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8-1)] 백척간두위기의 6.25동란...인천상륙작전으로 대역전
상태바
【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8-1)] 백척간두위기의 6.25동란...인천상륙작전으로 대역전
  • 신수용 정치대기자
  • 승인 2023.09.15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진격... 부산일대 남기고 국토 모두 점령당해
- 맥아더, 인천.군산.주문진등 놓고 상륙작전계획으로 적의 보급로 차단해 서울탈환 계획
- 미 합동참모본부의 인천상륙작전 반대했다가, 맥아더 설득으로 최종승인
- 인천아닌 다른 항구 공격해 인민군 관심끌게한뒤 9월 15일 새벽 상륙작전감행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사진= 신수용 닷컴].png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사진= 신수용 닷컴].png

 

9월15일은   6.25 한국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날이다.

한때는   '맥아더의  날'이라고도 불렀다.

73년전 이날은, 한국전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의 날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당시 인천상륙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가 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인민군대에게 부산.영덕 일대만 남기고 다 빼앗긴 풍전등화(風前燈火)상태에서 한국을 구한 인천상륙의(仁川上陸作戰, 영어: Operation Chromite)의 작전명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석달후인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000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다. 

인천을 수복한 유엔군은 이후 13일동안 인민군의 병참선(보급로)등을 차단하고 서울로 진격하는 계기가 됐다.

 
1950년 9월15일 이른 아침 인천상륙작전.[사진=네이버블로그 byungchi켑처png.png
1950년 9월15일 이른 아침 인천상륙작전.[사진=네이버블로그 byungchi켑처png.png

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당시 극동미 사령관)가 6.25발발 나흘만인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으로 시작됐다고 전사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에따라 구체적으로 7월 22일 미제1기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RCT)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 (Operation Bluehearts)'이 게획됐으나 전황이 불리한데다, 미 본토에서의 상륙부대 배치가 늦어지면서 취소되기도 했다.

그후 금강전투, 대전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천이 낙동강과 부산 교두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인민군이 거의 방어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노렸다.

6,25 동란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전력이 열악한 상태에서 카빈총으로 적을 맞선  국군장병들이  3.km앞에 벌어진 적의 포격에 응사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6.25 전사].png
6,25 동란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전력이 열악한 상태에서 카빈총으로 적을 맞선 국군장병들이 3.km앞에 벌어진 적의 포격에 응사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6.25 전사].png

인천기습 상륙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유엔군은 손쉽게 인천을 점령하여 서울까지 탈환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보급로를 차단 당하게 되었다.

◇···6.25 전쟁후 미국과 유엔 참전막후.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유엔은 인민군의 침공을 받은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인민군의 침공에 반격하고,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극동에서의 미군 병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꾸준히 약화된 상태였다.

일본에 있던 미국 제8군의 24보병사단이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미군이었다. 

당시 일본 내의 재일 미군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은 조직력이 약했고, 사단 대부분의 무기는 구식이었다.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을 사단장으로한 24보병사단은 급하게 한국으로 파병했다.

미 24보병사단은 인민군의 충격 공세를 처음으로 맡은 한국에 파병된 미군 부대였다. 

이들의 임무는 인민군의 침공을 최대한 지연시켜 후속 부대의 도착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6.25 당시 대전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 24사단 장병들[ 사진=라이프지].png
6.25 당시 대전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 24사단 장병들[ 사진=라이프지].png

미 제24 사단은 제7보병사단과 25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등의 미국 제8군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몇 주간 홀로 인민군의 침공을 지연에 주력했다.

하지만 24보병사단은  7월 5일 첫 참전한 오산 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당했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인민군 사이의 첫 전투였다.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의 패배 이후 첫 한달간  24보병사단은 지속적으로 패배했다.

인민군의 수적 및 물적 우세로 계속 남하해야 했다. 

24보병사단은 천안 전투, 평택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충청도 일대까지 후퇴해야 했다.

 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고, 7월 20일까지의 전투 끝에 거의 궤멸되었다.

 그 시기 동안, 제 8군의 전투 병력은 인민군의 수와 거의 비슷했고 새로운 유엔군 병력 또한 매일 한국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개전초 전황과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UN군.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크게 압도한 상태에서 파죽지세로 몰아 붙였다

인민군의 전략은 주로 포위, 섬멸 작전이었다. 

그들은 국군과 유엔군을 밀어붙인 후, 좌우 양 측면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위아래를 보자기로 감싸듯이 섬멸하는 전략이 주 전략이었다

6.25 동란 개전초기 금강지역 전장에 작전회의를 벌이는 미군 수뇌부들 가운데가 딘소장  왼쪽 워커 미8군단장(중장_[ 사진=전쟁기념관 제공].png
6.25 동란 개전초기 금강지역 전장에 작전회의를 벌이는 미군 수뇌부들 가운데가 딘소장  왼쪽 워커 미8군단장(중장_[ 사진=전쟁기념관 제공].png

이 작전은 6.25 개전 초부터 금강전투, 대전전투등까지  8월 초까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그만큼 인민군은 사기가 충천해 남녘으로 더욱 진격할 수 있었다.

수원 평택 오산 천안 라인이 무너지고 금강방어선이 무너지고,일리엄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 24사단마저 대전전투에서 패해 부대 해체선까지 가면서 아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8월 초가 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다. 

더 이상 물러나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그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른 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시작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쪽과 서쪽의 2면만 방어하게 되자 더 이상 인민군에게 양측면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인민군은 이제까지 재미를 봤던 포위, 섬멸 작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하여 병력과 무기, 전쟁물자를 빠르게 보급받게 됐다.

때문에 인민군이 6.25 전쟁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위를 점차 상실되었다.

◇···조선인민군의 8월, 9월 공세.

인민군은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전의 포위. 섬멸 전술을 다시 썼다.

'6.25 전사'를 보면 당시 상하좌우를 포위할 4개의 공격축을 설정하고 전투를 치렀다. 

그게 바로 부산 교두보 전투였다. 

마산과 전투산, 낙동강 일대, 대구, 칠곡 등에서 인민군의 공격에 국군.유엔군 간의 격전이 치러졌다.

포항에서는 국군이 인민군 3개 사단을 격퇴시켰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사진= 6.25 전쟁사].png
낙동강 다부동 전투...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사진= 6.25 전쟁사].png

인민군의 공격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자 인민군의 8월 공세도 시간을 끌게 되었다.

그러자 인민군의 전략은 6.25 전쟁 개전초에 쓰던 전략전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8월 말,인민군은 공격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인민군의 대다수 부대가 커다란 병력 손실을 입어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인민군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보급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식량, 무기,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병력을 대신하여 투입된 병력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가능케 할 만큼의 보급을 받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다.

9월 1일 인민군은 최후의 공세인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했다. 

목적은 오직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였다. 인민군은 이번에 4개가 아닌 5개의 공격축을 설정했다.

 이 공세에서 유엔군은 허를 찔려버렸다. 인민군이 국군과 유엔군을 거의 압도할 수 있다고 예상되었다.

그러자 인민군은 경주를 공격했고, 대구와] 가산을 포위했다.

그러면서  낙동강을 다시 도하하여 영산을 향해 진격했고],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을 점령하고자 했다.

전사를 보면 6.25전쟁의 전투 중 대전전투에 이어  가장 참혹한 전투로 적고 있다.

결과는 국군과 유엔군의 완승였다.

낙동강 방어작전 중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는 미군 전차.png [사진=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png
낙동강 방어작전 중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는 미군 전차.png [사진=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png

인민군의 공세를 국군과 유엔군의 합동작전에 힘입어 효과적인 방어로 막아낸 것이다.

인민군은 두 번에 걸친 공세의 실패로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게 되자,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인민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도 버겁게 됐다.

◇···역전의 기회잡은 상황...찬.반속에 인천상륙 작전 계획

미국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서 이 상황을 뒤집기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갔다.

그게 바로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다.

또한  주요 상륙지로는 총 3개 지역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인천상륙작전(100-B), 군산상륙작전(100-C), 주문진상륙잔전(100-D)이 그것이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끌고 있는 일본 도쿄의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보부에서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하여 관련부대에 하달했다.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애초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이 마련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 초안이 7월 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되었다.

유엔 안보리 결정에 따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하는 미 제24사단장병과 기갑부대원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유엔 안보리 결정에 따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하는 미 제24사단장병과 기갑부대원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맥아더 사령관이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100-B, 작전 100-C, 작전 100-D의 세 가지 안을 제출하였다. 

작전 100-B는 서해안 중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고, 작전 100-C는 군산에, 그리고 작전 100-D는 동해안 주문진 근처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작전에서 최종적으로 작전 100-B가 채택되었고, 잠정적인 D-Day는 9월 15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미국 본토의  합동참모부거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하고 나섰다.

미 합동참보부가 상륙 작전 자체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세계의 전략전술가가 다 모였다는 미 합동참보부가 반대하는  이유는 인천의 조수, 수로, 해안 조건이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불과 몇해전 2차 대전을 치루며 유럽의 요새요새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했던 터라 더더욱 미 합동참보부의 반대론은 거셌다라고 당시 미군 한국전쟁사가 적고 있다.

미국의 한국전쟁사는 그 대목에서 "맥아더가 제시한 인천상륙작전의 상륙점인 인천은 수로가 협소하여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적이 수로에 기뢰를 부설해놓아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인천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m에 달해 썰물 시 해안에 2~5km의 갯벌이 생겨난다. 이로 인해 상륙함의 접근이 곤란하다"라고 우겼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왼쪽)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jpg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왼쪽)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jpg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됴쿄 미국 극동군사령부까지 와서 1950년 8월 23일 맥아더와 회의를 개최하였다. 

맥아더가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주장했으나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의견만 청취하고 돌아갔다.

◇···맥아더의 미본토 합동참모부를 설득한 태평양 전쟁 경험.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 합동참모본부관계자들과  트루만 대통령을 만나  인천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는  필리핀 레이터섬(Leyte)을 상륙작전으로 탈환한 경험등 자신이 겪은 상륙작전들을  들어 인천상륙작전을 감해해 서울을 탈환하겠다고 적극 설명했다.

맥아더는 당시 지난 1942년 3월 17일 작은 어뢰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하여 호주로 갔다.

 이후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미군과 필리핀군 14만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2개의 전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에게 배정된 전쟁 물자는 유럽전선에 있던 패튼에게 배정된 물량의 5%에 불과했다.

미국 장갑차가 낙동강 전투의 서쪽인 마산 쪽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 미 시사주간지 라이프지].png
미국 장갑차가 낙동강 전투의 서쪽인 마산 쪽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 미 시사주간지 라이프지].png

그래서 맥아더는 일명 '개구리 뜀뛰기 전술'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전선을 연결하여 안전하게 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가 뛰듯이 주요 거점만 점령하는 모험적인 전술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다시 필리핀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총 87차례의 상륙작전을 전개하였기에 누구보다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가 상륙작전을 통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수 있는 것은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주둔한 섬대신  주위에 있는 배후 섬을 공격하고, 배후에 있는 섬을 2~3시간 사전공격했다는등 당시의 전략전술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럴경우 일본군은 병력을 분산시켜 다른 섬으로 병력을 보내지만 미군은 보급로와 교통로를 차단하는 방법이라고 거듭강조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를 설득,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정했다고 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에는 도가 터있었는 그는 미합동본부를 설득해 자신의 경험을  6.25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인천상륙작전일 9월15일 결정과 사전 작전.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 상륙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장사상륙 작전 등을 먼저 시행하여 인민군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참한 미군과 한국군들[ 사진= 미 라이프지].png
인천상륙작전에 동참한 미군과 한국군들[ 사진= 미 라이프지].png

또한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상륙작전 전에 두 번이나 전투기로 공습하고 포격도 했다.

미국 군함의 맹렬한 포격과 전투기의 공습이 있은 다음 미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기위해 당시 전투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주시한 것은 인민군의 전투부대가 모두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 8군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인민군의 병참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후방인 서울에서 이를 차단할 수 있는 만큼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상륙 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여론이나 유엔등 국제사회의 여론을 비춰서도 서울은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에서 신속히 탈환해야 했다.

맥아더는 훗날 이상황을 "인천은 미 8군이 망치가 되고, 미 10군이 모루가 되어 인민군을 분쇄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라고 회고록에 남겼다.

결국 8월 28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계획을 가 승인하고,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그뒤  그 계획은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되고,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로 극비리 정했다.

상륙 싯점도 여러 환경을 적극 고려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다. 

◇···군산등 공격하고 9월 15일 새벽 2시 인천상륙작전 개시.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을 차출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였다. 

1950년 9월15일 아침 인천상륙작전.png
1950년 9월15일 아침 인천상륙작전.png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이에 따라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했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로 하여금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인민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9월 12일부터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상황에서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새벽2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맥아더 원수가 함정에서 인천 상륙 작전 수행 직전에 전황을 살피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맥아더 원수가 함정에서 인천 상륙 작전 수행 직전에 전황을 살피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다.

 제1단계 작전에서는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였다. 

제2단계에서는 후속하는 부대들이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이어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대선단이었다.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이틀이 지났다. 

1950년 9월15일 아참 인천상륙작전중인 마군등 유엔군[사진=네이버블로그 byungchi켑처.png
1950년 9월15일 아참 인천상륙작전중인 마군등 유엔군[사진=네이버블로그 byungchi켑처.png

15일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한국의 백인엽 대령이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진입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인민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했다.

게다가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줬다.

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인민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는 점이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졌다. 

인천 상륙 작전 다음 날 인천항의 레드 비치에서 4대의 전차상륙함(LST)이 미군의 인력과 장비를 내리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png
인천 상륙 작전 다음 날 인천항의 레드 비치에서 4대의 전차상륙함(LST)이 미군의 인력과 장비를 내리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png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을 투입,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해 있었다. 23일에는 한국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鞍山)을 점령했다.

 다음 날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마포를 통하여 서울시내로 돌입했다.

25일에는 한국 육군 제17보병연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이 현재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방면을 통하여 한강을 넘어 서울의 남쪽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해병대와 맹렬한 협공으로 가했다

인천 상륙 작전 다음 날 인천항의 레드 비치에서 4대의 전차상륙함(LST)이 미군의 인력과 장비를 내리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png
인천 상륙 작전 다음 날 인천항의 레드 비치에서 4대의 전차상륙함(LST)이 미군의 인력과 장비를 내리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png

인민군은 시가전을 치루려고 했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28일 제2차 서울 전투로 서울 탈환이 이루어졌고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자리에 있었던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 '맥아더와 한국전쟁'(이상호, 푸른역사),'한국전쟁전투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6·25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국방군사연구소)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해방30년( 동화출판사),한국야당사(이기택)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