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내 삶의 큰 영향을 준 분은 3.1절 노래에 나온 유관순 누나(열사)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일제의 부당함에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는 것이 그 먼저다.
16세 소녀가, 항일 독립을 이끌고 사회의 잘못과 부당함에 강력히 맞섰다는 초등학교 때 읽은 위인전은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 중에도 열사가 남긴 일화와 명언들은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 바람에 가 일본 헌병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보진 고문을 받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 중에 독립만세를 외쳐 형이 가중,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재판관을 향하여 이렇게 항변했다.
열사는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이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느냐?"
일제 재판관은, "죄를 뉘우치고 일본제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다짐하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라고 회유했으나 열사는 뿌리쳤다.
열사는 재판관에게 되레,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 만세 죽어서도 독립 만세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은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서 먹이고 머리에는 골 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인두로 지지고 태웠다. 뿐만 아니다.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잘리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버렸다.
열사는 그러다가 1920년 10월 20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며 절명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 등의 순국으로 지킨 조국의 광복절이 15일이면 제79주년이다.
그러나 올 광복절 경축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하다.
지난해 육사 교정에 있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하려는 정부와 야당·단체 등의 반발에 이어 또다시 광복절 의미를 새기기도 전에 갈등이다.
문제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문제가 불거졌다.
광복회와 야당이 김형석 임명 철회를 하지 않으면 정부의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을 선언했다.
25개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도 정부 경축식에 불참하고 별도의 광복절 행사를 열기로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독립기념관은 개관 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광복절 경축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통합의 장이 돼야 할 광복절이 국론분열이 돼버린 셈이다.
김 관장은 지난해 12월 ‘자유민주를 위한 국민운동’ 행사에서 언급한 내용이 불씨가 됐다.
광복절이 1945년 8월15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라고 주장한 것 때문이다.
광복회와 야당은 그의 발언이 뉴라이트 진영의 1948년 8·15 건국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며, 그를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된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을 질타하고 있다.
왜냐면 윤 대통령은 뉴라이트 인사들을 역사·교육 기관장으로 대거 발탁했기 때문이다.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근대화됐다고 미화하고,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역사를 폄훼하며, 독재의 어두운 역사를 경시하며,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지 않고 있어서다.
그래서 광복회와 독립운동가 단체의 말마따나, 사회적 공감대를 이룬 인사들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광복절은 '조국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관순 열사를 되새기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