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8)]  6.25의 중공군 개입, 1.4후퇴와 '굳세어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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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68)]  6.25의 중공군 개입, 1.4후퇴와 '굳세어라 금순아'
  • 신수용 정치 대기자(회장. 대전일보 전 사장.대표이사 발행인)
  • 승인 2024.01.0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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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아군,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9.16 인천수복→9.28 서울 수복→북진 
-아군,10월1일 38선넘어 10월 19일 평양점령, 10월 26일 압록강, 10월말 두만강까지 북진
-중공군 10월25일 참전,운산과 장진호 전투에서 아군 패퇴...12월 14일부터 흥남철수
-1951년 1월 4일 서울 후퇴,인민군 1월 7일 수원점령...3월 15일 서울등 탈환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과 1948년 정부수립,제헌국회구성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과 6·25 동란, 4·19혁명, 5·16사태와 1·21사태, 산업화와 10·26사태, 6.29선언과 민주화, 전 현직대통령들의 구속 등 허다하다. 
<본지>는 피와 땀을 적신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 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한겨울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목숨을 걸고 끊어진 평양 대동강철교를 타고 넘는 피난민 행렬. [사진=국방부 문헌].png
한겨울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목숨을 걸고 끊어진 평양 대동강철교를 타고 넘는 피난민 행렬. [사진=국방부 문헌].png

6·25전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중공군의 개입이다.

당시  패퇴하는 북한군을 쫓아 1950년 10월 2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한 아군(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 유역인 평안북도 초산에까지 이르렀다. 

아군은  함경도 지역에서는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고, 10월 말에는 압록강 유역인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의 북한 인민군과 연합군 참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북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이 지원한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 끝에 승리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세운 중국공산당(중공) 정부가 움직였다.

중공의 마오쩌뚱(毛澤東. 1893. 12~1976. 9)은 북한의 패배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월 19일 26만 명의 병력을 1차로 압록강 너머로 파병했다.

김일성과 마오쩌뚱[ 사진= 한국전사].png
김일성과 마오쩌뚱[ 사진= 한국전사].png

10월 25일에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미 10군단과 미 1해병사단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다가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미군의 전투서열 1위인 1해병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을 정도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포로가 잡혀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됐음에도 불구, 미군 정보당국과 미 합참은 11월 1일에 가서야 중공군의 부대 단위 공식 참전을 인정했다.

 미군은 갑자기 일방적인 수세에 몰리면서 순식간에 평양과 38선을 내주고 서울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다.

 미 합참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 대규모 공세를 받고 한반도를 지켜야 할지, 철수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철수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중공군은 산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은밀히 이동해 급습하는 전술을 뛰어났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사령과 팽턱회가 전선을 살피고 있다[ 사진=국방부 전사].png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사령과 팽턱회가 전선을 살피고 있다[ 사진=국방부 전사].png

평북 운산과 영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타격을 줬다.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한 총공세를 퍼부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1월 말부터 퇴각을 시작했다. 

평안도 지역에 있던 유엔군은 11월 29일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물러난 뒤에 12월 4일에는 평양에서도 철수했다. 

함경도 지역에 있던 유엔군도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하려던 장진호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월 14일부터 흥남에 집결해 해상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아비규환속 눈물의 흥남 철수.

중공군의 개입에 따라 아군은 병력의 열세와 강추위를 극복하지 못해 12월 이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던 미 제1해병사단마저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에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에 빠졌다.

 결국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군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동부전선에서 북진에 나섰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의 병력에 대해 철수 명령을 내렸다.

1.4후퇴중인 유엔군과 국군들[ 사진= 미공보국 제공].png
1.4후퇴중인 유엔군과 국군들[ 사진= 미공보국 제공].png

이에따라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 동안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아군들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아군은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함경남도 흥남에서 193척의 배편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 지역으로 다시 물러난 이른바 ‘1·4 후퇴’의 전초전이기도 하다.

 미 제10군단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철수해서 흥남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10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한국군이 흥남에 집결했다.

당시 퇴각하는 한국군과 미군을 따라서 북한 지역에 살던 주민들도 대거 남쪽으로 월남했다.

군인과 시민들 한꺼번에 피난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피난민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미 제10군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현봉학(玄鳳學)선생의 요청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특히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SS Meredith Victory)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는 화물을 버리고 1만4000 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그들을 이송해주었다. 

장진호4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사진=ohyh45켑처].png
장진호4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사진=ohyh45켑처].png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한때 가장 많은 난민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일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거제시의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동리의 소설  '흥남철수'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흥남철수이 생생함을 알린 소설이 있다.

김동리 선생의 흥남철수를 소재로한 작품이다.

그중 일부 내용은 이렇다.

'그 날 아침의 배는 6시 15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이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중략)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흥남철수 0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상륙정에 다투어 타고 있다[ 사진=ohyh45켑처].png
흥남철수 0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상륙정에 다투어 타고 있다[ 사진=ohyh45켑처].png

역시 6.25 전쟁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 이별의 아픔을 담은 당시 대중가요' 굳세어 금순아'도 이를 소재로 했다.

 전쟁과 후퇴와 철수,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 많은 인기를 끌었던 대한민국의 트로트 곡이다.

인기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작곡하고 그의 친구인 강사랑(강혜인) 선생이 작사했다. 

노래는 순수음악을 전공했다가 대중가수가 되어 '신라의 달밤'이라는 히트곡을 낸 현인 선생이 불렀다. 

1953년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이 노랫말에는 '흥남부두', '일사(1·4 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 있다.

 노래의 화자는 전쟁 때문에 가족, 연인과 생이별을 하고 피난지에서 장사치로 일하고 있다. 

박시춘 작곡 강사랑 작사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의 레코드판[ 사진=나무위키 켑처].png
박시춘 작곡 강사랑 작사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의 레코드판[ 사진=나무위키 켑처].png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노랫말 속의 피난지는 부산이나 실제 노래를 만든 박시춘과 강사랑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실향민의 아픔과 기원을 토로한 절절한 가사와 달리 노랫 가락은 경쾌하고 구성지다. 

 3절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너와 나 사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남북통일'이 되면 재회하여 함께 춤을 추자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노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절묘한 묘사로 전쟁 직후의 시대상과 공명하면서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인상적인 제목은 이후 영화, 드라마, 코미디나 패러디의 대상으로 자주 쓰였다. 

◇···1.4 서울 또다시 적 치하에 넘어가...쓰라린 유엔군 퇴각.

2차대전에서 보였듯이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워 승기를 잡은 중공군은 사기가 높아졌다. 

북진통일의 꿈을 꾼 국군병사...1950년 10월 25일 한국전쟁에서 반격에 나서 초산까지 진격해 들어간 육군 제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모습[사진= 국방부제공].png
북진통일의 꿈을 꾼 국군병사...1950년 10월 25일 한국전쟁에서 반격에 나서 초산까지 진격해 들어간 육군 제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모습[사진= 국방부제공].png

마오쩌둥(毛澤東)은 여세를  몰아 조금만 더 밀고 내려가면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할 것으로 봤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낸 후 그 여력으로 유엔에 가입하겠다는 외교 전략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오판이었다.

중공군이 1∼2차 공세는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첨단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1950년 11월 눈이 내린 북녂 땅의 한국전쟁이 개입하는 중공군들[ 사진=미 라이프지].png
1950년 11월 눈이 내린 북녂 땅의 한국전쟁이 개입하는 중공군들[ 사진=미 라이프지].png

더구나 국제문제는 단순한 힘의 논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사회는 한반도전쟁에 불법 개입한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있었으며 향후 전투상황도 예측 불허였다.

결국 1950년 12월 6일 평양이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어  12월 말에는 북한군이 38선 지역까지 남하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3일 의정부 방어선이 뚫리자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 넘겨주고 물러났다. 

북한인민군은 1월 7일 수원을 점령하며 남진을 계속했다.

돌아보면 동부전선에서는 미 10군단과 미 1해병사단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려다가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미군의 전투서열 1위인 1해병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4중공군의 인해전술...장진후전투[ 사진= 미 라이프지].png
1.4중공군의 인해전술...장진후전투[ 사진= 미 라이프지].png

이후  흥남철수작전(1950.12.12∼24)을 통해 미 10군단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서부전선도 중공군의 2∼3차 공세로 서울 철수를 강요받았다. 

◇···이승만대통령과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그리고 리치웨이중장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영국군 27연대를 표창하러 가던 도중 12월 23일 의정부에서 차량 사고로 순직했다. 

1.4 후퇴후 전선에서 만난 이승만 대통령과 순직한 워커 미 중장[ 사진= 신수용 닷컴].png
1.4 후퇴후 전선에서 만난 이승만 대통령과 순직한 워커 미 중장[ 사진= 신수용 닷컴].png

후퇴 중에 일어난 8군 사령관의 죽음은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사기까지 떨어트렸다. 

사흘 뒤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이 부임했다.

​한편, 중공군은 12월 27일부터 유엔군 주 저항선에 대한 위력 수색을 강화하더니 12월 31일 북한군과 연합해 3차 공세를 시작했다.

 새해를 앞두고 시작했기 때문에 '신정(新正) 공세"라고 부른다. 

김일성은 앞서 12월 4일 ‘중조연합사령부’를 창설해 북한군의 작전권을 중공군에 넘겨주었다.

1951년 1월 1일 새벽, 서울을 향한 중공군의 전면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13병단의 4개 군단을 주공, 2개 군단을 예비대로 해 문산·연천·철원으로부터 의정부-서울을 향해 쇄도했다. ​

평양에서 후퇴해  대동강의 부교를 건너 후퇴하는 국군긓[ 사진=국방부 전사].png
평양에서 후퇴해 대동강의 부교를 건너 후퇴하는 국군긓[ 사진=국방부 전사].png

철수를 계속하면서 사기가 떨어진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38선(방어선 B)을 내주고 수도권 방어선(방어선 C)으로 철수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철수 명령을 내렸다.

시민들은 피난을 준비했고 일부는 이미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20일 국회 개회식에 참석,“정부는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며 나는 여기서 죽기로 각오했다. 조국이 위기에 있을 때 혼자 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모두 죽을 각오로 함께 싸우자”고 연설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1950년 11월 27일 부터 12월 11일 까지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아군 병사들[사진 국방부 제공].png
1950년 11월 27일 부터 12월 11일 까지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아군 병사들[사진 국방부 제공].png

​이 대통령은 1월 2일  8군 리지웨이사령관을 대동하고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원주작전지역을 다녀왔다. 

1월 3일,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위한 공세가 강화됐다. 

서울 북쪽에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적 포병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 아래 수도권 방어선 C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사전에 무초 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작전상 후퇴’한다는 계획을 통보했다.

 그리고 서울 남방 60㎞ 지점인 방어선 ‘D’(평택-삼척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4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무초 대사와 조병욱 내무장관이 서울을 떠날 것을 강력히 건의해 이승만 대통령은 3일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1월 4일 마지막 후위 부대인 영국군 29여단이 한강 가교를 통과한 뒤 가교는 다시 폭파됐다. 중공군은 5일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흥남철수...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요의 소재가 된 실화[ 사진= 국방부자료].png.
흥남철수...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요의 소재가 된 실화[ 사진= 국방부자료].png.
아군 후퇴를 따라 이고 지고 끌고 남녁을 향하는 피란민행렬[ 사진=국방부 자료].png
아군 후퇴를 따라 이고 지고 끌고 남녁을 향하는 피란민행렬[ 사진=국방부 자료].png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한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피난민들은 그 위를 걸어 한강을 넘었다. 

일부는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인구 150만 명 중 80%가 떠나 서울은 유령 도시가 됐다. 

서울을 떠난 이들뿐만 아니라 북에서 월남한 사람까지 내려와 삼남지방은 초만원을 이뤘다.

◇···​중공군속에 반체제 인사들을 전장터에 보낸 마오쩌뚱

중공군의 개입은 침략자를 도와준 불법개입이라는 점과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인민군 수뇌부와 사진을 찍는 김일성[사진= 국방부 전사].png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인민군 수뇌부와 사진을 찍는 김일성[사진= 국방부 전사].png

근대화된 무기 없이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공군은 먼저 징과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며 요란스럽게 접근해 대항군이 공포심을 느끼고 도망가도록 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을 변형해 적에게 두려움을 주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이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데는 군사적 목적 외에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정치범이나 기타 죄인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인간 청소의 수단이다. 

중공정부 탄생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사상을 비판하거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되는 전통적 보수 우익 관료들을 체포해 전쟁터로 보내 자연스럽게 죽게 한 것이다. 

말수레로 보급품을 옮기는 중공군보급부대[ 사진=국방부 자료].png
말수레로 보급품을 옮기는 중공군보급부대[ 사진=국방부 자료].png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지방부호와 엘리트, 특히 마오(毛)의 공산주의 폭력혁명에 협조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이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보내졌다. 

이들을 다 죽여야 노동자와 빈농이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공군은 300만 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상당수 숙청 대상자가 포함됐다. 

공산권 자료는 엄격한 비밀주의를 유지하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20만 명에서 1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전의를 상실한 중공군과 리치웨이 장군의 킬러.리퍼작전.

미 2사단 23연대가 약 72시간에 걸친 처절한 사투 끝에 양평군 지평리를 지켜내면서, 전선에 구멍을 내려던 중공군의 기도는 물거품이 됐다.

전열을 가다듬은 미 해병병사들. 재탈환인 킬러작전등을 준비중이다[ 사진= 국방부전사].png
전열을 가다듬은 미 해병병사들. 재탈환인 킬러작전등을 준비중이다[ 사진= 국방부전사].png

 지평리 전투가 끝난 직후인 1951년 2월 16일부터 중공군은 2월 공세를 중단하고 후방으로 병력을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틀 뒤인 18일 중공군은 서부전선 한강 남쪽의 유일한 거점이었던 남한산성도 자진 포기하고 강북 쪽으로 철수했다.

중공군도 지평리 전투의 패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유엔군이 51년 1월 하순부터 순차적으로 울프하운드ㆍ선더볼트ㆍ라운드업 작전을 감행할 때부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중공군이 전력을 투입해 방어전을 수행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평리 전투는 달랐다. 

중공군으로서도 지평리 전투는 진검승부였다. 

1951년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한뒤 전선을 향하는 왼쪽부터 리지웨이 중장, 히키 소장, 맥아더 총사령관[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png
1951년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한뒤 전선을 향하는 왼쪽부터 리지웨이 중장, 히키 소장, 맥아더 총사령관[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png

압도적인 병력 투입으로 포위 섬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지평리의 미 23연대를 격파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중공군은 모든 상황을 원점부터 다시 점검해야 했다.

중공군은 51년 2월 17일부터 이른바 ‘운동방어’로 전환했다.

 유엔군이 공격해 오면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설정한 방어선에서 일정한 기간만 방어하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방어계획의 골자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1단계 공격작전, 이른 바 킬러작전에 돌입했다.

유엔군은 이 같은 속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이 보급과 전력 재편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감지했다. 중공군과 인민군 측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이나 20일 정도면 작전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연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보급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이 같은 공산군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신속하게 후속 작전 준비를 시작했다. 

작전명칭은 킬러 작전(Killer Operation)이었다. 작전 명칭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작전 목표는 중공군 측이 점령한 땅이 아니었다.

1950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청진항 앞등 동해상에서 공격하는 미국 미주리호함대[ 사딘= 국방부 전사].png
1950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청진항 앞등 동해상에서 공격하는 미국 미주리호함대[ 사딘= 국방부 전사].png

중공군 병력을 소모시키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서울 남쪽의 서부전선은 별다른 공격을 계획하지 않고, 중공군의 2월 공세로 후방으로 밀려난 횡성·평창 방면이 주된 공격의 목표였다.

 하지만 공격 시작과 함께 여름철 장대비를 연상시키는 강수량 수백 ㎜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공격 계획은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비포장도로는 하루아침에 진흙탕으로 엉망진창이 됐고, 겨울철 말라붙은 강 주변에 흔히 설치했던 각 부대의 지휘소들은 갑자기 허리 깊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흙탕물 때문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리치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서울 재탈환 킬러 작전중 미해병 1사단 장병이 적의 진지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자료].png
리치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서울 재탈환 킬러 작전중 미해병 1사단 장병이 적의 진지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자료].png

 공격은 커녕 장비 수습도 힘든 상황이었고, 각 사단은 보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뒤  동부전선에서는 폭설이 쏟아져 작전 개시 전에 제설 작업부터 해야 했다.

악천후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과 국군 지상부대는 공격을 계속, 3월 4일에는 횡성을 점령했다.

 6일 작전 종료가 될 무렵에는 양평~횡성~평창~강릉을 가로지르는 목표선까지 도달, 중공군 2월 공세 이전 상태로 전선을 회복했다.

◇···​1·4후퇴 후 두달만에 서울과 3.8선인근까지 재탈환.

작전 중 미9군단 지역에서만 적 79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원래 목표였던 적군 격멸에도 적지 않은 전과를 거뒀다.

두번째 작전을 리퍼작전이었다.

리치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서울 재탈환 킬러 작전으로 유엔군에 투항하는 중공군들[ 사진= 국방부자료].png
리치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서울 재탈환 킬러 작전으로 유엔군에 투항하는 중공군들[ 사진= 국방부자료].png

리지웨이사령관은 후속 작전을 계획했다. 작전명 리퍼 작전(Ripper Operation)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이름 그대로 적의 방어선을 절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 동쪽인 남양주 덕소리부터 가평, 춘천 북쪽을 연결하는 선까지 북진해 전선 중심부를 두 토막 내 적에게 큰 피해를 주겠다는 의도였다.

 한강을 건너 직접 서울의 적을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수도권 동북지역까지 아군이 진출하면 서울을 좀 더 용이하게 탈환할 수 있으리란 것이 리지웨이의 기대였다.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은 작전의 주목표인 중부 내륙지방으로 적 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마치 상륙작전을 할 듯이 양동작전을 펼쳤다.

미 소해정이 서해안을 따라 기뢰를 제거하다 진남포 외곽의 대동강 입구로 진입했다.

이어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해안을 함포 사격했다.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이 인천항을 떠나는 모습도 연출했다. 

동해안에서는 미 해군 함정이 함포사격을 가했다. 국군 해병대는 중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원산 근처의 섬을 점령하기도 했다. 

모종의 상륙작전이 준비되고 있는 것처럼 소동을 벌여 중공군과 북한군이 전선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51년 3월 7일 마침내 리퍼 작전이 시작됐다. 

1.4 철수후 서울.수원등을 재탈환 한 뒤  러시아제 탱크 옆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1.4 철수후 서울.수원등을 재탈환 한 뒤  러시아제 탱크 옆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사진= 신수용 닷컴].png

작전 초반의 고비는 미25사단이 맡은 양평 양수리 도하작전이었다.

 원래 이곳의 도하작전은 보병이 고속단정으로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미군 셔먼 전차가 도하하기에는 한강의 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인승 공격단정으로 한강을 건너간 중대급 병력의 미군 보병들이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아직 부교가 설치되기 전이었지만 미 89전차대대 소속 셔먼 전차들은 손실을 각오하고 강속으로 뛰어들어 파괴된 교량의 잔해를 이용해 기적적으로 도섭하는 데 성공했다. 

양수리 도하작전이 성공하면서 수도권 동북 쪽으로 치고 올라가 서울을 압박하려는 유엔군의 작전은 순조롭게 출발선을 통과했다.

수도권 동북 쪽에 미군이 진출하자 서울의 적은 별다른 전투 없이 철수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강 남쪽에 포진한 상태에서 마치 도하작전을 할 것처럼 양동작전을 펼치던 국군 1사단은 3월 14일 정찰대를 투입해 서울 시내에 별다른 병력이 없음을 확인했다. 

1951년 3월15일 재탈환한 서울의 노점거리[ 사진=국사편찬위원회].png
1951년 3월15일 재탈환한 서울의 노점거리[ 사진=국사편찬위원회].png

다음 날인 15일 국군 1사단은 정식으로 도하작전을 개시,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같은 날 미 24사단은 청평호, 국군 6사단은 홍천강 남쪽의 고지군에 도달했다. 미 기병사단은 21일 처음으로 춘천시내를 정찰한 후, 22일에는 춘천 시가지 전역을 확보했다.

 킬러ㆍ리퍼 작전으로 38선을 회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중공군에 내줬던 수도 서울은 1951년 철수 석달만인 3월 15일 국군이 다시 탈환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15연대 병력이 상륙주정을 타고 마포 쪽 모래사장에 도착한 뒤 시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참고문헌.기록=배영복 예비역 중장, 전 정훈감(6·25전쟁의 진실과 비밀),신수용의 사건 반세기( 대전일보사)''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6.25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미 국방부. 라이프지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 블로그 ohyh45) 김병륜기자의 다시쓰는6·25전쟁','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책밭)과 국방부.보훈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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