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세종의 인물 80인(1)-박팽년] 두 임금 섬길수 없다 절개지킨 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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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세종의 인물 80인(1)-박팽년] 두 임금 섬길수 없다 절개지킨 사육신
  • 신수용 대기자 권오주 기자
  • 승인 2023.12.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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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가양동서 태어나 여러차례 과거 급제한 문인
-명문이 뛰어나 세종.문종이 집대성 칭호...부친과 조부묘소의 여묘살이하며 전의면에 가문이뤄
-단종의 자리 탈취한 수양대군에 맞서 절개 지킨 충의
-남효온의 추강집을 통해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등 사육신 전해져...숙종때부터 복직

 

박팽년,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절개를 지킨 사육신 가운데 한분으로 대덕에서 태어났으나 세종시 전의면에 가문을 이뤘다.[사진=SBS 드라마중 한장면, 네이버블로그 kwac1981 켑처].png
박팽년,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절개를 지킨 사육신 가운데 한분으로 대덕에서 태어났으나 세종시 전의면에 가문을 이뤘다.[사진=SBS 드라마중 한장면, 네이버블로그 kwac1981 켑처].png
대한민국 미래의 도시를 꿈꾸는 세종을 아는 이는 많다. 세종을 명실공히 행정수도로 아는 이도 많다.  그러나 세종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만든 세종의 인물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가운데 최근 대전 세종지역학연구센터에서 역사인물은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文).무(武).충(忠).경(經)예(藝)분야의 인물을 추린 세종학 총서를 내, 세종을 다시 읽게한다. <본지>는 이를 계기로 온고지신의 취지로 세종의 인물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세종의 인물로 첫 손에 꼽히는 분은 박팽년((朴彭年, 존칭생략)이다.

우리에게는 박팽년을 사육신으로 부와 명예를 내던진 충절을 상징하는 사육신으로 그를 기록하고 있다.

◇···세종시 전의면과 박팽년 인연

그러나 그는 엄밀히 따지면 세종사람은 아니다. 아주 가까워 이웃인 대덕 회덕(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조선시대 1417(태종 17)에 대전 회덕에서 태어나 세조 2년인 1456년 (세조 2)에 39세의 나이로 숨졌다.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증조부는  박원상(朴元象), 조부는 박안생(朴安生), 부친은 박중림(朴仲林)이며, 모친은 김익생(金益生)의 따님이다.

백팽년이 세종(연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세종인물로 기리는 이유는  이렇다.

박팽년 표준영정.[사진= 세종시 블로그 제공].png
박팽년 표준영정.[사진= 세종시 블로그 제공].png

최근 펴낸 ' 대전세종지역학 연구센터'에서 펴낸 '세종인물여행'에 따르면, 대전 가양동에 태어났으나 조부인 박안생의 묘를 연기군 전동면에 쓰면서 부터라고 한다.

세종실록에 그런 대목이 있다.

박팽년은 집현전의 학사로 부수찬에 재직하던 당시 세종임금에게 하직을 청하는 일이 나온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는 하기에 그런 아버지 박중림을 봉양해야한다며 사직 이유를 밝히고 있다.

실록을 보면 궁중에 설치된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 박팽년(朴彭年)이 상언(上言)하기를'로 임금에게 그 이유를 적고있다.

'신(臣)의 학술이 거칠고 소루햐여 부끄럽게 여기며 한가한 데이 있어 글을 읽을 수  뜻이 있으나,말씀을 하려다가 못한 지가 여러해 되었습니다.   
 
지금 아비가 상(喪)을 당하여 전의현(全義縣)에 여막을 짓고 있고, 어미도 따라가 있는데 또 병이 있사오니 멀리 떠나서 벼슬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가서 여막옆에 있어 면식(眠食)을 살펴 묻고, 또 어미의 탕약(湯藥)을 받들어서 조석(朝夕)을 함께하고 다행히 여력(餘力)있으면 대강 학업을 연구하려 하오니, 엎드려 바라 옵건데, 전하께서 신의 조그마한 정성을 앙찰하시와 신의 직책을 면(免)하게 하여 구구(區區)한  소원을  이뤄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시었다'

이로인해 박팽년의 부친이 현재 세종시 전의면 관정에서 여묘살이를 한 것이나, 박팽년의 가문이 세종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대전세종지역연구학센터가 최근 펴낸 세종인물여행.[사진=대전.세종지역 연구학센터 제공].png
대전세종지역연구학센터가 최근 펴낸 세종인물여행.[사진=대전.세종지역 연구학센터 제공].png

그러던 중에 부친이 무고에 휘말리자, 1446년에 조정에 부친의 무죄를 상서한 내용에도 세종시 전의면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신의 아버지는 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전의현(全義縣) 남촌(南村)에 여묘(廬墓)를 살았는데, 그해 여름에 목천(木川)의 접노(接奴) 김삼(金三)이  그아들 김산(金山)을 데리고 전의(全義)와 본가(本家)이 이르러 그 아들을 두고, 신의 부자를 보고 그대로 수일(數日)을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박팽년의 부친이, 박팽년의 조부 박안생의  묘소에서 여묘살이를 한 것 뿐아니라, 전의에서 가문을 이뤘음을 기록으호 확인할 수 있다.

◇···사육신 박팽년은 누구 일까
 
그는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을 지낸 인물이자  사육신가운데 한분이다.

그는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됐고,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해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했다.

박팽년의 글씨.[사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png
박팽년의 글씨.[사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png

그러더니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박팽년은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됐다.

이어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극단전 선택을 시도했다.

그러자 역시 충남 홍성출신이나 세종시와 인연이 깊은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했다.

KBS 드라마 사육신의 포스터.[사진=KBS. 세종시 공식블로그 켑처].png
KBS 드라마 사육신의 포스터.[사진=KBS. 세종시 공식블로그 켑처].png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했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했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박팽년은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팽년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박팽년은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유성원 하위지 이개등 사육신등 충신의 위패가 있는 대구 달성의 육신사.[사진= 네이버블로그 dsshin0428 켑처].png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유성원 하위지 이개등 사육신등 충신의 위패가 있는 대구 달성의 육신사.[사진= 네이버블로그 dsshin0428 켑처].png

세조는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臣)’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쳬벌을 가했다.

 박팽년은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이라 대답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때 지은 박팽년의 '단심가'는 이렇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박팽년은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고, 이튿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박분(朴奮)이 모두 처형되어 3대가 큰 화를 입었다.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혔더.

그들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박팽년 서울노량진 묘소. 박씨지묘라고만 표기되어 있다.[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png
박팽년 서울노량진 묘소. 박씨지묘라고만 표기되어 있다.[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png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3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세종실로과 추강집(秋江集), 다른 글에 조금씩 남아있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문종에게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만큼 명문(名文)과 문집있을 텐데  전하지 않음은 안타깝다.

절의를 기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박팽년선생유허비(朴彭年先生遺墟碑)' 1989년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박팽년.유응부.성삼문등  사육신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출처및 참고문헌= 대전시사(대전시사편찬위원회) 충남도사(충청남도)세종인물여행(대전세종지역학 연구센터) 세종실록.추강집.한민족백과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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