선, 경의선 19회선, 경원선 27회선이 있었다.

이것이 모두 차단되었다. 그바람에 남한에서는 서울-평양선만이라도 사용할수 있게 해달라고 앴으나 미.소은 답을 하지 않았다.

​우편물도 마찬가지다. 해방후 6개월간 100만통의 편지가 3.8선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북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직전에 이르자 1946년 3월15일 제1회 남북우편물교환을 개성에서 하게된다.

6개월간 가로막혔던 3.8이북쪽과의 우편물교환이 처음으로 실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개성역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교환종목은 제 1종 봉서(封書.편지)와 제 2종인 우편엽서로 제한되었다. 신문.잡지.서적.서류 등은 제외됐다.

남한에서는 각 지방당국에서 북한으로 보낼 우편물을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취합해 개성으로 보내지는 형식이었다.

1차 때는 행낭만 100개로, 이속에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취급한 편지 82만통과  소포및 기타서류 1만5천여 통이 들어있었다.

첫번째 서신교환은 1946년 3월14일 오후 5시45분 출발해, 이튿날 아침 개성역에 도착했다.

1970년대 함흥비료공장[사진출처= 블로그jihong-Park켑처]
1970년대 함흥비료공장[사진출처= 블로그jihong-Park켑처]

그러나 이후는 10일에 한번씩 교환할 것인지, 아니면 1주일에 한번씩 교환하자는 얘기가 오갔을 뿐 사실상 우편물도 미.소 당국에의해 차단됐다.

​◇미군과 소련군,남북에 주둔하면서 대치로 전환. 

앞서 언급됐듯이 얄타에서 논의된 대로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장악했다.   3.8선을 경계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우리민족은 친절하게 질서를 유지하며 이나라들의 군인들을 맞았다.

미군은 우리 정부가 자립하도록 돕겠다고 천명했다.​

1945년 10월22일 서울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장에 태극기와 미.영.소.중국기가 나라히 게시되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1945년 10월22일 서울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장에 태극기와 미.영.소.중국기가 나라히 게시되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하지만 남한의 미군과 북한의 소련군은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더니 끝내 3.8선을 경계로 대치로 치닫는다.

그러면서 3.8도선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이어 철조망을 얹어 철책선을 만들며 한계를 분명히 했다. 이전까지 오손도손하던 남북이 이 철책선이 세워지자,이젠 중무장한 남북군인들이 미.소군인들 앞에 서서 상대를 적대시 하기 시작했다.

앞서 1945년 8월15일  연합군이 일본측으로부터 항복조인을 받은 뒤 연합군 점령지역 분담을 결정하면서, 3.8선 경계설정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면서 3.8선을 중심으로 3.8선의 경계망은 삼엄해갔다. 

그런데도 해방후 1년간은 하루평균 1천여명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나들었다.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월남하는 동포로 3.8선은 불볐다.

조선주둔일본군위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한과 북한에 분할 진주함에 따라 군정이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20일 북한에 들어왔고, 미군은 그해 9월8일 남한에 들어왔다. 1945년 9월9일 서울역에서 서울시내로 이동하는 미군들[사진=신수용 대기자db]
조선주둔일본군위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한과 북한에 분할 진주함에 따라 군정이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20일 북한에 들어왔고, 미군은 그해 9월8일 남한에 들어왔다. 1945년 9월9일 서울역에서 서울시내로 이동하는 미군들[사진=신수용 대기자db]

자유로이 넘나들수 없는 땅이 되버린 남과 북, 모험을 무릎쓰지 않고서는 다시 돌아올수 없는 애끓는 비극들이 연속이었다.

3.8선을 넘는 행렬이 이어지자 지역사정이 밝은 사람들은 3.8선을 넘는 사람을 안내하면서 하루 수입이 당시 50만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3.8선의 이런 상황을 '신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또 3.8선의 잦은 충돌이 일어나더니 이후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한을 무력으로 침략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했다.

이처럼 얄타회담은 한반도 분단이라는 슬픈 역사의 시작인  회담이었다.  강대국 이해관계 속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참고문헌;한국야당사(이기택지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충청남도지(충남도지편찬위), 한밭승람(변평섭지음), 사건반세기(신수용지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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