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4)] 아. 6.25... 중공군 240만명 인해전술 개입에 남북통일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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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4)] 아. 6.25... 중공군 240만명 인해전술 개입에 남북통일 물거품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3.06.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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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알고도 이승만.맥아더 대비없이 북진통일만 주장
-트루먼 군산- 강릉 휴전선 제시하며 북진 자제
-스탈린은 한국전 참전 거부...마오쩌뚱 "미국의 남한 점령인정못해 참전공식선언"
-11월 28일 중공군 청천강 상륙작전 감행...곧바로 한국군 1개부테 궤멸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유엔군 다시 남하하며 흥남철수 준비들어가
한국군.유엔군의 병력의 8배나 많은 중공군 240만 명이 청천강 상륙작전에 성공, 전선으로 참전하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한국군.유엔군의 병력의 8배나 많은 중공군 240만 명이 청천강 상륙작전에 성공, 전선으로 참전하고 있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 4.19의거, 5.16군사쿠테타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현직대통령들의 구속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2021년 5월22일 잠시중단했던 시리즈를 재개한다<편집자 주>

2023년 6월 25일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다.

비록 초반에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부산까지 쫓겼으나, 석달 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사령관(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 대동강까지 인민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해 10월 말  중공(중국공산당)이 무려 240만명의 붉은 군대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한반도의 통일은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안팎과 한국전쟁 등을 살펴봤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그어진 3.8선이북 땅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자마자 남한을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준비를 들어갔다.

거기에는 소련의 지원이 컸다.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한에 주둔한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4000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파병했다.

김일성은 이를 기화로 매사 소련에 매달렸다.

◇ 김일성. 스탈린과 마오쩌뚱의 지원과 사주받은 6.25 전쟁 막전막후

그중에 1949년 3월 5일 충남 예산출신인 박헌영 등과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6.25 발발 두어달 전인 1950년 3월 30일 박헌영등과 함께 다시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으로부터 ‘선제 남침’을 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다.

소련 모스크마를 방문해 6.25 침략승인을 받기위해 스탈린을 만나기전 김일성과 박헌영(가운데) 허헌[ 사진=신수용 닷컴]
소련 모스크마를 방문해 6.25 침략승인을 받기위해 스탈린을 만나기전 김일성과 박헌영(가운데) 허헌[ 사진=신수용 닷컴]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중공으로도 발길을 옮겼다.

이후 그해 5월 13일 중공의 마오쩌둥을 찾아가 소련 스탈린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한 후 중공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고 마침내 6월 25일 남침을 결행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남침한 뒤 중공이 마각을 드러냈다.

김일성의 남침을 받은 한국은 이날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병력이 외출과 외박으로 병영이 비어 있었다. 

김일성의 붉은 군대에 무방히  상태였던 것이다. 

때문에 치밀한 준비 아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김일성의 침략에 국제사회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남부여 출신인 한국 임병직 초대 미국대사(유엔대사)등의 노력으로 국제사회가 김일성 인민군대에 대해 공분을 샀다.

전우야 잘자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북진중인 국군장병들, 차량마다 태극기 게양이 이채롭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전우야 잘자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북진중인 국군장병들, 차량마다 태극기 게양이 이채롭다.[ 사진= 신수용 닷컴].png

무엇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미국. 영국.중국(대만)등을 중심으로 유엔을 결성해 제2의 전쟁을 막고 세계평화와 공영을 추구하겠다고 밝힌 지 불과 4~5년 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유엔은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북한군의 공격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16 개국의 참전도 결의했다. 

◇ 중공 마오쩌뚱, "유엔 참전하면 우리도 한국전쟁 자동 개입하겠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자 유엔은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16개 국이 전투부대를, 5개국이 의료지원을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됐다.

유엔은 1945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집단 안전보장 조치에 따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군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에 미국 극동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임명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에 따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여 지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6.25 한달 전 5.10 총선당시 서울 종로을에서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 신수용 닷컴]
6.25 한달 전 5.10 총선당시 서울 종로을에서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 신수용 닷컴]

그 곳이 바로 1950년 7월 대전지역 전투에서다.

그러나 초전부터 밀린 전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공동으로 방어태세를 구축했음에도 역전이 고전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해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파죽지세로 남하해오는 인민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했다.

이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에 나선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에 이르자 대통령 이승만은 계속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미국 정부도 유엔군의 북진작전에 관한 훈령을 내렸다.

이에 중공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자신들도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주장했다.

소련역시 미국의 결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즉각적인 휴전과 외국군 철수를 제안했다.

해방전 얄타회담에서 정해진 3.8선[ 사진= 네이버이미지 켑처]
해방전 얄타회담에서 정해진 3.8선[ 사진= 네이버이미지 켑처]

 이와같은 공산국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뒤이어 유엔군도 북진작전을 개시했다.

김일성의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져 평양을 점령당하고 강계와 압록강을 넘어 중국 국경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혜산진과 청진을 점령하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모쩌뚱의 한국전 개입을 충동질한 당시 상황

9.28 수복 다음날, 궁지에 몰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박헌영과의 공동 명의로 된 이 편지는 위기에 처한 인민군의 입장을 구성지게 늘어 놓았다.

그런 뒤, 그러므로 소련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소련군의 직접적인 참전이 어려울 때에는 중국 등과의 국제 의용군이라도 출동시켜 달라고 빌면서, 스탈린의 지시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스탈린은 그러나, 파병 지시대신 모택동에게 서한을 보내 중공군에게 파병을 권고했고, 중국 지도부는 격렬한 논란을 벌이게 된다.

주을래는 10월 중순,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는 등, 끝까지 참전에 반대했지만, 보강과 팽드케 등 참전 주장파의 집요한 설득이 결국 모택동을 움직이게 했다.

한국전쟁 지원을 요청한 김일성과 이를 거부한 스탈린[ 사진= 한국전사].png
한국전쟁 지원을 요청한 김일성과 이를 거부한 스탈린[ 사진= 한국전사].png

마침내 10월 24일,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현재로서는 소련이 개입할 당위성이 없지만 만약 미국이 중국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상호 원조 조약에 따라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면서 참전을 공식화한다.

참전 선언 바로 다음날, 중공군은 한반도 안에서 국군 1개 대대를 궤멸시켰다.

◇ 맥아더의 중공군에 대한 과소평가와  판단실수

조갑제닷컴 대표가 지난 2015년 월간조선 7월호에 6.25 전쟁과 맥아더 사령관의 실수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전략가로서 그의 명성에 금이 가는 실수들을 반복했다.

1950년 미 웨이크섬에서 만난 맥아더 유엔사령관과 3.8선 돌파에 반대한 미 투루먼 대통령(오른 쪽)[ 사진= 6.25 전사].png
1950년 미 웨이크섬에서 만난 맥아더 유엔사령관과 3.8선 돌파에 반대한 미 투루먼 대통령(오른 쪽)[ 사진= 6.25 전사].png

 북진(北進)하는 미군의 지휘권을 8군(서부전선)과 10군단(동부전선)으로 나누었던 것이 먼저다.

이는 곧 8군(서부전선)과 10군단(동부전선) 간에 공간이 발생, 해 중공군이 그 빈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그중에도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고, 중공군이 개입한 후에는 3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병력을 1만6500명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했다.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이 출현해 교전을 벌였음에도,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계속 북진하도록 했다가 11월 28일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6.25 한국전쟁에 개입된 중공군의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바로 옆에 피리와 꽹과리를 치는 장면[ 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 한국전쟁에 개입된 중공군의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바로 옆에 피리와 꽹과리를 치는 장면[ 사진= 신수용 닷컴].png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던 맥아더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한때 한반도 철수 가능성까지 내비치는 등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판단 실수는 최대 과오다.

북진통일이 성사되기 직전, 중공군의 남침을 예측, 대비하지 못한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

전역(戰域)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유엔군 사령부로 들어온 수많은 정보가 남침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까지 날아온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투르먼은 북진을 반대한 인물이다.

아예 3.8 선보다 훨씬 남쪽인 서해 군산에서 동해강릉선으로 휴전선을 쳐 김일성군대와 휴전회담을 가지라고 공식적으로 말한 인물이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 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 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이승만이 트루먼의 휴전 계획에 강력반대하고, 맥아더도 이승만의 주장과 같이 북진을 강력히 촉구했던  것이다.

웨이크 회담은 이를 위해 맥아더-트루먼이 가진 회동이다.

맥아더는 “중공군 약 30만명이 만주에 집결해 있지만 개입의 시기를 놓쳤다.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공군력으로 도륙하겠다”고 트루먼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맥아더의 예상과달리 30만명이 아니라 240만명의 중공군이 개입했다.

◇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그러나 중공군에게 전세 뺏겨
 

그는 자신의 줄기찬 오판(誤判)에 대한 사과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의 목표는 한국에서 작전 중인 유엔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력(戰力)은 선전포고 없는 이 전쟁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맥아더는 또 “지역 사령관의 영역을 넘는 세계적인 고려를 해야 할 사태 발전이므로 새로운 지침을 결정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11월 24일 총공세를 명령했다. 

6.25 한국전쟁중인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하는 국군 화랑부대원들[ 사진= 한민족 문화대백과사전켑처].png
6.25 한국전쟁중인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하는 국군 화랑부대원들[ 사진= 한민족 문화대백과사전켑처].png

당시 언론이 ‘크리스마스 공세(攻勢)’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장병들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11월 24일 하루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그러나 다음 날 중공군 30만명의 대반격이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시작되었다. 

11월 28일, 한국전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미8군과 10군단 사이의 텅 빈 간극을 뚫고 남하, 한국군 2군단 지역을 돌파, 미8군의 배후(背後)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유엔결의에 반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마오쩌뚱( 맨오른쪽)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운데) 김일 성[ 사진=네이버블로그 joonno1202켑처].png
유엔결의에 반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마오쩌뚱( 맨오른쪽)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운데) 김일 성[ 사진=네이버블로그 joonno1202켑처].png

 전쟁에서 적군(敵軍)이 등 뒤에 나타나는 날은 비극의 시작이다.
 
 1월 28일 오후 4시45분, 맥아더는 합참(合參)에 전황(戰況)을 보고하였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은 지 3일이나 지난 뒤다.

 세계 언론은, 미군과 한국군이 기습을 받아 포위당한 사태를 긴급하게 보도하는데도 맥아더는 그 귀중한 3일간을 지체하였다.

 그의 뒤늦은 보고는, 중공군에 대한 종전의 축소평가를 180도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당시 맥아더의 급전에는 '중국의 군사력이 대규모로 투입되었고 매시간 증강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라고 되었다.

맥아더는 이 전문에서 비로소 중공군의 추정 병력을 20만(실제로는 30만), 북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상향 평가했다.
 

지난 2019년 중국 정부수립 70주년(10월 1일)을 맞아 24일부터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는 70주년 역사 관련 대형 전시에 김일성이 1950년 6·25전쟁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파병 요청 친필 편지와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보낸 파병 결정 통보 친필 편지[사진=동아일보 켑처].png
지난 2019년 중국 정부수립 70주년(10월 1일)을 맞아 24일부터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는 70주년 역사 관련 대형 전시에 김일성이 1950년 6·25전쟁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파병 요청 친필 편지와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보낸 파병 결정 통보 친필 편지[사진=동아일보 켑처].png

그러나 맥아더의 판단과 달리,​ 중공군은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과 1945년부터 시작된 장개석군과의 국공내전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군인들이었다.

 세계최강 미군의 화력을 이들은 야간전투, 매복기습, 심리전, 산악전, 백병전, 게릴라전 등 우세한 전술로 만회하며 미군등 유엔군을 붕괴시키며 거침없이 남하했다. 

◇마오쩌뚱 "맥아더의 인천상륙이라면, 나는 청천강 상륙작전으로 응수한다"

  11월 28일은 마오쩌둥(毛澤東) 판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중공군이 청천강을 건너 군우리로 진출, 미 8군의 배후를 친 것을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 숲 돌파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략적 승리였다는 이야기이다.

 11월 28일 밤 마오쩌둥은 흥분했다.

 

김일성과 마오쩌뚱[ 사진= 한국전사].png
김일성과 마오쩌뚱[ 사진= 한국전사].png

그는 중공군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왔다”라고 했다.
 
 '중공군전사'를 보면 중공군은 당시 인해전술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경부터 한겨울에 참전하여 북한의 높은 산악지역에 오래 은신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북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한 동상으로 부대원의 30%이상이 대열에서 낙오했다.

또한  미군의 맹렬한 폭격으로 식량, 장비, 탄약 모두 부족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 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 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인해전술로 보이는 것은 중공군이 여러군데를 타격하다가 가장 약한 부대에  주력 대부대를  쏟아부어 돌파하고 우회하여 측방의 군대를 포위섬멸하는 전략을 써서 그렇게 느낄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이 제일 쏟아지는 새벽 2~3시에 피리, 나팔, 꽹가리를 치며 사방에서 공격해오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적군 백명은 5백명으로 여겨지고, 1000명은 5000명으로 느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크게 당황한 미국 백악관은   11월 28일 오후 3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었다.

 트루먼 전기(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러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회동을 갖는 맥아더 원수와 트루만 대통령[ 사진= 미 라이프지 제공].png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회동을 갖는 맥아더 원수와 트루만 대통령[ 사진= 미 라이프지 제공].png

그는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서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 장제스 군대의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 본토 폭격, 확전의 권한 등을 요구하였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문서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미 백악관  NSC 회의록은 이날 공개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한국 지도(地圖)를 준비한 것을 보고는 각료회담이 열리는 4시까지는 설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첫 발언을 요청하였다. 

6.25 당시 투항하는 중공군들 [ 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 당시 투항하는 중공군들 [ 사진= 신수용 닷컴].png

 

1950년 11월 말 중공군들에 붙잡힌 미군 장교와 지프차[ 사진= 신수용 닷컴].png
1950년 11월 말 중공군들에 붙잡힌 미군 장교와 지프차[ 사진= 신수용 닷컴].png

애치슨은 종일 의회에 나가 있었으므로 한국 상황에 대한 최신 동향을 알지 못한다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브래들리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합참의장은 전선(戰線)의 다급한 상황과는 동떨어진 낙관적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는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 지침을 요구하였으나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 2~3일 내로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브래들리는 또 신문과 방송의 중공군 전력에 대한 보도는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 참고 문헌= 신수용 사건반세기( 대전일보사)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헤방 30년(동화출판사)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조갑제 닷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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