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 뉴스창】"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8. 29 국권상실 경술국치를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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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 뉴스창】"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8. 29 국권상실 경술국치를 잊지말자"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4.08.2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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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우치와 이완용, 고종의 형 이재면이 맺은 국권상실 조약
-고종임금이 전권을 위임하지 않은 원천무효
-경술국치후 홍범식 이범진 황현 최익현 선생등 순국자결
1910년 8월29일 국권이 일제에 빼앗긴 경술국치직후 남대문에 걸린 일장기.[사진= 신수용 닷컴].png
1910년 8월29일 국권이 일제에 빼앗긴 경술국치직후 남대문에 걸린 일장기.[사진= 신수용 닷컴].png

8월29일은 1910년(경술년)국치일이다.

주로 '국권피탈', '일한병탄', '경술국치', '경술왜란'으로 부른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또는 수치'라는 의미다.

반만년 역사속에 가장 치욕스런,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다.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손꼽힌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 본토의 일부로 흡수되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로인해 한국은 약 36년간 일제의 불법적인 강점을 받게 되었으며 일제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을 하고 패망한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1910년 8월 29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이 직접 조약에 참여했다. 

이완용 내각 총리.[사진= 신수용 닷컴].png
이완용 내각 총리.[사진= 신수용 닷컴].png

그러나 고종황제로부터  이완용과 이재면이 제대로 된 전권 위임을 받은 적이 없어 이 조약은 원천무효다.

또한 조선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전권 위임하는 규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전권 위임을 받았다 해도 그런 전권 위임은 원천 무효이다.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일본의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이재면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 1주일 동안 발표를 안 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 순종 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가 찍혀 있었을 뿐 조선의 국새가 찍히지 않았고 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

경술국체를 계기로 일제는 일본내 엘리트를 모집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경술국치를 감행했다.

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은 일제는 즉각 조선의 관청과 한국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 통합, 폐지시켰고 1434명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조선인 고등관들을 모조리 해고했으며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경술국치이후 테라우치 일제 조선총독부 통감과 일본인들과 친일파인사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경술국치이후 테라우치 일제 조선총독부 통감과 일본인들과 친일파인사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신수용 닷컴].png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제로 낮춰졌다.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친일인사 이완용등 75명에게 은사금을 줬는데, 총액은 605만 엔(한화 약 6600만 원)에 이른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과 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조선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본국가의 군주정도로 대접해 주었다.

때문에 이 경술국치의 조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기위해 이준열사가 네델란드 헤이그의 만국회의에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완용과 고종황제의 형인 이재면이 일제와 한일 합병조약을 맺을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했다는 거짓 문서.[사진= 신수용 닷컴].png
이완용과 고종황제의 형인 이재면이 일제와 한일 합병조약을 맺을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했다는 거짓 문서.[사진= 신수용 닷컴].png

자결.순국자는 경술국치 당시에 가장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절망에 자결했다.

충남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순종임금.[사진= 신수용 닷컴].png
순종임금.[사진= 신수용 닷컴].png

고위 관료를 역임한 장태수, 이재윤, 송도순, 정동식, 김석진, 이만도 등도 이때 순국했다.

기록에 의하면, 1912년까지 약 51명이 순절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찍이 행적이 증명되어 1960년대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기도 했다.

앞서 경술국치를 전후해 고종과 의친왕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고종은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초기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이인영·민종식·신돌석·정환직·허위 등은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거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는 국권 상실 이후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져, 1920년대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직간접적으로 황제와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국왕에의 충성과 국가에의 충성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옛 사상체계에서 ‘근왕’, 즉 임금을 도와 난리를 평정한다는 이념이 큰 대의명분이 되었던 까닭도 있고, 일본의 지배가 철저한 국내나 떠돌이 신세인 해외에서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이 투쟁의 자금원으로 절실하게 쓰인 이유도 있었다.

경술국치를 일제가 선전한 경축 우편엽서.[사진=신수용 닷컴].png
경술국치를 일제가 선전한 경축 우편엽서.[사진=신수용 닷컴].png

고종은 황제직속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창설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제국익문사는 친일파 감시, 안중근 구명 시도, 독립군에게 자금 전달, 정세 보고등을 하였다. 

고종은 1919년 파리회의에 의친왕을 특사로 보내려 하지만 일제의 독살로 실패했다.

이후 순종은 자신이 '한일병합조약'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겼다.

순종은 1926년 4월 26일 붕어(崩御) 직전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일본을 가리킴)이 역신(逆臣)의 무리(이완용 등을 가리킴)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는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를 남겼다.

태극기.[사진= 독립기념관 제공].png
태극기.[사진= 독립기념관 제공].png

이와함께 김좌진.안중근.나석주.윤봉길.유관순.이봉창의사와 열사, 이승만.김구등의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됐다. 

이와중에 국모인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는등 국권상실의  뼈아픈 역사, 경술국치다.

##일부 내용은 신수용 닷컴과 나무위키를 인용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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