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호 일상칼럼】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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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호 일상칼럼】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고
  • 조근호변호사( 대전지검 전 검사장.부산고검 전고검장.법무연수원장.행복마루대표)
  • 승인 2021.12.0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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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호변호사( 대전지검 전 검사장.부산고검 전고검장.법무연수원장.행복마루대표)
조근호변호사( 대전지검 전 검사장.부산고검 전고검장.법무연수원장.행복마루대표)

혹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Hellbound>을 보셨나요. 오징어게임을 제치고 1위를 하였다고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 6부작을 며칠에 걸쳐 보았습니다. 상당히 깊은 종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너무 간단합니다. 천사가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나타나 언제 죽는다고 알려줍니다. 이를 <고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시각에 사자라는 괴물체 3개가 나타나 죄인에게 폭력을 행하고 강력한 빛으로 불태워 파편만 남깁니다. 이를 <시연>이라고 합니다.

지옥은 여러 사람이 고지와 시연을 겪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신이 죄인을 심판해 지옥으로 보낸다는 설정입니다. <죽음의 심판>, 그리고 <지옥>이 이 드라마의 주제인 것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접하면서 오래전 읽은 책이 생각나 드라마를 본 후 다시 펼쳤습니다. 저자는 성서학자 '바트 이만'이고 책 제목은 <두렵고 황홀한 역사>, 부제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입니다.

저는 <심판>이나 <지옥>을 다룰만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후세계나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는지, 답할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에 같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소개합니다.

그는 서문에 이런 도발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나는 이 책의 영문 제목을 Heaven and Hell: A History of the Afterlife"로 정했다. 나는 천국과 지옥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이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해 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수많은 기록을 비교하여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가 사후세계에 대한 특정의 믿음(예를 들면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불)을 워낙에 자주 접하고 자라서, 그런 상벌의 장소가 아예 지당하다고 느낀다. 그런 관점들이 어째서 서구 문화를 1900년 남짓 지속적으로 지배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추측은 우리가 각자 영위한 삶의 질에 따라, 혹은 각자의 헌신에 따라 개별적으로 상과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요구와 염원을 충족시켰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말 착한 사람인데 가난과 고통을 받다가 죽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또 반대로 지독하게 악한 사람인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됩니다.

착한 사람이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우리의 도덕적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트 이만'의 견해는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선각자들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착하지만 어렵게 살던 사람은 죽어서 반드시 <천국>이라는 상을 받고, 반대로 악하지만 잘 살던 사람은 죽어서 반드시 <지옥>이라는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모순이 해결됩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어 현생의 모순을 반전시켜주리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심판>은 신의 몫입니다. 대신 인간은 <사랑>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룩한 세계관입니다.

반면 유교 세계관에는 사후세계가 없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의 개념도 없습니다. <심판>을 책임질 신 역시 없습니다. 그 결과 <심판>은 인간의 몫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세계관 속에서 50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국가적, 사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지독할 정도로 그 사태의 책임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그 책임을 묻는 작업을 합니다. 원인을 찾아 재발방지책을 강구하는 것보다 <심판>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 방식과 911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처 방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는 그 차이가 궁금했습니다.

<심판>을 신에게 책임 지우지 못한 우리는 스스로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심판>은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끝이 없습니다. 누구는 만족하지만 또 다른 누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역사는 무한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옥>의 마지막 장면에 갓 태어난 아이가 <고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무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갓난아이는 왜 <고지>를 받았을까요. 이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신의 심판에 의문을 가집니다.

그전에 <고지>를 받은 사람들은 이에 순응했습니다. 반면 아이의 부모는 <고지>에 저항합니다. 아이가 <시연>을 받을 때, 부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살리려고 애씁니다. 그 결과 부모는 죽지만 아이는 생명을 건집니다.

<고지>에 대한 일반적 견해가 무너지고, 신의 심판이 무력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또 다른 결과를 빚습니다. 그 결과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지옥>은 시즌 2를 예고하며 엔딩합니다.

동양 문화권처럼 <심판>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판이 유교의 몫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 기독교 문화권처럼 <심판>을 신의 영역으로 넘기고 자신들이 할 일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믿고 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드라마 <지옥>은 이 지점에 서 있습니다.

국가, 사회, 가정, 개인을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심판>의 주역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하루 종일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렇다고 말로 단죄합니다. 험담의 속성은 사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심판>을 우리의 몫으로 삼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심판>의 칼날을 날리고 그 칼날에 우리도 희생됩니다. 드라마 <지옥>이 심판을 신에게 맡기는 기독교 세계관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통령 선거로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어지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합니다. <사랑>은 끼어들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드라마 <지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할 일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 <사랑>은 신의 <심판>마저도 저지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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