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6)] 11월 30일 중공군 개입과 장진호전투...미군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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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6)] 11월 30일 중공군 개입과 장진호전투...미군의 고전
  • 신수용 정치 대기자
  • 승인 2023.11.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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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맥아더  북진통일 강공 드라이브..."중공권 개입없다"호언
-마오쩌뚱 무려 23만명 항미원조로  한국전쟁 개입
-미군들 중공군 인해전술과  영하 30도 강추위에  고전
-미군들 많은 인명피해속에  장전호거처  흥남 철수준비
1950년 11월 눈이 내린 북녂 땅의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중공군들. 운산지구 전투 당시 중공군.[사진=미 라이프지].png
1950년 11월 눈이 내린 북녂 땅의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중공군들. 운산지구 전투 당시 중공군.[사진=미 라이프지].png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1950년 6.25 전쟁 석달후 서울을  탈환한  한국군.유엔군은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950년 10월1일 38선을 뚫었다.

여세를 몰아 11월24일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사령관은 김일성 집단을 완전히 쓸자며 북진을 서둘렀으나 유엔군의 진군은 여기서 멎었다.

심지어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의 개입이 현실화되자,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폭투하도 불사하겠다고 외쳤다. 또 미국 정부에 이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루만 대통령과 반(反) 맥아더파의 하원의원들의 반대로 브레이크가 걸렸던 때다 

6..25 전세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앞세운 중공이 30만 대군을 파병하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김기창 '부산 천막교실' 93 x 78cm, 종이에 수묵담채, 1952.png
김기창 '부산 천막교실' 93 x 78cm, 종이에 수묵담채, 1952.png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해병 1사단도 맹추위에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50년11월 미 해병1사단과 함남 장진군 유담리 장진호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에 서서 성공리에 임무를 마친 부대가 미 해병 1사단이다.

지난 2차대전에 참전해 무적해병으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부대다.

서울이 수복되자 이들은 전선을 미 육군과 한국군에게 넘기고 다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진 최강의 부대다.

 그러나 ‘세기의 도박’이라는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원산상륙작전은 맥없이 끝났다.

북진 속도가 워낙 빨라서 해병대가 상륙하기 전에 육군이 이미 원산을 점령한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강계로 진격했고 마침내 얼어붙은 장진호에 당도한 것이다.

평균해발 1000m에 달하는 개마고원은 한반도의 지붕이고, 장진호는 발전을 위해 장진강 상류에 일제가 조성한 면적이 64㎢에 이르는 넓은 인공호수다.

 개마고원 한복판에 있는 함경남도 장진군은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무려 영하 40℃까지 떨어진다.

1950년11월24일, 크리스마스를 꼭 한달 앞둔 이날은 추수감사절이었다.

아군의 선봉부대인 미 해병 1사단 5연대의 3대대장 로버트 테플렛 중령은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광활한 개마고원과 얼어붙은 장진호.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왔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T사진=ohyh45켑처].png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T사진=ohyh45켑처].png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북진을 계속해서 마침내 개마고원에 이르렀다.

 애시당초의 임무는 평양에서 옮긴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진격하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무평리로 진격해 서부전선에서 퇴각 중인 8군을 돕는 것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훗날 테플렛부대원들은 "중종군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라며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 속에서 험준한 낭림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솔직히 겁이 났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작전장교 케니 소령은 쌍안경을 건네받으며 "어려운 싸움이 될 것같다. 좀 불길한 데..."라고 말했다.

 테플렛 중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전의 두 해병 장교는 기분 나쁜 정적 속에서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의 실체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눈 덮인 계곡 사이사이에 하얀 악마가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테플렛 중령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정찰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자 해병대원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차가운 비탈길에 쭈그리고 앉아 공수된 칠면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질린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해병들을 보며 테플렛 중령은 잠시 생각에 싸였다.

과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호언대로 '1950년 크리스마스를 미국의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지' 회의가 일었다.

◇··· 미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의 철수명령

대대 지휘소 천막에 걸린 화환에 ‘메리 크리스마스, 제기랄!’이라고 쓰인 글은 해병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적은 두렵지 않지만 솔직히 빨리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보급도 걱정이었다. 흥남항에서 125㎞나 떨어져 있는데 보급로라고는 오로지 첩첩산중 사이를 지나는 외길뿐이다. 

그 길이 차단되면 해병 1사단은 꼼짝없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고립될 판이었다.

6.25 한국전쟁에 개입된 중공군의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바로 옆에 피리와 꽹과리를 치는 장면.[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 한국전쟁에 개입된 중공군의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바로 옆에 피리와 꽹과리를 치는 장면.[사진= 신수용 닷컴].png

테플렛 중령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빌며 상황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테플렛 중령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하갈우리의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긴급 하달된 것이다.

하갈우리에 보급품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다. 북진(北進)이 계속되면서 보급로가 자꾸 길어졌다. 

보급로가 끊기면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다.

 그래서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하갈우리에 중간 보급기지를 설치한 것이다.

 사단 사령부에는 C47 수송기도 내려앉을 수 있는 대형 활주로가 임시로 깔렸는데 이 활주로는 나중에 철수할 때 큰 역할을 한다.

불행하게도 스미스 장군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공군이 갑자기 참전하면서 미 해병대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중공은 북한의 패망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시계추를 돌려보면, ​1950년 9월30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결정했다.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10월20일 평양을 탈환했다.

 낙동강으로 밀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11월24일에는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때문에 미군과 유엔군, 한국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 중공군의 개입과 인해전술

김일성 군대의 몰락은 곧 중공의 가장 튼 위협을 느낀 모택통은 한국전 참전을 노렸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한국군이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한국전 개입을 천명했다.

 9.15 인천 상륙 성공을 계기로 북진에 나선 미군과 한국군이 그해 10월 3.8 선을 넘어 북진해오자 중공군을 인민군을 도와  전쟁에 개입한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인민군을 도와서 미국과 싸운다.

 중공은 한국전쟁의 참전을 결정했고 보병 30개 사단에 포병 1개 사단, 그리고 철도병 1개 사단으로 구성된 30만명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유엔군과 국군, 학도의용군까지 합하여 10만 안팎인데 중공군은 총사령은 펑더화이(彭德懷). 서부전선 사령은 린뱌오(林彪).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공 민간인들.[사진=러시아 6.25 공식문서].png

그리고 동부전선 사령은 쑹스룬(宋時輪).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다.

기습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공군이 10월25일에 온정과 운산에 출현했다. 

하얀 눈 속에서 유령군대가 돌진해 오면서 전선은 대혼란에 빠졌다. 

꽹과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며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을 보며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8군은 퇴각에 들어갔다. 
전세가 다시 뒤집힌 것이다.

맥아더사령부는 미 해병 1사단에 후퇴하는 8군의 엄호를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장의 해병대가 내륙 깊숙이 진격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에게 고민이 더해졌다. 

낭림산맥을 넘어 진격해야 하는데 작전지역이 너무 넓어진다.

 그렇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해병 1사단은 산악지대로 진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중공군이 아직 동부전선까지는 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미군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이미 은밀히 이동을 마친 중공군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해병대가 더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중공군이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를 겹겹이 포위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되어 미 해병대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전멸이다. 

철수작전은 진격보다 더 어렵다. 지원받기 힘든 산악지대는 특히 더하다.

거기에 해병대를 압박하는 적이 하나 더 있었다. 무시무시한 동장군이다. 

당시 기록은 영하 32도. 그러니 체감온도는  영하 45도를 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퇴로가 끊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해병 1사단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과연 미 해병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영하 30도 맹장군 앞에 중공군의 대공세 

1950년 11월26일 흥남과 장진호를   연결하는 덕동고개.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해발 1400m의 덕동고개는 유담리까지 진출한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보급로를 통제하는 이른바 감제고지다. 

덕동고개를 빼앗기면 2개 연대는 고립될 위험에 놓인다.

 미 해병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1개 중대를 덕동고개에 배치해 놓고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얼마 뒤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중공군 소대 지령관 양근사가 손을 들자 정찰조는 일제히 눈밭에 엎드렸다. 발각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승만과 맥아더.[사진= 신수용 닷컴].jpg
이승만과 맥아더.[사진= 신수용 닷컴].jpg

 아마도 미 해병들이 경기관총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허공에 대고 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 진지를 정찰 중인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계속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방한복은 안쪽이 흰색이어서 뒤집어 입으면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까, "돌아간다.”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서둘러 본대 복귀를 지시했다. 

그는 나중에 비학산 전투에서 폭탄을 안고 해병대 진지에 뛰어들어 자폭함으로써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동시에 영웅 칭호를 받는다.

 미 해병들도 이제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한 듯 잔뜩 긴장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총공세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양근사는 이를 악물며 본대를 향해 내달았다. 

일제 기습으로 완전 섬멸을 노려야 한다. 퇴로를 차단했다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상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미국 해병대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지인들 말로는 금년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했다. 양근사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동장군은 든든한 우군이었다. 

제9병단 병사들은 대부분 만주 출신으로 추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대를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찰조는 날 듯 본부로 향했다.

미해군 장별들에게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장진호가 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제재소가 눈에 들어왔다. 5연대 3대대 G중대가 맡은 정찰구역은 거기까지다. 소대장은 손을 들어 휴식을 명했다.

M1 소총을 내려놓는 잭 라이트 상병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파일캡에 셀 파카를 입은 데다 속에는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추위가 사정없이 살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껴입어도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무전병이 무거운 M1 소총을 휴대해야 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카빈 소총은 추위에 약해서 불발되기 일쑤니 어쩔 수 없다.

 장진호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대적으로 추위에 강한 M1 소총도 밖에 오래 두면 윤활유가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판이다.

 라이트 상병은 쉬면서도 집게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방한용 벙어리장갑은 방아쇠를 당기게끔 집게손가락을 따로 내놓게 되어 있어 자주 움직여주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다. 

추위는 전투의 양상도 바꿔놓았다.

6.25 전쟁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사진= 6.25 전사].png
6.25 전쟁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사진= 6.25 전사].png

 총은 제대로 발사되지 않았고 수류탄도 불발이 다반사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공군 대공세로 서부전선의 8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괜찮은 걸까? 라이트 상병도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중공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호적인 현지민들 중에는 미 해병대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 해병대가 세계 최강이라 믿고 있는 라이트 상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집에서 보내기 힘들 것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이 지긋지긋한 추위로부터 속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라이트 상병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출발, 귀대한다.” 소대장이 기지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정찰 결과 별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저들도 미 해병대의 명성을 알고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큰 어려움 없이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잭 라이트 상병의 바람은 거기까지였다.

중공군 9병단은 11월27일을 기해 일제히 공세를 단행했다. 9병단 산하의 79사단과 89사단은 유담리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를, 59사단은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그리고 58사단은 고토리의 제1연대를 향해 일제히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는 80사단과 76사단의 협공으로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 해병과 육군의 총병력은 2만5000명.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은 13만의 대군. 거기에 미 해병대는 동장군이라는 무시무시한 적도 상대해야 했다.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전멸이다. 

6.25전쟁중에 참전한 미군 제 25사단 장병들이 낙동강 주변 방어선에 진지를 구축하기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6.25 전사].png
6.25전쟁중에 참전한 미군 제 25사단 장병들이 낙동강 주변 방어선에 진지를 구축하기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6.25 전사].png

평지인 서부전선과 달리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은 후퇴도 용이하지 않다. 

상급부대장인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은 해상으로 철수하기로 하고 해병대에 흥남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흥남은 일제가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된 함흥 남쪽의 항구도시다. 

우리에게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귀에 익은 흥남철수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미군.국군의 고전...전세 역전돼 철수준비 

워싱턴 백악관과 상. 하의원도 크게  긴장했다. 

이미 서부전선에서 미 제1기병사단 8연대 3대대가 중공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한 마당이다. 

그런데 해병 1사단은 그보다도 나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흥남까지 가려면 우선 유담리의 해병 5, 7연대와 장진호 동쪽의 육군 7사단 31연대를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불러들여야 한다.

​리고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토리로 철수한 다음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이동해야 한다.

 일단 진흥리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길도 좋고 철로도 있어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스미스 사단장은 5연대와 7연대에 후퇴를 명했고 고립된 31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긴급 편성했다.

경기관총이 요란한 총성을 내며 불을 뿜었다.

 덕동 고개 아래에서 중공군이 새까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중대장 바버 대위는 중대원들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했다. 고지를 빼앗기면 유담리에 있는 5연대는 퇴로가 차단되면서 그대로 고립된다.

 철수작전은 12월1일 오전 8시를 기해 개시되었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는 23㎞. 덕동고개를 넘는 게 가장 큰 고비다. 마지막 부대가 덕동고개를 넘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지를 사수해야 한다.

마침내 연대의 최후미를 담당한 해롤드 쉬러 대위의 중대가 덕동고개에 당도했다. 

해병들의 팔이 모두 퉁퉁 부어 있었다. 추격하는 중공군을 따돌리기 위해서 무려 1000개 이상의 수류탄을 던졌던 것이다.

포병 11연대의 155밀리 곡사포와 105밀리 곡사포가 덕동 수비대를 엄호했지만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찬 공기는 공기밀도를 높였고 그로 인해 포 사정거리가 짧아져서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대 자체 화력인 81밀리와 60밀리 박격포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해진 땅으로 인한 반동 때문에 포판이 자주 파열되었던 것이다.

소총도 불발되기 일쑤였고 중대원들의 체력은 추위로 크게 떨어져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국군을 보며 바버 대위는 전멸을 각오했다.

.적군과 교전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사진= 네이버 블로그 red4265 켑처].png
.적군과 교전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사진= 네이버 블로그 red4265 켑처].png

그때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남쪽하늘에서 콜세어 전투기 편대가 날아왔다. 

포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해병항공대의 콜세어 전투기와 해군의 스카이레이더 전투기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해병대는 무사히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급강하시에 특유의 금속성 마찰음을 내서 ‘죽음의 휘파람새’라는 별칭이 붙은 콜세어 전투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히며 중공군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어서 폭탄을 투하한 콜세어는 급상승을 시도했는데 어찌나 낮게 나는지 고지 위에서 공습을 지켜보고 있는 해병들은 전투기가 밑에서 솟아오르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해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반격에 나섰다. 

해병들은 비록 지금은 후퇴하지만 함흥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반격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도 참전했던 중대장 해롤드 쉬러 대위는 나중에 자신이 치른 전투 중에서 유담리 철수작전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해병 323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조지 웰커 중사는 덕동고개를 향해서 몰려드는 중공군을 확인하고 급강하를 시도했다.

 중공군들이 일제히 대공사격을 개시했지만 큰 위협은 못됐다.

 기총소사를 끝낸 조지 웰커 중사는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 기체를 상승시켰다. 

항공모함 ‘바도잉 해협’에서 발진한 F4U 콜세어 전투기에는 5인치 로켓포와 500파운드 폭탄 4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편대기 4대가 차례로 기총소사와 로켓 공격을 하자 고지로 밀려들던 중공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승해서 고도를 회복한 웰커 중사는 다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선회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공사격에 피격된 것일까. 급강하를 시도하던 웰커 중사는 앞쪽에서 하얀 연기가 이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오일 냉각기가 파손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항모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낙하산으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불시착을 시도할 것인가. 빨리 결정해야 한다. 

낙하산으로 탈출하기에는 고도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체가 요동치더니 엔진이 멎었다.

웰커 중사는 불시착하기로 하고 하얗게 눈이 덮인 평원을 향해 콜세어 전투기를 하강시켰다. 

덕동고개를 스칠 듯 지나친 콜세어 전투기는 썰매처럼 설원을 미끄러지며 불시착했다. 

다행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저쪽에서 한 무리의 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중공군이라면 포로가 될 판이다. 웰커 중사는 권총을 얼른 뽑아들고 기체에서 뛰어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군인은 다행히 해병대원들이었다. 

웰커 중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맥아더 사랑관은 이무렵   운산지구 전투에서 중공군과의 첫 조우했다. 

◇··· 미군.국군의 악전고투의  후퇴 준비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김일성에게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미 7사단 13공병대대 소속 래비 헤이어 하사는 크레인을 향해 내달렸다. 

보급창 일대는 새어나온 휘발유로 바닥이 철벅거렸다. 공병대대원들이 돌아다니며 드럼통마다 구멍을 내고 있었다. 

후퇴하기 전에 전부 불 질러버리려는 것이다. 크레인 해체를 책임진 헤이어 하사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어디서 불똥이라도 날아들면 큰일이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임무는 한·소 국경을 향해 진격한 한국군 1군단을 지원하는 것이다.

 장진호 동쪽에 주둔한 미 7사단 31연대는 해병대보다 큰 어려움에 처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철수하려면 얼어붙은 장진호를 가로질러 유담리 해병 연대로 가든지 포위망을 뚫고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까지 가야 하는데 지원 부대인 31연대로서는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6.25 당시 아군들에게 투항하는 중공군들.[사진= 신수용 닷컴].png
6.25 당시 아군들에게 투항하는 중공군들.[사진= 신수용 닷컴].png

1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취약한 지점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하갈우리에서 급파된 특공대가 합세하면서 31연대는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전사했다.

 페이드 중령에게는 나중에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된다.

철수작전의 마무리는 공병대 몫이다.

 하갈우리의 해병대 기지도 그렇지만 풍류천 육군 기지에도 엄청난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철수하기 전에 보급품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조리 없애야 한다.

 C레이션 박스는 일차로 불도저로 밀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휘발유는 드럼통에 구멍을 낸 다음에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할 것이다. 탄약도 폭파시키면 된다.

 문제는 불도저와 크레인 등 각종 중장비와 트럭들이다. 놓고 가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비들이다. 

그렇다고 부숴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대피하라는 고함과 함께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곧 유류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잠시 후면 탄약고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고심하던 헤이어 하사는 결심을 하고 크레인에 올라탔다. 분신과도 같은 크레인을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크레인이 철수 대열에 끼어들자 뒷줄에 선 트럭들이 클랙슨을 요란하게 눌러댔다. 느림보 크레인이 앞장선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장진호4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사진=ohyh45켑처].png
장진호4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사진=ohyh45켑처].png

추위와 과로로 기진맥진한 해병들이 느릿느릿 기지로 들어왔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게 마치 유령의 행렬 같았다. 5연대와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침내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당도했다.

 일주일 동안 23㎞를 행군한 것이다. 기습과 추위로 137명이 죽고 4400여 명이 부상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철수였다.

​5연대와 7연대, 그리고 육군 7사단 31연대 병력이 속속 집결하면서 하갈우리 기지는 1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1000여 대의 차량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었다.

▶▶ 자료 출처 남북현대사의 10대 비화 (ohyh45) 언론에 비천 한국정치( 한국 기자협회) 해방30년 (동화문화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사건반세기( 대전일보사) 한국의 야당사( 이기택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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