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74)]김일성에게  6.25 남침 오판하게한 미군정청철수와 애치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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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74)]김일성에게  6.25 남침 오판하게한 미군정청철수와 애치슨라인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4.06.2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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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이 몰고온 38선...남한은 미국 군정, 북한은 소련군정 주둔하며 이념대립
-김일성, 스탈린과 마오쩌뚱 지원속에 폭풍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남침
-6.25 발발 1년전 안보대비없는 미군정철수, 6.26 발발 5개월전 한국을 제외한 미 '애치슨선언'
-250만명 사망에 1천만명 이산가족 ...제 3차대전으로 부를 만큼 대전쟁
6.25 당시 인민군의 남침상황.[사진=신수용 닷컴].png
6.25 당시 인민군의 남침상황.[사진=신수용 닷컴].png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의 세월에 갖혀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오는 25일은 6.25 동란이 발발, 74주년이다.

구한말 당파싸움에 일제에게 나라를 잃고, 해방됐지만 남북이 갈라지고 끝내 같은 민족이 총뿌리를 겨눈 동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소련 스탈린과 중공 마오쩌뚱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기어코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 3차대전이라는 6.25 발발배경과 피해 규모 

1950년 6월 25일에 김일성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한국이 침공 당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김일성과 마오쩌뚱.[사진= 한국전사].png
김일성과 마오쩌뚱.[사진= 한국전사].png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했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우리는 한국 전쟁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북한은 조국해방전쟁,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으로도 부른다.

 전쟁 바록전날인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은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했으나  군 수뇌부는 무시하고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했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일각에서는 해방된 한반도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결과라는 분석도있다.

즉,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으로 분할 점령의 부작용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소련과 미국이 이념 대결을 벌임으로써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 전쟁은 대리 전쟁이라는 것이다.

6.25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6.25 동란 초에 미군들이 부서진 인민군 탱크옆을 행군하고 있다.png
6.25 동란 초에 미군들이 부서진 인민군 탱크옆을 행군하고 있다.png

한반도 온 천지가 3년 1개월동안 포흔. 탄흔, 상흔으로 같은민족끼리 엄청난 피해를 낸 전쟁이다.

1차 세계대전보다 더치열했고, 피해도 1차대전을 앞서, 당시 미국에서는 제 3차대전이라고 불렀다.

북한인구의 11.1%인 113만 명을 포함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했다.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겼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됐고, 그중 공업시설 45%가 모두 폐허가 됐다.

전쟁 중 미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6.25당시 부모가족을 잃은 소녀가장.[사진= 미 라이프지].png
6.25당시 부모가족을 잃은 소녀가장.[사진= 미 라이프지].png

 한반도 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 8.15 해방과 함께 미.소 군정 남북 주둔

6.25 전쟁 발발 5년전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일본.독일.이탈리아 패배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무렵 미국.영국을 중심으로한 연합국 측은 상대국을 꺾은 뒤  점령국의 통치를 놓고 머리를 맡댔다. 

제일 먼저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 회담(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에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어  태평양전장 막바지인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이에 앞서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

美蘇共委 절차를 협의하고 있는 하지 사령관(왼쪽)과 슈티코프 소련대표단장(오른쪽.)[사진= 한국전쟁사]jpg
美蘇共委 절차를 협의하고 있는 하지 사령관(왼쪽)과 슈티코프 소련대표단장(오른쪽.)[사진= 한국전쟁사]jpg

여기서 일본을 물리친뒤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통치하자는 조약이 이 얄타회담에서 이뤄졌다. 

한반도에  정부가 없으니  미.소가 군정을 둬 적법한 정부노릇을 하자는 합의다.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은 중국충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해왔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다.

 이보다 북쪽인 연안에서는 1942년경부터 조선독립동맹이 마오쩌둥 등의 공산 정부와 합작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됐으나, 여운형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다.

이때 미군정청이 38도선 이남에 주둔하고,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정이 들어섰다.

미군정청은 이후, 미합중국 육군 제24군단이 점령하여 1945년 9월 9일~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3년간을  남한을 지배했다.

하지 미국정청장과 이승만 박사.[사진=신수용 닷컴].png
하지 미국정청장과 이승만 박사.[사진=신수용 닷컴].png

미군정청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던 기구, 혹은 그 시기를 가리킨다.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8월에 소련의 움직임으로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갔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제패망이 기정사실화됐다.

이때 자칫하면 한반도와 일본의 통치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소련은 미국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하자,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점령한 다음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

소련군은 만주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많은 물자들이 전리품으로 노획했다.

소련군은 멈추지 않고, 청진과 함흥을 지나 평양에까지 계속  남하하게 되자  미국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하지 않을까 걱정한 미국은 급기야 1945년 8월 11일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38선 한반도 분할론을 소련 측에게 제시했다.

◇··· 8.15 해방앞두고 '한반도 38선 분할하자' 소련에 제시한 미국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더라도 반드시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를 위해 서울 북쪽을 지나고 있던 38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런 제안에 대해 소련은 생각 외로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전쟁을 유럽 지역에서만 했고, 동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정도가 매우 적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리가 먼저 들어와서 다 먹었으니 이거 다 내 거야" 라고 할 줄 알았다.

강원도 양구 한마을을 가른 3.8선.[사진= 신수용 닷컴].jpg
강원도 양구 한마을을 가른 3.8선.[사진= 신수용 닷컴].jpg

하지만,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리는 태평양에서부터 일본 아작냈고 니네는 숟가락만 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예상보다 훨씬 양보된 입장을 표명하니 양쪽 모두 놀란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협상을 갖는다.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대표로 여운형과 교섭을 통해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  

여기에 동아일보 사장인 우익계 송진우 선(先) 교섭설이 한국정치사에 야사로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는 논란이 있다. 
 
이때 여운형 등은 좌익계인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확대 개편했다.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사전에 약속을 해놓고 건준에게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다.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남한에 주둔할 미군정)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여운형과 동지직가들.[사진= 신수용 닷컴].jpg
여운형과 동지직가들.[사진= 신수용 닷컴].jpg

한편 김성수, 송진우 등의 우익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이미 함경북도에서 조선주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군이 결국 한반도 전체를 접수할 줄 알고 급하게 신변이나마 보장받고자 했던 것. 같은 시기 이미 점령당한 만주국의 일본인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였다.

◇··· 미군정청, 이승만.김구 제의 신탁통치라며  반대

광복후 미군정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하였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후 총독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은 미군정의 통치는 '주권정부 없는 점령'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이어졌다.

결국 미군정이 점령지역의 주권을 대리하게되는 상황으로 이어지자 '일제식민지=미군식민지' 비판과 반발이 매우 컸다.

일제에 못지 않게 미군청이 사사건건 제한하고, 규제하고, 체포하고, 구금했다. 

1947년의 한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김구 슈티코프 미소공동위 소련쪽 수석대표, 과도정부 민정장관 인제홍.[사진= 신수용한국정치사].​.jpg
1947년의 한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김구 슈티코프 미소공동위 소련쪽 수석대표, 과도정부 민정장관 인제홍.[사진= 신수용한국정치사].​.jpg

36년의 일제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도 누리기도 전에 미군정의 온갖 통제로 좌.우익 모두 '미군 철수'를 외치는 일이 횡행했다.
 
원래 남한에 배치될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틸웰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0군이었다.

 초기 계획에서는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예하 3개 보병사단)을 주력으로 야전군 직할로 공병, 전차, 방공여단, 전투지원 부대, 근무 부대가 배속되어 총합 11만명의 병력이 수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병력 계획은 폐지됐고 무려 12번이나 계속 변경되었는데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변수가 매우 유동적이었다. 

1950년9월 15일 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사진=한국전쟁사].png
1950년9월 15일 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사진=한국전쟁사].png

미군은 최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게 명백했다. 

왜냐면 가장 중요했던 3가지의 변수가 있었은데  미해군 선박의 부족, 소련군의 진격 상황, 2차대전 종전 직후 바로 시작된 미군의 군축정책 때문이다.

우여곡절끝에 최종적으로는 미군의 선발대가 조선총독부의 항복과 서울을 접수하고 후속 부대가 지방 곳곳에 배치된 때는 1945년 9월이다.

그러나 이승만.김구.김규식등 우익인사들과 임정단체, 항일독립기관등은 미군정이 정부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신탁통치'라며 강력 반발했다.

 미군정은 이에 감정적으로 대했다.

한국은 스스로 해방을 얻은게 아니라 미국의 덕분에 찾은 것일 뿐 주인도, 정부도 없는 나라라며 국민적 반발에 콧방귀로 대했다.

미군정청 출범행사.[사진= 신수용 닷컴].jpg
미군정청 출범행사.[사진= 신수용 닷컴].jpg

심지어 <본지>가 입수한 미군정청 법률고문인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의 당시 답변을 보면기가막힌다.

그는 미군정에 의해 한반도를 점령한 것인 만큼 미군정이 유일한 적법 정부임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고, 합병 이전의 조선을 부활시킨것이 아님▲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음▲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규정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기 전까지 국군통수권, 행정권, 입법권,경제권등을 모두 쥔  미군정정부는 그러나  애매한  노선으로 좌우익 갈등을 부추키고, 농지개혁, 화폐개혁, 교육제도등 그 어느 것도 반듯하게 만든게 없었다.

심지어 인권침해과 폭력방지만을 강조했을 뿐 지방곳곳에서  충돌하는 제주도 4.3사건, 여순사건등 좌우 폭력등을 예방하는데 실패했다.

곳곳에서 이승만 김구등 민족진영지도자들까지 앞장서서 미군이 철수해야 좌우합작이나 남북통일이 가능하다고 외쳤다.

미군정회의.[사진= 신수용 닷컴]jpg
미군정회의.[사진= 신수용 닷컴]jpg

결국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한 미군정은 일부 군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철수후 6.25 때까지  혼란정국이 부상했다.

좌우익 대립과 테러, 그 혼란이 지속됐다.

중요한 것은 미군정이 철수하자 소련의 지원을 받고 군을 육성한 북한 김일성이 오판해  6.25 전쟁을 일으킨다  

◇··· 미국 중국학자의 "한국 도와봤자 미국에 이익 의문시된다"는 주장
 
6.25 전쟁 발발 10개월전 미국 워싱턴은 분주했다.

3.8선 이남을 하지 중장을 통해 3년간 통치해온 미군정청이 이미 1년 전에  철수한 사실을 놓고 미 하원에서 논란을 빚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대원수 하지중장.[사진= 신수용 닷컴]jpg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대원수 하지중장.[사진= 신수용 닷컴]jpg

그무렵,1949년 8월 미국의 중국학자이자 반한(反韓)학자인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 교수는 미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제출한 남한 정책의 보고서는 큰 파문을 낳았다.

그의 보고서 때문에 김일성-스탈린의 오판으로 6.25남침이 발생한 셈이다.

그는 "38선 이남인 남한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정도 지속될 것인가는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이는 미국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한국에 대해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끊어야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 의견서는 6.25 두달전 1950년 4월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포되었다.

래티모어는 수일 후 상원에도 출석하여 한국에 대한 원조 중지를 주장했다.

2차대전과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방예산이 고갈된 미국인들에게 솔깃한 주장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12월 결의에서 "만약에 공산군이 남한에 대하여 무력 침입을 행하더라도 미국은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 의견을 밝혔다.

 이처럼 당대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얻을 지정학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도래한 냉전의 긴장 속에서 소련이 태평양 방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염려하여 대한민국에 충분한 무기도 제공하기를 꺼렸다. 

에치슨 미국무장관.[사진= 신수용 닷컴].png
에치슨 미국무장관.[사진= 신수용 닷컴].png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같은 분위기를 처음 언급하였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 라기보다는, 침공받은 국가가 일차적으로 방어하고 유엔이 사후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 김일성이 6.26남침 결정하게 한 미 국무장관의 애치슨 라인

189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나 예일 대와 하버드 대 로스쿨을 졸업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재무부 부장관에 임명됐다.

그후 해리 S. 트루먼대통령때 에 의해 국무부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애치슨은 소련에 회유적이었다.

애치슨 라인.[사진=위키백과].png
애치슨 라인.[사진=위키백과].png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외교문제 해결의 중책을 수행한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확실히 한것이다.

애치슨의 기록을 보면  당시 애치슨이 소위 '애치슨 라인'을 가리키며 쓴 단어는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이는 만약 이 나라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지원해준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국내여론도 이렇게 인식했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타이완(臺灣)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직후 6·25전쟁의 발발을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애치슨은 이 연설로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6.25 전쟁직전 투루만 대통령(왼쪽)앞 애치슨.[사진= 미국 타임즈지].png
6.25 전쟁직전 투루만 대통령(왼쪽)앞 애치슨.[사진= 미국 타임즈지].png

그러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군사전략상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 선언은 김일성의 남침 결정에 파란불을 켜주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에치슨라인이 발표되자 충남 부여 출신인 소죽 임병직(1893~1976)외무부장관은 서한을 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 씨는 지난 12일 기자단 클럽에서 미국의 대극동정책을 발표했다. 본 장관은 이번 애치슨 씨의 발표에 대하여 미국이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여러 민주국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박력있는 정책을 확고히 고집하고 있는데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아시아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고 악독한 공산주의 침략의 전선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이제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바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국 국민은 더욱 공고하고도 단결된 힘으로써 그들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궐기하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결의를 가진 자유국가 인민에 대한 책임감을 이제 명확히 발표한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메어진 사명과 책임은 또한 한미양국의 유대성을 굳게하는 것이며 미국이 아시아에 있어서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공동의 책임을 가진다는 것은 한국민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키는 것이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본 장관은 이 한국민의 뜻을 트루먼 씨 그리고 애치슨 씨에게 전하는 바이다"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 바깥 지역에 대한 침공이 발생하면 먼저 침공을 당한 국가가 스스로 저항해야 하고, 유엔 아래 문명세계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며, 태평양과 극동지역에서의 문제에 군사적 해결책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애치슨 선언에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조속히 애치슨과 접촉하도록 했으나, 애치슨이 의회 출석으로 부재중이었다.

장면 대사는 대신 윌리엄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만났다.

 이승만도 한국을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도  보냈다.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애치슨 선언영문 기자회견 발언내용.[사진=임병직 전 장관 어록].png
애치슨 선언영문 기자회견 발언내용.[사진=임병직 전 장관 어록].png

 미국은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서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한국의 방위를 포기하는게 아니라면서 원조를 약속했다.

 이후 1950년 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0년 2월 10일, 미국 의회에서 한국 원조 법안을통과시키면서, 한국도 안심하게 된다.

또한 애치슨 라인 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었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다.

 일본은 국권회복 이전으로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인데다 자국의 군대도 있었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되었다면 오히려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이었던 타이완 역시 애치슨 라인에서 빠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애치슨라인이 발표된뒤 임병직외무장관이 보낸 감사의 글이 실린 1950년 1월15일자 경향신문.png
애치슨라인이 발표된뒤 임병직외무장관이 보낸 감사의 글이 실린 1950년 1월15일자 경향신문.png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박명림, 션즈화, 매트레이 등 한국전쟁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애치슨 라인 선언이 북한의 남침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애치슨의 선언이 파란불을 켜줬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곳이 당시 야당인 미국 공화당이라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즉 애치슨 라인은 전쟁 자체보단 전쟁 중 그리고 전후에 제기된 해석에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대체역사소설인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다.

하지만 스탈린이 트루먼미 대통령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고 맥아더가 6.25 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사후에도 비난받는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이처럼 6.25 전쟁발발 직전 김일성 남침이 우려되는 데도 아무런  국방력도 없이 미군정철수와, 이어 애치슨라인배제로 남침의 기회를 줬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다.

▶▶참고문헌.기록='신수용의 사건 반세기(대전일보)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6.25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미 국방부, 라이프지 )',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블로그 ohyh45),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책밭)과 국방부, 보훈부, 위키백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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