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5)] 민족분단 시초인 모스크바 3상회의와 반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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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5)] 민족분단 시초인 모스크바 3상회의와 반탁.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20.05.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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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미국무성 빈센트국장, '조선에는 미국 신탁통지실시' 언급.
-이후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외상 모여 제2차대전후 처리문제 논의.
-모스크바 3상회의서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해 신탁통지 합의.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익 신탁통치 반대 움직임 가열.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해방된 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24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톱기사가 실렸다. 

당시 미 국무성 극동국장인 빈 센트(John C. Vincent)가 앞서 10월 20일  미국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빈 센트의 발언 요지는 ‘조선에는 우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문에서 첫째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 둘째는 “한국 임시정부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셋째는 “미·영·소·중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반탁운동이 한반도를 소용돌이 치게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문에서 첫째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 둘째는 “한국 임시정부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셋째는 “미·영·소·중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반탁운동이 한반도를 소용돌이 치게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외신을 타고 나온 뉴스를 국내 신문들이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이에 대해 국민당 중앙위원인 안재홍이 제일먼저 신탁통치 반대의견을 냈다.

전 국민이 합심해서 우리 민족의 자주적으로 해결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외국인에게 보여줘야 한다.

해방의 은인이라해도 비우호적인 조치나 정치적 과오를 범할 때는  우리는 용감히 그것을 시정하도록 투쟁해야한다’

이어 조선공산당에서도 10월25일  김삼룡(金三龍)명의로 성명이 나왔다.

‘신탁의 규정여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다. 모욕적 터치는  단연 취소하는 것이 민족의 염원이다. 신탁통지 운운은 일부 친일파와 불순분자의 책동이다’

같은 날 오후 2시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고려국민당 등이 임시정부 요원환영준비회담 끝에 공동성명을 내고 신탁을 반대했다.

◇미국 미 샌프란시스코 회의서 남북신탁통치 첫 언급..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모든 정당단체가 신탁통치에 반내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3상회의[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모스크바 3상회의[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그렇다면 신탁통치란 무엇인가. 해방직전인 1945년 4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회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 ‘구(舊) 위임통치 지역 또는 2차대전 결과 연합국이 적에게서 분리·해방시킨 지역과 통치책임이 있는 국가로부터 자발적으로 제공한 지역을 대상으로, 관련국 협정 아래 연합국중 1국이 그 지역 인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위임 통치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연합국의 이 결정을 ‘국제 신탁제도’라고 한다.

주목되는 점은 협정문 6항이다.

내용은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 사령관은 2주일 이내에 회담을 열고, 양국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조선임시 민주정부를  원조한다.

미·소·영·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 임시정부를 설립하게 하여 조선의 장래의 독립에 대비할 터다.

신탁통치기간은 5년으로 한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정부와 조선이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이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을 촉진한다.

독립에 기여하고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지에 대한 외상(外相)·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미·영·소·중 각국 정부에 회부한다’로 되어있다.

즉, 독립은 했어도 독립된 정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가 결정 나기 전 국내에는 이승만, 김구 등이 국내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정당으로, 어디가 우익이고 어디가 좌익인지 구별 지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12월 23일 경성방송을 통해 정권욕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민족독립을 위해 공산당은 반성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45년 12월 당시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렸다. 연합국이 이집트 카이로, 크리미아 반도 얄타, 독일 포츠담 회담 등을 연쇄적으로 열었지만 매듭짓지 못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38도선을 경계로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해 지배한다는 것이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38도선을 경계로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해 지배한다는 것이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그중에도 연합국에 참여한 나라들이 자국이익과 이해타산에 급급한 현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가 미완이었다. 3국은 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던 문제를 처리하기위해 모였다 

 2차 대전 내내 연합국 간에 합의하지 못한 것은 ‘30년간의 신탁통치를 하자는’ 미국 주장에  소련과 영국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된 첫해가 저물어갈 무렵,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38도선을 경계로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해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엄청난 뉴스였다.

이 회의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27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협정문’이 발표됐다.

 합의문에는 ‘한국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가 포함돼 있었고, 여기에 ‘신탁통치’ 단어가 들어가 있다. 협정문의 내용은 크게 보면 세 가지였다. 

결국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는 한반도를 포함한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모스크바에서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엄청난 뉴스가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 보도됐다[사진= 신수용대기자 DB].
 모스크바에서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엄청난 뉴스가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 보도됐다[사진= 신수용대기자 DB].

회담에서 3국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데 합의했다. 

◇동아일보에서 첫 보도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에, 반대론 가열

주요 내용은 유럽평화회의 개최, 원자력국제관리에 대한 위원회 설치, 대일정책일원화를 위한 극동위원회 설치, 중국통일을 촉진할 것과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를 주요 합의에 넣었다.

이것은 그해 연말인 1945년 12월27일 세상에 놀라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협정’으로 이라고 말한다. 협정문의 내용은 크게 보면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 둘째는 “한국 임시정부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셋째는 “미·영·소·중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결정서를 보자. 당시 외신들이 밝힌 내용을 지금에 와서 구체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1.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한다.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위하여 조선의 공업·교통·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조선민주주의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그에 적정한 방책을 연구, 조성하기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련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력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제안은 공공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국 걱국 정부에 제출해야한다.

3.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 적인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수립할 때 작성하는 일에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에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4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위하여 미·영·소·중 제국 정부가 공동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한뒤 제출되어야한다.

4.남북조선에 관련한 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위하여 ,또한 남조선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연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신탁통치는 원래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처리 방침이다.

필리핀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진 예에서 보듯 미국은 식민지였던 국가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 등이 맹렬하게 반대하여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1945년 12월 31일 임시정부 측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탁치반대국민총동원시위대회’에서 김구 주석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1945년 12월 31일 임시정부 측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탁치반대국민총동원시위대회’에서 김구 주석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 이미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부 극동국장이던 빈 센트에 의해 이러한 방침이 확인되어 국내에 보도됐던 것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이 수정안을 미국이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련의 안은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임시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관계가 이러했음에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보도됐다.

당시 보도는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오보다. 사실 모스크바 3상 회의 때,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반대로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했음이도 불구하고 미국은 반탁 오히려 소련은 신탁을 주장하였다 는 식으로 양측 입장을 완전히 바꿔서 보도된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민주주의자인 우익진영의 고하 송진우 선생이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미국 태평양 사령부가 발간하던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보도 내용을 전달해준 합동통신사의 뉴스기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가 다소 구체적이지 못했으나,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해가 바뀌어  1946년 1월 소련의 타스통신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내용을 정확하게 상세하게 보도했지만 이미 벌어진 사태를 어쩔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촉발시켰다. 오랜 기간 동안의 일본 압체에서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보도내용은 국민적 분노를 이끌어 냈다.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가 발표한 성명서를 넣어 대한독립협회·대한독립신문사 명의로 뿌려진 반탁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가 발표한 성명서를 넣어 대한독립협회·대한독립신문사 명의로 뿌려진 반탁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김구 선생 중심으로 우익과 좌익 반탁 한목소리

 신탁통치 안이 보도된 다음날 1945년 12월 28일 김구선생과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었다. 임시정부도 이날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5천년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신탁통치를 배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김구 선생을 위원장으로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도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이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폈다.

조선공산당에서도  선전부장 정태식(鄭泰植)명의로 된 신탁통지 절대반대의 성명을 냈다. 또 중앙인민위원회에서도 조선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조건이 없다는 성명이 발표했다. 문학가 동맹에서도 민족분열을 책동하려는 신탁통치는 반대한다고 외쳤다.

1946년 1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주최로 열린 ‘신탁통치반대국민대회’에서 뿌려진 전단. 신탁통치 반대와 함께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46년 1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주최로 열린 ‘신탁통치반대국민대회’에서 뿌려진 전단. 신탁통치 반대와 함께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뿐 만 아니다. 전평(全評)의 허성택(許成澤)도 신탁통치는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반대한 다고 표명했다.

그러다보니 우익 정당 사회단체보다 극좌파인 정당사회단체가 오히려 신탁통치를 더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서울과 개성 춘천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등에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번져갔다.

서울에서는 종로와 서대문, 광화문일대에서 시민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반대’. ‘우리나라는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신탁통치는 또다른 조선을 식민지화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남녀노소, 그리고 직업여하를 떠나 연일 시내로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 ‘완전한 해방은 민주주의 정부로 이루자’고 외쳤다.

그해 12월28일 김구 선생의 숙소인 죽첨장(竹添莊)에서 임시정부회의를 열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결의를 했다. 김구선생은 " 반탁운동이"새로운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미·영·소·중국등 4게국에 이같은 입장을 담은 전문을 보냈다.

1946년 1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거처인 경교장 앞에 모인 반탁시위 군중들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1946년 1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거처인 경교장 앞에 모인 반탁시위 군중들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김구 선생의 전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모스크바회의에서 한국에 신탁통치를 적용한다는 의결에 절대 반대한다.

⓵민족자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한국민족의 총의에 절대로 위반된다.

②제2차 대전 중 누차 선언한  귀국이 숙약(宿約)에 위반된다.

⓷연합국헌장에 규정한 3종 신탁통지적용 조례의 그 1항에도 한국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⓸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함은  극동의 안전과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상의 이유로 한국이 즉시 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신탁제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미리 생명하고 귀국의 신중한 고려를 촉구하여 마지않는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전문을 보낸 뒤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모아 긴급연석회의를 열어  신탁통치반대를 위한 국민 총동원 위원회설치를 가결했다.

이 무렵 미국은 어땠을까. 미국 워싱톤 언론들도 모스크바 협상은 미국이 소련에 대폭 양보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서 형편없는 협상 참패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때문에 소련이 움직일 가짜 정치인을 만들어 찬탁으로 돌아 설것이라는 해설기사도 나왔다 

국내 언론들도 앞 다퉈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 ‘신탁통치는 또다시 식민지’, '민족통일은 사라지고, 민족분단만 초래한다’는 기사로 도배했다.  일제히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신탁통지의 결속에 반대에 나섰다.

◇김구 임시정부, 이승만 박사가 나서 반탁운동전개.

이런 가운데 미국정부는 12월 29일 남한 주둔군 사령관으로 하지 중장을 임명했다.

이날 미국정부는 하지 중장 임명과 관련, ‘2주일 이내에 임시조선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조직을 위해 소련군 사령관과 회합하라’는 명령은 내렸다. 이 같은 전문이 나온뒤 30일에는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이 ‘근간에 평양에서 미·소 양군 수뇌부가 만날것’이라고 공포했다.

1948년 10월 16일 일제가 파괴했던 연희대(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동상 재건 제막식에서 김구가 축사를 하고 있다. 뒷자리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앉아 있다.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다녀온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과 함께 자리한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의미가 깊다고 힌안론은 평가했다.[사진=연세대제공]
1948년 10월 16일 일제가 파괴했던 연희대(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동상 재건 제막식에서 김구가 축사를 하고 있다. 뒷자리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앉아 있다.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다녀온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과 함께 자리한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의미가 깊다고 힌안론은 평가했다.[사진=연세대제공]

그렇지만 김구선생과 임시정부는 매우 강경한 태도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더구나 김구선생과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했다.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한 것이다. 실제로 서울시내 다수의 경찰서장들이 김구선생과  임시정부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이는 곧 당시의 통치 권력이던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시정부가 실질적 통치를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미군정을 자극했다. 이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선생과  임시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권력 접수가 무위에 그친 후 김구선생과  임시정부는 이승만 세력과 연합했다.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이승만 박사는 비상국민회의를 만들고 이것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약칭 민주의원)의 모체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김구선생과 임시정부였다. 그러나 그 성과로 나타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 박사가 취임하였다.

좌익세력역시 대부분 ‘동아일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달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은 1945년 해방정국 최대의 분수령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계기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이는 곧  해방 공간의 정치구도를 기본적으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이승만박사의 소개로 하지중장을 만나는 백범 김구선생[사진=신수용 대기자 db]
이승만박사의 소개로 하지중장을 만나는 백범 김구선생[사진=신수용 대기자 db]

해가 바뀌었다.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위원장 김구)에서 76명의 위원을 선임하는등  구체적인 반대운동에 돌입했다.

우익 세력이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한 다음 민주의원으로 연결되는 조직적 행보였다면 좌익 세력은 이와 달랐다.

좌익세력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자신들만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좌우 대립 구도는 조직적 분립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심지어 1월2일 오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점차 애매한 입장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31일 임시정부 측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탁치반대국민총동원시위대회’에서 김구 주석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1945년 12월 31일 임시정부 측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탁치반대국민총동원시위대회’에서 김구 주석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당시 조선공산당의 성명을 찾아보니 이렇다.

‘탁치(신탁통치)문제는 민족통일에 있지, 무계획한 흥분적 투쟁으로써는 해결할 수없다. 조선을 싸고도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분석 판단해야지 을사조약과 같다고 하여 철시 파업은 시민생활을 질식시키는 행동이니 삼가야 되고, 다만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결성해야한다’

이렇게 애매했다. 이는 좌익이 시간이 갈수록 ‘반 신탁통치’에서 ‘찬 신탁통치’로 입장이 바뀌고 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정서가 반미기류로 흐르자, 미군정은 당혹감과 함께 여론전을 시작했다. -<우익 송진우암살과 찬.반탁의 대결은 다음 6편에서 소개> 

▶참고문현;한국야당사(이기택지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충청남도지(충남도지편찬위), 한밭승람(변평섭지음) 사건반세기(신수용지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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