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 진정한 취미일지도 모릅니다. 골프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인생 연구이니까요. 세월을 살아보니 인생은 두 분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일>과 <놂>입니다.
최근 제 관심은 <놂>에 있습니다. 놂이란 ‘놀다(play)’의 명사형으로, 제가 일의 대비되는 표현으로 고른 것입니다.
<일>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삶>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워라밸이 그것입니다. 워라밸은 '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합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일만 강요하지 말고 일의 대척점에 있는 삶의 균형도 고려하라는 개념으로 나온 표현입니다.
그러나 일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일을 제외한 나머지를 무엇이라고 설명하여야 하는데, 우리말에 적절한 표현이 없습니다. 영어에서는 일의 반대 개념으로 leisure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라틴어 ‘lice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허락되다” 혹은 “자유롭다”라는 뜻입니다. 즉, 일에서 벗어나 허락된 자유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leisure 역시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work)이 없는 시간’이라는 의존적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어로 leisure는 주로 ‘여가’로 번역되는데, 여가 역시 ‘겨를’, ‘틈’, ‘사이’ 등을 뜻하며 결국 일과 일 사이의 한가한 시간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여가도 일의 부재에 의존한 개념입니다.
저는 인생에서 일을 뺀 나머지 부분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습니다. <일>은 순수 한국어입니다. 따라서 일의 상대어도 순수 한국어로 붙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놂>입니다.
놀다, 논다, 놀이는 단순히 일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과 <놂>, 이제야 일의 나머지 부분이 단순히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 고유 활동을 가진 개념으로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놂>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인생은 <일>과 <놂>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일>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즐겁거나 재미난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입니다. 직업도 공부도 봉사도 일입니다.
반면, <놂>은 그 자체로 즐겁고 재미난 활동입니다. 행복에 가장 가까운 활동이 <놂>입니다. 긍정심리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의미와 재미의 교차로 있다"고 할 때 그 의미와 재미가 바로 일과 놂에서 비롯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일>은 재미없지만 의미 있는 활동이고, <놂>은 의미와 무관하게 재미있는 활동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1953년 정전 이후로 모든 것을 <일>에 쏟아부었습니다. 일을 잘해야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입시와 각종 시험에 도전하는 이유도 결국 일을 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71년 동안 <일>에 집중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일>의 반대쪽에 <놂>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일>의 반대쪽에 <쉼>만 있었습니다. 예전 주 6일제 시절 일요일 하루 출근하지 않으면 그 시간이 바로 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쉼조차도 <놂>이 아닌, 단순히 다음 주에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지인이 1980년대 일본 가죽 공장에서 근무할 때 겪은 일입니다. 월급이 적어 일요일 늦게까지 다른 가게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월요일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았답니다. 상사가 이유를 물어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일요일 쉬는 것은 다음주 일을 잘하기 위해 충전하라는 의미이니 월급에는 일요일 잘 쉬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랍니다.
이렇게 <쉼>마저도 <일>의 일부였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이론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노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이고, 그래서 "놀고 있네" 라는 비아냥 거리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1950년대 말까지는 '논다'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이후 아동 발달에 놀이가 긍정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놀이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과 놀이를 철학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린 철학자가 있습니다. Bernard Suits(1925-2007)는 저서 <The Grasshopper>에서 유토피아를 상정하며, 게임과 놀이의 본질을 논했습니다. 유토피아는 모든 물질적 필요가 즉각 충족되는 사회이고 도구적 활동(무엇을 위해서 하는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인 활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에게 남은 활동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Bernard Suits는 이때 유토피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 있는 활동은 게임과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 표현으로는 <놂>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이 <놂>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만든 평범한 <놂(놀이)>를 하게 되고, 심하면 남의 <놂(놀이)>를 바라보게 된다. 공부를 하면 누군가가 만든 특별한 <놂(놀이)>을 고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내가 직접 <놂(놀이)> 거리를 만들 수도 있다."
바둑도 체스도 마작도 공부하여야 합니다. 골프도 축구도 농구도 배워야 합니다. 노는 것이 저절로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놂>의 세계를 탐구하고 경험을 넓히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노는 이야기냐고 힐난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과 일 사이 그 짬에 우리는 <쉼>말고 <놂>을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놂>을 사치로 여기고 미뤄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