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38)] 조국광복과 남북통일국가 꿈꾼 거목, 김구 스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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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38)] 조국광복과 남북통일국가 꿈꾼 거목, 김구 스러지다.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1.02.0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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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당비밀당원이자 육군포병소위 안두희에 피격.
-'친일부역자.민족반역자 청산에 나선 국회소장파와 내통구실로 암살'
-72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실체. 배후규명못하고 기록도 없어.
-종신형받은 안두희 1년만에 가석방...6.25참전후 소령진급.
-이승만정권, 백범흔적 지우기와 암살시도, 측근 탄압하다 4.19맞아.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 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해방된 지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국민장 행렬 (1949.7.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제공]
국민장 행렬 (1949.7.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제공]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선생(존칭생략).

김구는 1875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마을 빈농이던 부친 김순영(金淳永). 모친 곽락원(郭樂圓)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시절의 이름은 창암(昌巖)이었다. 골목대장으로 짖굿게 동네 어린이들과 쏘다녔다.

9살되던 해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그 서당에서 늘 우등생이었다.

김구는 창암이란 이름에서 다시 창수(昌洙)라고 고친다. 

 ◇... 일세의 풍운아 백범선생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를 보면, 선생은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았다.

어머니가 손수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 죽침으로 고름을 짜낸 탓으로 얼굴에 마맛자국이 남았다. 

민국 2년(1920)에 아내가 인이를 이끌고 상하이로 건너와 같이 살았다. 본국에서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하니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민국 4년(1922)에 상하이로 건너와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에 신(信)이가 태어났다. [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제공]
민국 2년(1920)에 아내가 인이를 이끌고 상하이로 건너와 같이 살았다. 본국에서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하니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민국 4년(1922)에 상하이로 건너와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에 신(信)이가 태어났다. [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제공]

선생이 소년 시절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를 해서 과거를 보고자 임진년 해주에서 거행되는 경과(慶科: 당시 과거제도)에 응시코자 과장에 갔다. 

글도 모르는 부자들이 큰선비의 글을 몇 백 냥, 몇 천 냥에 사고 파는 부패한 과거 시험 현장을 목격하고는 벼슬길을 단념했다.

선생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풍수와 관상 공부를 했다. 

그는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면서 거울을 앞에다 두고 먼저 자신의 상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아도 천격(賤格)인데다가 빈격(貧格)에 흉격(凶格)일 뿐이었다. 

당신의 못난 얼굴을 새삼 알고 난 선생은 비탄에 빠졌다.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관상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이 좋은 것이 몸이 좋은 것만 못하고, 몸이 좋은 것이 마음이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1906)2열 왼쪽서 다섯번 째 김구[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 제공]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1906)2열 왼쪽서 다섯번 째 김구[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 제공]

백범은 명언에서 용기를 얻은 선생은 '얼굴이 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얼굴만 보면 백범 선생은 미남이 아니다. 

만년의 백범 선생 모습도 그저 수수한 시골 할아버지 상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백성들이 백범 선생을 우리나라 현대사 가운데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로 꼽는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인품, 사상, 인생 역정 때문이다

18세 되던 해인 1892년  동학당에 입도하고 이듬해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을 만났다.

이어  1894년 해주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한국감리교인물사전DB'와  '손세일의 비교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 이승만.김구'를 보면 이무렵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고 기록됐다.

이를 계기로 구한말 성리학의 대가인 거유 고능선(高能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곧 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의 의병에 가담하여 평북 강계를 습격하려다가 재차 실패하여 귀국했다. 

그 무렵, 국내는 갑오경장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됐다.

청일전쟁이후 갑오경장을 반대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그 해 5월 체포, 인천의 감리영(監理營)에 옮겨져 사형언도까지 받았다.

하지만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어 사형을 면했다. 1898년에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한때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입산하기도 했다가 환속(1899)하여 안악에 돌아갔다.

1902년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했으나, 이듬해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이듬해인 1904년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했다. 

을사늑약서[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을사늑약서[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도처에서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이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진남포 엡윗청년회 대표로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에 머물면서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고 그 해 11월 26일, 도끼상소에 참가했다.

 1차 상소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진압되고 수십 명이 체포되자, 상동교회에 다시 모인 지도자들은 상소와 같은 구시대적인 방법을 바꾸어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교육사업에 진력하기로 했다.

이어 그는 고향에 돌아와 1906년 해서교육회 총감, 1908년 안악 양산학교 건립, 1909년 재령 보강(保强)학교 교장 등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 하나도 조국 광복, 둘도 조국 광복, 광복에만 헌신.

 백범은 서울에서  거처를 정하고 우국지사를 모아 '신민회'를 조직, 신민회원인 안창호, 이동녕등과 함께 만주로 옮긴 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키워냈다.

왼쪽부터 안중근의사의 부친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안의사[사진=블로그 wif0691켑처]
왼쪽부터 안중근의사의 부친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안의사[사진=블로그 wif0691켑처]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서간도에 세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으다가 일제에 의해 검거됐다.

일제는 이를 총독암살자금이라고 날조하고 사건을 확대시켜, 그 또한 1911년 1월 5일 황해도 민족지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17년형에 처하였다(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이라 고침). 

또한 황해도 안악에서 양산중학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105인회 사건에 연루,3년형을 살던 중에 총독암살사건에 12년이 더해졌다.

그 후 그는 1914년 7월 가출옥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쓰다가,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거처  1923년 내무국장에 취임했다.

 이어 1926년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國務領) 취임, 1927년 헌법개정으로 위원제로 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취임, 1928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29년 재중 거류민 단장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가 단장을 맡아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이봉창의사와 선서문[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켑처]
이봉창의사와 선서문[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켑처]
윤봉길의사와 선서문[사진=백범기념사업협회켑처]
윤봉길의사와 선서문[사진=백범기념사업협회켑처]

다음해  1월 8일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열사와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사 등을 지도했다.

백범은 윤봉길의 의거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1933년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다.

1939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중경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김구.안창호 이동녕선생등 신민회가 만든 항일독립군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1911년.[사진=국가보훈처제공]
김구.안창호 이동녕선생등 신민회가 만든 항일독립군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1911년.[사진=국가보훈처제공]

1941년 12월 9일, 곧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그 다음날, 그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서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에 진력했다.

 1944년부터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훈련을 준비하다가 본격적인 국내유격전을 전개해 보지도 못한 채, 연합군에 의해 타율로 8·15해방을 맞이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백범 김구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피치 박사 부부 (1948)[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 제공]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백범 김구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피치 박사 부부 (1948)[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 제공]

그는 1945년 11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미군청의 강요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백범의  당시나이는 70세의 고령이었다. 

얼마 뒤인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회의에서 5년간 위임통치를 결정하자,  민족주의자및 우익진영의사들과 함께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8.15 평화 및 해방 1주년 시민경축대회 (미군정청 광장, 1946.8.1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제공]
8.15 평화 및 해방 1주년 시민경축대회 (미군정청 광장, 1946.8.1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제공]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가 조직되어 총리에 취임했다.

 1947년 1월 비상국민의회가 개편된 국민의회 부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투쟁을 추진했다.

 백범의 반탁투쟁 목적은 분명했다. 

그것은 곧 항일 세력의 통합으로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백범은 1947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를 지지했다.

신탁통치반대전국대회 (서울운동장, 1945.12.31)[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제공]
신탁통치반대전국대회 (서울운동장, 1945.12.31)[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회제공]

하지만 평양의 소련군정이 반대하면서 남한내 5.10총선과 제헌국회구성,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반대했다. 

5.10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1948년 4월 중도파인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등과 남북 협상을 했다.

백범과 김규식,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은 남한내 5.10 총선과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된 독립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김두봉등을 만나 평양모란봉극장에서  남북협상관련 축사를 하는 김구[사진= 신수용 대기자db]
1948년 4월 김규식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김두봉등을 만나 평양모란봉극장에서 남북협상관련 축사를 하는 김구[사진= 신수용 대기자db]

 

 그러나 반탁전선을 빙자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던 이승만은 그를 소련의 앞잡이로 내세워 모략하는 등 불화가 계속되었다. 

◇... 백범과 안두희의 인연.

1948년 4월19일부터 같은 해 5월5일까지 북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김일성. 김두봉과 남북협상을 벌였으나, 결과물이 없이 돌아왔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무렵 백범은  한국독립당 조직공작원 홍종만과 중앙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통해 안두희(1917~1996)를 소개받았다.  

 1949년 1월 육군소위인 안두희는 홍종만으로부터 비밀당원으로 입당하라는 말을 여러번 듣고, 드디어 그해 3월 초 입당절차를 밟고 비밀당원이 됐다. 

김구(가운데) 둘째아들 김신 전 공군 참모총장(오른 쪽). 왼쪽 그리고 장남인 김인. 김신 장군은 6.25 전쟁 당시 맹활약해 '김구의 아들' 이전에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로 꼽힌다.1939년 중국 충칭에서 김구의 3부자[사진=공군제공]
김구(가운데) 둘째아들 김신 전 공군 참모총장(오른 쪽). 왼쪽 그리고 장남인 김인. 김신 장군은 6.25 전쟁 당시 맹활약해 '김구의 아들' 이전에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로 꼽힌다.1939년 중국 충칭에서 김구의 3부자[사진=공군제공]

때문에 백범의 거처인 경교장을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고, 종종 경교장  2층의 서재에 머무는 한복차림의 백범을 만나곤 했다.

백범은 첫날 "오, 네가 두희냐?"고 맞아줬다.

"고향이 이북이라지?"

"녜, 평북입니다"

"군무에 매우 고달플 거다. 염심히 배우고 닦아라."

백범은 이미 안두희에 대해 예비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 전부터 엄항섭, 선우진등과 긴밀한 접촉이 있었던 안두희를 두고 한독당 간부들은 '큰 일꾼이 될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안두희는 경교장을 자기집 드나들기 시작했다.
 
안두희는 대포탄피로 만든 꽃 한 다발을 선물로 가져오기도 했다.

뿐 만 아니다. 한독당 중앙당간부들은 안두희에게 포병대 안에서 능력있는 군인들도 비밀당원으로 포섭하라는 명령까지도 받게되었다.

군 수사기관이 안두희로부터 압수했다는 한독당비밀당원증[ 사진=블로그martin8켑처]
군 수사기관이 안두희로부터 압수했다는 한독당비밀당원증[ 사진=블로그martin8켑처]

안두희에게  포섭대상 후보명단을 짜서 당 조직부에 올리게 하고, 안두희는 김학규 조직부장로부터 운동비조로 현금까지도 받기도 했다.

그럭 저럭 비교적 충실한 비밀당원으로서 백범을 보좌하던 안두희는 어느 날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1억5000만달러의 대한 원조안을 상원에서 부결시켰다'는 기사를 읽고 백범을 찾았다.

백범은 이에 대해 "우리는 주권의 나라이며, 자주의 백성이어야 한다. 죽든 살든 우리의 일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여야한다 . 사대주의 사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미국이 까닭없는 이해관계없이 무엇 때문에 군대를 보내고 돈을 주겠느냐? 8.15아후 미군이 남기과간 무기만으로 염려할 것없다. 나머지는 너의들의 정신무장이다. 다른 생각말고 자기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거라" 

안두희에게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반민특위활동에 나선 노일환 제헌국회의원등 6명이 구속되고, 김약수는 피신했다는 기사가 났다.
 
이런 가운데 '김약수는 김구가 보호중'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신문을 듣고 백범을 찾았다.

" 또 그 따위 소리냐? 군인이면 연무나 할 노릇이지, 뭘하는 수작이냐? 그렇잖아도 잡음에 골치가 아프니 지체말고 물러가라"

서울에 위치한 경교장의 2016년 이전의 정면 모습. [사진=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켑처]
서울에 위치한 경교장의 2016년 이전의 정면 모습. [사진=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켑처]

그로부터 이틀후 바극의 마수가 뻗쳐왔다.

당시 황해도 옹진 국사봉전투가 발생했다.

38선 곳곳에서 남북의 잦은 충돌이 일어났지만 이 국사봉전투는 포병부대출동까지 명령하는 대대적인 전투였다고 '전사(戰史)'는 기록되어 있다.

1949년 6월24일, 백범은 돌연 의사를 경교장으로 불러 물었다 
 
"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옛날에 맞은 총탄이 몸안에 남아 왔다갔다하니 재미롭지 못합니다"

"총탄파편이 한 곳에 합쳐있으나,별로 건강에 관계없습니다"

◇... 백범의 최후 비극의 날.

백범의 거처이자 집무실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경교장이었다.

경교장은 최창학의 건물로 해방후 환국한 백범과 측근들에게 빌려준 건물이다.

백범은 늘 검소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독서와 명상은 항상 똑같았다.

음식은 김치와 국 한그릇이 전부였다.

의복역시 검소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와 성경읽기, 서예와 조간신문을 읽은 뒤 아침상을 받았다.

다음엔 청강이 있고, 방문자를 면담했으며 취침전에는 묵상을 했다.

백범이 1945년 경교장 2층 창가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이 자리에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았다. [사진=한겨레신문보도 켑처]
백범이 1945년 경교장 2층 창가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이 자리에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았다. [사진=한겨레신문보도 켑처]

백범의 비극의 날은 1949년 6월26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안두희는 오전 10시 쯤 유산한 아내를 혼자두고 경교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안두희는 '황해도 옹진지구전투에 참전하게 됐다'는 거짓말을 하며 오전 11시 쯤 백범을 면회하고자 했다.

그때 한독당에 재정 후원을 하던 김덕은 선생( 전 백범기념사업회 상무.존칭생략)은 경교장에 전화를 건다.

"거기 경교장이요?"

백범의 비서 선우진이 받는다.

"네.그렇습니다"

"나 김덕은인데 다름이 아니라 백범선생이 염려되어서 전화했습니다. 듣자하니까, 수상한 사람이 그 부근을 서성거리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는데 어쩐지 이상해서......"

선우진 비서는 "아니,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백범 선생께서는 오늘 교외에 나가시는 것도 그만두시고 2층에서  독서와 집필을 하고 계십니다"라며 안심을 시켰다.

밖에서 권총을 찬 채 기다리던 안두희는  12시 45분 선우진 비서의 통해 안내절차도 없이 2층서재로 단신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아들 김신은 유엔위원단의 옹진지구 사찰을 수행하기 위하여 새벽같이 떠나고 없었다. 

김구는 자신이 개설한 염리동 창암학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여교사를 불러 학교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서실에서는 선우진(鮮于鎭), 이국태(李國泰), 이풍식(李豊植) 세 비서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12시쯤에 김구가 잘 아는 강홍모(姜弘模) 헌병 대위가 경교장에 들렀다. 

그는 문산에서 오늘 길이라고 말하고,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면서 기름을 좀 넣어 달라고 했다.

 이국태 비서가 강 대위와 함께 창고로 가서 기름을 넣어 주었다. 

강 대위는 이왕 왔으니까 잠시 김구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겠다고 말하고 안두희에게 양해를 구했다.
  
  창암학교 여교사가 돌아간 뒤 안두희는 강 대위에게 먼저 김구를 뵈라고 했다. 

10분가량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오자 선우진이 안두희를 안내했다.

1948년 4월19일 북행길에 나선 김구. 오른 쪽이 둘째 아들 김신, 왼쪽 선우진비서[사진=신수용대기자 db]
1948년 4월19일 북행길에 나선 김구. 오른 쪽이 둘째 아들 김신, 왼쪽 선우진비서[사진=신수용대기자 db]

백범은 창가의 회전의자에 앉아있었다.

"너냐? 왜 왔느냐?"

"인사를 여쭈려고 왔습니다"

안두희는 다다미방에 꿇어 앉았다.

"저어 지금 옹진 국사봉전투에 참가하게 되어, 저 1진으로 저희 중대가 내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안두희의 능청스럽고 꾸며대는 말에 백범은 염려스런 얼굴로 묻는다.

"아니, 국사봉전투가 그렇게 치열하냐?"

"네. 적의 작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가 봅니다. 목숨을 홍모에 비기는 군인이니까 이번에는 살아서 돌앙리라고 단언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사를 드리러왔습니다"

듣기만 할 뿐 백범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안두희가 먼저 입을 연다.

"선생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이 마당에 임하자 선생님께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백범은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만 있으면서 말한다.

"세상 이목이 귀찮다. 어서 가거라"

"선생님, 저는 이 의문가 이 번민을 풀지 못하면 죽어도 옳은 귀신이 못 될 것입니다"

"또 무엇이냐" 

"지금까지 선생님께 직소하고자 애썼으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하오니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석연히 그 내용을 밝히시어 저의 비뚫어진 의심을 풀어주세요"

"그래 말해보거라"

안두희는 백범의 감정이 누구러지자 본심을 드러냈다.

"(친일경찰. 친일부역자. 민족반역자 청산을 들고 일어나 반민특위를 만든)국회 소장파와 선생님사이에 일찍부터 내통이 되었다고 세상은 아는데 정말 그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아무려면 어떤 가"

"그러시다면 공통된 노선입니까?"

"네 마음대로 생각하렴" 

 안두희는 답을 듣지 못하자 흥분을 했다.

안두희는 그러더니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따지려고 들었다.

"야아, 이놈아. 내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이냐.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백범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이든 종이든 아무것이나 안두희에게 던졌다.  

흥분한 안두희의 손은 허리께로 갔다.

권총이다. 순간 안두희는 닥치는 대로 마구 쏘아댔다.

안두희의 권총난사에 백범이 쓰러졌다.

45구경 미국제 권총탄환이 얼굴에서부터 하복부에 이르기까지 네곳에 명중했다. 
  
앞서 비서 선우진은 김구의 점심을 준비하느라고 바로 지하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둣국이 다 되어 간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선우진이 급하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자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는 권총을 계단에 철커덕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안두희가 쏜 권총 총알이 지나간 김구선생 거쳐이자 집무실인 경교장 2층 유리창을 통해 본 경교장 앞 뜰 (1949.6.26)[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제공]
안두희가 쏜 권총 총알이 지나간 김구선생 거쳐이자 집무실인 경교장 2층 유리창을 통해 본 경교장 앞 뜰 (1949.6.26)[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제공]

곧 적십자사의 의사가 당도했지만 오후 1시쯤 파란많은 민족의 거목 항일독립지사 백범이 74세로 운명했다.

범인 안두희는 2층 계단을 타고 1층에 내려와 "내가 쏘았다"며 군모를 벗고, 소위 계급장을 뗐다.

격분한 비서들이 의자로 안두희를 때려눕히고 후려갈겼다. 

이때에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서너 명이 나타나서 비서들을 제지하면서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경교장의 연락을 받은 서대문경찰서 형사주임 강용주(姜龍珠) 경위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안두희의 손에 수갑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서 형사주임을 막았다. 

이들은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면서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 서둘러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몇 분도 걸리지 않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안두희는 헌병사령부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봐주기 수사와  무기징역→15년감형→10년 감형1년만에 가석방과 소령진급.

 헌병사령부는 이날 오후 2시에 김구의 암살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전봉덕(田鳳德)은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로 체포되어 곧 헌병사령부에 수감중이며 범인이 현장에서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소속과 그 배후관계를 엄중 조사할 것이나, 현재 판명된 정도로는 다만 범인 단독행위인 듯싶다”라고 말했다.
  
 전봉덕은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범행이 단독범인 것 같다고 예단, 국민들의 의혹만 더 더욱 증폭시켰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었던 최대교(崔大敎)의 증언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최대교는 이날 일요일인데도 검찰청에 들렀다가 서대문경찰서장으로부터 김구의 암살사건 소식을 듣고 곧 당직 검사인 이원희(李元熙) 부장검사와 함께 서대문경찰서로 가서 이하성(李夏成) 서장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갔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헌병사령부 순찰과장 김병삼(金炳三) 대위는 최대교도 못 들어가게 했다.

최대교는 헌병이 폭력으로 경교장에 못 들어가게 했다고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현장검증을 할 수 있었다.
  
  최대교는 권승렬(權承烈) 법무장관에게 연락하여 함께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문에는 ‘수렵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꿩사냥을 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의아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 집으로 갔다.

 아프다면서 누워 있던 신성모는 김구가 암살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겠군!”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백범 김구선생. 1949년 6월26일 74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제공]
백범 김구선생. 1949년 6월26일 74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제공]

세 사람이 함께 경무대로 갔으나 이승만 역시 낚시하러 가고 없었다.

 신성모는 그 길로 경교장으로 갔다.
  
  경교장에는 오후 1시가 지나자 조완구, 조소앙, 김창숙(金昌淑), 오세창(吳世昌), 안재홍(安在鴻) 등 지도자들이 달려왔다.

 국무위원 가운데서는 신성모가 제일 먼저 조문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모가 나타나자 깐깐한 성품의 조완구가 신성모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놈, 네가 여기에 왜 왔느냐. 네놈이 부하를 시켜 백범을 죽이고 무엇이 모자라서 또 여기에 왔느냐!”
  
  조완구의 이러한 행동은 1949년 초부터 심심찮게 나돌던 김구 암살 소문이 이 무렵에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안두희는 6월 27일 아침에 특무대로 이송되었다.

 육군본부 보도과는 이날 아침 9시에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발표를 했다가 취소하고 거의 똑같은 내용을 다시 발표하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일생을 조국독립운동을 위하여 분투하신 김구 선생께서 불의의 흉변을 당하게 된 것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손실이요, 군으로서는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그 진상에 관하여서는 목하 엄중 취조 중에 있으나,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안두희는 한독당 당원으로 김구씨의 가장 신뢰하는 측근자인 것.  
  (2) 안 소위는 누누이 김구씨와 상봉하여 직접 지도를 받던 자인 것.  
  (3) 당일은 인사차 김구씨를 만나러 갔다가 언론쟁투가 되어 격분한 결과 순간적으로 살의를 발생한 것.
  
  그 외의 상황은 아직 문초 중이므로 추후 상세한 것을 발표하겠다.”
  

토백범암살범인 안두희가 선생의 서거43년만인 1992년 4월13일 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사살했다고 밝혔다는 동아일보 당시 기사. 암살전 대통령 이승만은 만났다고도 했다[ 사진=블로그nada5582켑처]
토백범암살범인 안두희가 선생의 서거43년만인 1992년 4월13일 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사살했다고 밝혔다는 동아일보 당시 기사. 암살전 대통령 이승만은 만났다고도 했다[ 사진=블로그nada5582켑처]

헌병사령부는 6월 27일 저녁 무렵에 경교장에 있는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검거하여 중부서에 유치했다.

 김학규는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게 안두희를 면담하도록 요청해서 몇 차례 면담시킨 일이 있으므로 그 관계를 조사해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6월 28일에는 육군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이 안두희의 범행이 개인행동이고 군과는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김구 선생 저격범인에 대하여는 범인이 군인인 점에서 헌병이 취급하게 된 것이며, 일부 조사 결과 이번 범행이 하등 군내에는 관련성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 … 군인이 정치에 간섭을 한다거나 관여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더욱이 군인으로서 정당에 정식 혹은 비밀을 논할 것 없이 당원으로 입당하였다는 자체부터가 절대적으로 용허치 못하는 것이다.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마치고 인정전 앞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 (1947.7.1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켑처]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마치고 인정전 앞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 (1947.7.15)[사진=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켑처]

  이번 범행의 동기가 확실히 개인적 행동이고 결코 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하며 … 군은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으로써 국방에 만전을 기하며 악질 공산도배들을 하루바삐 완전히 소탕하여 남북이 격리되지 않는 완전된 국토 위에 대한민국의 빛나는 기초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뿐이다.”

  육군본부 보도과가 7월 20일에 발표한 장문의 안두희 수사결과 발표했다.

수사결과에 국민들을 다시 크게 놀랐다.

 발표의 요지는 이렇다.
  
  안두희는 한독당에 입당한 뒤에 여섯번 김구를 만났다. 

안두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독당과 김구의 사상 및 정치노선에 대하여 점차 회의를 느꼈다.

 그것은 (1) 5·10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부인, (2) 평화통일의 이름 아래 공산당과의 제휴 기도, (3) 한독당 중요 간부에 북로당원 포섭, (3)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 기도, (4) 미군철퇴를 주장하고, 철퇴 뒤에는 군사고문단 설치 절대 반대, (5)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반대, (6) 북한정책의 합리성은 찬양, (7) 남한 정부의 혁명가에 대한 박대를 공격, (8) 남한에서 조만간 일대 쿠데타(소위 의거) 발생 예언이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안두희는 탈당을 의도했으나 탈당한 뒤의 테러의 위험성을 우려하여 고민하다가 김구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하여 범행 당일 경교장을 방문했다.
  
  김구는 이날 안두희에게 대포의 성능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고, 안두희가 영등포 포병대에서 경무대나 중앙청을 향하여 정확히 조준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김구가 만열(滿悅·만족하여 기뻐함)하는 것을 보고 김구의 노선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당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논쟁 끝에 사살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사발표는 사건 모의자들의 김구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안두희는 8월 3일부터 6일까지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을 받았다. 

그의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43조 군인의 정당 가입 금지 위반과 김구 살해였다. 

제1공화국드마라중 안두희재판과정[사진=네이버카페historydrama켑처]
제1공화국드마라중 안두희재판과정[사진=네이버카페historydrama켑처]

안두희는 육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석 달 뒤에는 15년으로, 1950년 3월에는 1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것은 유례없는 ‘초고속 감형’이었다.

서울 육군형무소에서 복역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감자 중 15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모두 처형하는 가운데 안두희는 참모총장의 지시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나 바로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잔형을 면제받았고 대위로 전역(轉役)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 복권(復權)되었다.

안두희는 제대한 뒤 군납 공장 등을 운영하며 적잖은 큰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잇단 테러와 위협 때문에 이사를 자주갔고 미국 이민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 암살 배후 조사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4.19혁명 이후 진행됐다

1992년 안두희는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김창룡으로부터 김구 살해를 지시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안두희는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1961년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간사 김용희는 추격전 끝에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녹취하고 검찰에 넘겼다.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흉기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시 중구 자택에서 당시 버스기사였던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숨졌다.

◇...이승만, 밤중에 백범서거 애도방송...장례는 국장지시
  
  이승만은 이날 저녁 9시가 넘어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애도방송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오늘 암살을 당하신 보도를 들은 나로는 놀랍고 담한(膽寒·매우 놀라서 두려움)해서 말이 잘 아니 나옵니다.

 범인이 잡혔다 하니 무슨 주의로 이런 일을 행하였으며 이것이 개인행동인지 연루자가 있는지를 엄밀히 조사해서 일일이 공포하고 범인은 법대로 처벌할 것입니다.
  
  한인들이 어찌해서 이런 만행을 범하는지 과연 통탄할 일입니다. 공사간에 원혐(怨嫌)이 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면 끝까지 법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개명한 사람이 행할 일입니다.

하물며 이로운 사람을 살해하고 어찌 그 백성이 개명한 사람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많은 사람들이 경교장을 찾아 문상하며 통곡했다. 남북협상을 추진한 김구는 이승만 세력에게 사실상 ‘빨갱이’와 같은 존재였다.[사진=한겨레신문보도켑처]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많은 사람들이 경교장을 찾아 문상하며 통곡했다. 남북협상을 추진한 김구는 이승만 세력에게 사실상 ‘빨갱이’와 같은 존재였다.[사진=한겨레신문보도켑처]

백범 선생이 살해당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손해를 주게 된 것을 통분하여 마지아니합니다.
  
  지금 민국정부가 성립된 지 1년이 다 못 되었어도 우리 우방들이 많이 도와서 민주주의가 잘 발전되는 것과 관민합작으로 치안을 잘 유지하여 나가는 것을 칭찬하며, 미국에서는 트루먼 대통령 이하 여러 당국이 우리에 대한 경제원조로 1억 5,000만불을 국회에 요청하여 며칠 안으로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한인들만 합심합력하여 잘해 나아가면 다같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인데, 어찌해서 이런 불법행동을 행하여 저의 목숨에 해롭고 나라와 민족에게 누를 끼치게 하는지 생각할수록 통탄할 일입니다.”
  
  이승만은 이어 김구와 자신의 오랜 협력관계를 조근조근 언급하면서 “어공어사(於公於私)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구와 이승만[ 사진= 신수용대기자 db]
김구와 이승만[ 사진= 신수용대기자 db]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私分)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해내 해외에서 백범 김구 주석을 사모하는 모든 동포는 한줄기 뜨거운 눈물로 그분의 죽음을 조상하며 따라서 그분이 평생 애국애족하는 대의를 본받아 그 사업을 계속 완수하기를 결심하기로 다같이 맹세하기 바랍니다.”
  
  이무렵  주한 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 는 6월 27일에 김구의 암살사건을 본국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방송내용도 따로 번역해서 송부했다. 

무초는 보고에서 “장례식에서 소란이 있을지 모르나 정부가 그러한 상황에 충분히 대처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1949년 6월 김구선생이 서거한 뒤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는 보도. 위적 영원히 청사에 찬연. 김구선생 작일 국민장[사진=한민족 일상의례사전]
1949년 6월 김구선생이 서거한 뒤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는 보도. 위적 영원히 청사에 찬연. 김구선생 작일 국민장[사진=한민족 일상의례사전]

김구의 장례문제만 논의하기위한 국무회의가 대통령 이승만 주재로 6월 27일 오전에 경무대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김구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고 재무부 장관, 사회부 장관, 보건부 장관이 대표로 장소와 시간 등에 관하여 경교장 치상회(治喪會)와 상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저격범의 처벌은 단시일 안에 완료하고 진상을 조속히 발표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한독당이 국장이라는 격식을 완강히 사양함에 따라 김규식의 타협안으로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6월 28일에 열린 제62회 국무회의는 이승만의 지시로 장례위원회에 600만원을 예비비에서 지출할 것 등 국민장에 따르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의결했다

김구의 암살을 이승만이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6월 28일에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비밀 비망록에 잘 표명되어 있다.

 이 비망록은 국회프락치사건 등을 포함한 당면 문제들을 설명한 것이었다. 

김구의 암살사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김구의 암살이었습니다. 그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남한 각 도에 걸쳐서 이전의 임시정부를 확고히 지지할 그룹들을 조직하여 내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준비하느라고 반정부 선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어요. 국민들 사이에는 그의 비애국적인 성명이나 행동을 비난하는 강한 감정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살 뉴스가 전해지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어요.
  
  암살자는 김구가 신뢰하는 육군장교이고 자주 방문하여 비밀회담을 했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모든 의혹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독립당에서 전략적 입장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알려졌습니다.”
  
  이승만은 김구 암살 당일의 정황을 나름대로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백범 김구선생과 백범 암살범인 안두희[사진=블로그 parkkyu켑처]
백범 김구선생과 백범 암살범인 안두희[사진=블로그 parkkyu켑처]

“(범인이) 충분히 건강이 회복되면 그의 동기와 또 그의 배후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밝혀 내게 될 것입니다.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러한 사실들을 어느 것도 인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사가 끝나면 그들이 이 불행한 사건의 전모를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승만의 백범서거 기자회견과 제헌국회연설.

국내외 언론들은 김구의 일대기를 쓰기에 바빴다.
 
당시 AP는 '백범이 이 겨레 애국지사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불타는 애국심에 못이겨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 동기만은 높이 평가되어야할 일이다', 

' 백범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대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광복에 헌신한 공로ㅗ와 함께 조국의 완전통일을 이룩하고자 맨앞에서 잦은 시련을 맛본 수잔자 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범은 일생을 통해 사(私)를 취한 적이 없다'

 또다른 외신은 '백범이 귀국한 뒤 피살직전까지 생활비는 몇몇사람의 도움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의 인세로 충당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은 이어 6월 30일에는 외국기자들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발표의 직접적인 동기는 AP통신이 김구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마치 한국에 위험한 사태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듯한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 성명에서 김구 암살사건의 원인을 당내 노선투쟁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만한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때에 모든 사실을 일반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의 법정에서 용의 깊게 검토될 이들 사실은 김구씨의 살해가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 의견차이의 직접적 결과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불합치는 결코 당 자체밖에는 알려진 일이 없으며, 김구씨의 추종자가 동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우리 전국에 비애를 초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미국방첩대요원)와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관동군 헌병출신) 특무대장[사진=블로그 물길손길켑처]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미국방첩대요원)와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관동군 헌병출신) 특무대장[사진=블로그 물길손길켑처]

이승만은 그해 7월 1일부터 열린 제4회 국회(임시회) 개회식에 참석, 치사했다.

이승만은 서두에서 김구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했다.
  
  “내 말을 시작하기 전에 국회와 정부와 전민족이 다같이 놀라하며 슬픔을 당한 백범 김구 선생의 살해사건에 대하야 우리가 서로 조사(弔辭)하는 뜻과 위로하는 말을 한마디 아니할 수 없는 터입니다

. 원래 암살이라는 것은 개명한 나라 사람들의 극히 꺼리는 바입니다. 우리가 개명한 사람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크게 수치롭게 여기는 바이며, 더욱이 국가의 특수한 지도자요 애국자로서 우리가 다같이 숭배하는 김구 선생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우리가 더욱이 얼굴을 들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의 변을 인연하야 우리가 일체로 애통하는 중에서 우리 민족의 단결심이 더욱 공고해서 민국 기초를 건설하는데 더욱 많은 공헌이 된다면 이는 김 주석의 평생 나라를 위해서 공헌하자는 목적이 완수되는 것입니다. 

정부와 국민이 합해서 국민장을 거행함으로 마지막 영생송사(迎生送死)의 전송을 하는데 유감 없기를 바랍니다.”
  
  같은 날 신임 헌병사령관 전봉덕과 서울시경찰국장 김태선(金泰善)은 공동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38선 일대와 남한 각지의 공산당의 무장반란, 남로당 국회의원 체포, 김구 급서 등으로 국내는 비상 정세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군경이 건재함에 신뢰하고, 항간에 유포되는 조언비어(造言飛語)와 사실을 왜곡하여 정치적 야욕으로 모략 선동함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지며 생업에 일층 전력을 다하고 군경에게 절대적인 협력을 바란다”.
  
  중국군 헌병대령 출신으로서 중국에 있을 때부터 김구를 받들었던 전임 헌병사령관 장흥(張興) 대령은 어이없게도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일선 사단장으로 전출되어 항간의 의혹을 샀다.

◇...백범의 국민장...국민적 울분.

 백범이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했다는 국민적 비극의 울분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경교장은 국내외 경향각지에서 몰려든 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안두희로부터 피격직후 백범 김구[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안두희로부터 피격직후 백범 김구[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살을 에이는 듯한 비통한 울음소리는 산천초목을 뒤흔들었다.

백범의 유일한 혈육인 공군소령 김신은 이날 옹진 국사봉전투에 참전했다가 비보에 놀라 이날 오후 7시 경교장에 도착했다.
 
김신은 에워싼 조문객을 볼사이도 없이 2층빈소로 올라가 고인이된 싸늘한 선생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이를 지켜본 조문객들은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국민장에 즈음해 이승만과 3부요인들이 애도의 글을 냈다.

대통령 이승만은 특별방송을 통해 '선생의 애국대의를 계승하자'고 했다.

해공 신익희 국회의장은 '국가민족의 대 손실'이라며 애도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민족 장래의 통탄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김구의 영결식은 7월 5일 오후에 서울운동장에서 전무후무한 많은 인파가 참가한 가운데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백범의 국민장은 10일 간으로 결정, 전국 각지에서 연일 눈물바다가 됐다.
 

백범김구선생이 안두희의 저격당시 입으신 저고리[사진=블로그ksb115205]
백범김구선생이 안두희의 저격당시 입으신 저고리[사진=블로그ksb115205]

백범과의 작별은 그해 7월6일 6시50분, 영구는 좌우 100명씩의 호상원들의 어깨에 맸다.

'님은 가시나이까,님은 들으시나이까. 이 나라 이 겨레를 드고 어디로 가셨나이까......'

중등학교 종합 브라스밴드의 주악을 따라 천천히 용산의 효창공원에 이른 것이 저녁 6시 25분이었다.

시인 박두진은 백범에 대한 '오호 백범선생'이란 추모시를 남겼다.
'우뚝한 바위 있더니
모진 눈보라 거센 비바람 어엿이 견디시고 
솟아있는 오롯한 푸른 뫼뿌리 시더니
뫼 무너지듯
아으 크낙한 바위 무너지듯
온 겨레 가슴 징징징 깊으게도
서러웁게 울려놓고 가시었도다.

나라 위하여 뜨거이 피 뛰는 가슴으로 막아내시던 
적의 쏜 탄환 하나 아직도 뽑지 않고 가슴에 지니신 채
이는 또 오호! 쏘는 스스로의 겨레에게
너머 지시었도다.

나라를 찾기 위해 나라를 떠나
머언 쓰리게도 이역에 오십년을
내 살인듯 고국강산어루만져 바라보며
이슬을 찬 삼고
풀밭에 잠을 이뤄

적과 또 불의의 앞에 서는
아으 포효하는 노수요 부디치는 우뢰요
바람을 이르키는 불길이시더니

아으 나랏일 다 이루음 못보시고
겨렛일 가슴에 아프게 안으신 채
뫼 무너지듯 커다란 바람 잠자듯 물결 쉬듯
아으 잘 감기시지 않는 눈 감으시고 가시었도다.

―뒷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백범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백범 김구선생 빈소[사진=블로그 ksb115205]
백범 김구선생 빈소[사진=블로그 ksb115205]

장지에는 깊이 7자, 깊이 12자, 폭 7자의 동남향으로 금정(외광)이 마련되고, 그 안에 관이 들어갈 만한 내공이 마련되 백범의 영구를 하관했다.

다섯개로 만든 뚜껑이 하나씩 덮이고, 내광앞에는 백범이 쓰던 유물로 모필과 벼루등이 놓였다.

그리고 입사가 시작됐다.

오후 7시 10분 마지막기도가 있고 찬송가가 울려퍼졌다.

이것으로 나라의 기념비적인 독립혁명투다 김구선생의 일생이 모두 끝나게 된다.

언급했듯이 국민장의 경비는 900여 만원이었으나, 이가운데 600여만원은 정부가 보조했다.
 
김구의 암살미스터리는 72년이 지난 지금도 수수께끼다.

속시원하게 진실이 규명하지 않은 채, 덮어졌다.   

드러난 것은  남북한 분열을 반대하고 자주통일독립국가를 만들자는 백범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거나 청산의 대상인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매도하며 권력을 누려왔다는 점이다.

이루지 못한 친일청산, 민족반역자 단죄가 이승만정권의 반공과 합작이 되어 매도되고, 음모된 희생량이 된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백범김구선생 국민장 장례행렬[사진=블로그ksb115205]
백범김구선생 국민장 장례행렬[사진=블로그ksb115205]

그도 그럴것이 백범 암살사건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시간이 갈수록 변질됐다.

백범에 대한 암살시도가 여러차례가 있었다. 

김구의 암살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부터 그 배후에 대한 강력한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완벽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수사기록이나 공판기록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1949년 7월 연명한 백범에게 5.6 사건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뒷늦게 알려진 것은 두차례의 암살기도...백범측근 탄압.

정부기관의 기록으로는 사건후 40년이나 지나서야 구성된 국회법률사법위원회 백범암살진상조사 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姜信玉)가 1993년 5월부터 3년 동안의 조사 끝에 발표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조사보고서'가 유일하다.

 물론 이 '조사보고서'로 김구암살사건의 진상, 특히 사건의 배후와 관련된 진상이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 

'조사보고서'는 ‘맺음말’을 다음과 같이 썼다.
  
  “백범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다. …
 

전국에서 전무후무한 인파가 몰려든 김구선생의 국민장[사진=신수용대기자 DB]
전국에서 전무후무한 인파가 몰려든 김구선생의 국민장[사진=신수용대기자 DB]

백범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이다. 

대통령 이승만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사건에 대한 사건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구암살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였다.

 김구암살 계획은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 단원들이 한독당에 가입하면서 구체화되었다.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는 서북청년단 태평로 지부로 가서 서북청년단원 10여명의 입당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안두희는 김학규에게 접근, 1949년 4월 14일자의 한독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백범 김구선생을 저격한 암살범 안두희가 사후에 낸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라는 책 (안두희 지음. 타임라인 펴냄 2014)
백범 김구선생을 저격한 암살범 안두희가 사후에 낸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라는 책 (안두희 지음. 타임라인 펴냄 2014)

당원증에는 군복을 입은 사진을 붙이고 ‘비(秘)’자의 도장을 받아, 뒷날 재판정에서 한독당 비밀당원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범행을 지휘한 인물은 포병사령관 장은산(張銀山) 중령이었다. 김구의 암살은 6월 하순에 이르러 세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다.

 첫번째는 국회프락치사건의 2차 검거가 진행중인 6월 23일 밤에 실행되었다.

 정치브로커 김지웅(金志雄) 휘하의 서북청년단원들인 홍종만(洪鍾萬), 한국용(韓國用), 이춘익(李春翼), 독고녹식(獨孤綠植), 한봉수(韓鳳洙), 정익태(鄭益泰)와 포병사령부의 초급장교들인 안두희, 오병순(吳炳順), 한경일, 강창걸 10명이 경교장에 숨어 있는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를 체포한다는 구실로 경교장을 습격하여 김구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실패하고 김약수는 6월 25일 새벽에 운니동에서 체포되었다.
  
  두번째 시도는 이틀 뒤인 6월 25일에 진행됐다.

암살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은산은 김지웅, 안두희, 홍종만을 불러 김구가 6월 25일에 공주에서 있을 건국실천원 양성소 10기 개교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중간 지점인 수원 병점고개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구의 공주행은 전날 밤에 공주경찰서에 의하여 행사가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25일 오전 6시쯤에 전화를 받은 김구는 “이제는 내 발마저 묶어 놓으려는 것인가?” 하고 불쾌해했다.

 이 무렵 이승만과 정부관계자들은 김구가 각 지방에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개설하고 다니는 것을 반정부 캠페인이라고 위험시하고 있었다.
  
백범이 서거한 뒤 4.19의거까지 백범의 측근은 엄청난 시련을 받았다.

국민들이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선생묘지를 찾아 침례하는 것은 사복경찰들이 막았고, 일일히 체크해 돌려보냈다.

이승만 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백범 김구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 사진=블로그 ksb115205]
백범 김구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 사진=블로그 ksb115205]

백범선생의 추도식도 단 한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측근중에는 경찰의 탄압에 못이겨 목숨을 걸고 월북하는 일까지 생겼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경찰이 끌고가, 무진 고문으로 고생한 이도 한 둘이 아니었다.

백범묘소를 밀어내고 국제 경기장을 만들려고 추진하다 들통나기도 했다.

백범김구의 흔적조차 지우려는 이승만 정부의  비행은 날로 높아갔다.

일생을 조국 광복에 바치신 백범이 대해 자유당정권은 가혹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를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파고다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언제 땅에 떨어질지 모르고 그런 수작이냐?"

심산선생의 예언은 4.9혁명이란 정의의 물결앞에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백범 사후에 많은 이는 백범사상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측의 설명을 보면  백범의 사상적 지향은 셋으로 요약된다. 

첫째, 군사 통치의 배격­이는 미·소 양국에 의한 점령군 통치, 나아가 미·소에 의한 세계 분할과 강대국의 자기 생존을 위한 동서냉전 이데올로기를 배격하자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미·소 양군은 철퇴하라”는 말에 분명히 드러나며, 이 점에서 백범의 사상은 2차 대전 이후 동서냉전에 대립하는 최초의 아시아적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백범김구선행의 경교장에 세워진 흉상[사진=블로그 ksb115205]
백범김구선행의 경교장에 세워진 흉상[사진=블로그 ksb115205]

둘째, 반외세 반제국주의 투쟁­그는 조국의 분단을 강요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이 일제와 동일한 침략자임을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이 단독정부를 옹호하며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박탈하는 한 똑같은 침략자임을 분명히 했다.

 즉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과 일치할 수 없는 일체의 외세는 모두 물러가라는 것이다. 

셋째, 두 개의 한국 반대, 즉 통일의 쟁취­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그것도 독립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분단을 합법화하는 것이다.

 그는 분단의 합법화가, 곧 민족의 자주통일 운동을 합법적으로 적대시할 조건으로 변한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것이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한국감리고 인물사전DB(기독교 대한감리회)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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